칼럼

한국경제에 필요한 두 가지 처방

서의동 2015. 12. 20. 21:00

올해 한국경제에서 가장 아쉬운 장면을 꼽으라면 지난 3월13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벌어진 정부와 경제단체 간의 담판이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제 5단체장과 만나 최저임금 인상에 협조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재계는 “최저임금 인상이 산업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외면했다. 만약 협상이 성공했더라면 한국 경제는 ‘지도에 없는 길’로 한 걸음 내디뎠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박근혜 정부 임기 내에 최저임금을 어느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연차계획 정도만 합의했더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40%대를 넘나드는 탄탄한 지지율에 카리스마까지 갖춘 박근혜 정부의 실세인 최 부총리가 재계의 반발에 힘없이 물러서는 장면을 지켜보며 좌절감이 느껴졌다.

그 한 달 뒤 미국의 월마트는 6년간 7달러대로 동결했던 시간당 임금을 9달러로 올리며 미국 전역의 임금인상 열풍에 불을 지폈다. 일본, 독일은 올해 수십년 만에 가장 높은 폭으로 임금을 올렸다.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 11월24일 열린 경제재정 자문회의에서 최저임금을 2016년부터 매년 3%씩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독일 기업들도 올해 임금을 평균 3.5%나 올렸다.

물론 경제가 탄탄한 나라들과 기업실적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한국현실은 다르다고 재계는 항변할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한국은 사람이 유일한 자원이다. 임금인상은 사람에 대한 투자다. 이를 외면한 채 정부가 아무리 출산율 대책을 세워본들 ‘인구절벽’을 막을 수 없고, 생산성 향상도 기대하기 어렵다. 희망을 잃고 한국을 떠나는 청년들을 붙잡을 명분조차 없다. 한국경제에 가장 중요한 자원이 멸실돼 가는 사태를 달리 무슨 수로 막을 것인가.


최저임금 시급 및 인상률 추이_경향DB



최저임금이 우리 경제수준에 맞게 올라가면 포화상태에 도달한 자영업도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 이뤄져 영세 자영업자들이 임금근로자로 흡수된다. 노동자에게 제대로 임금을 못 주는 한계기업도 이 기회에 정리될 수 있다. 세계교역이 앞으로 상당기간 침체하면서 수출도 부진할 것임을 감안하면 적정 수준의 임금상승은 경제의 다른 축인 내수를 살리는 유력한 수단이 된다. 요컨대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사람에 대한 투자’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재설계돼야 한다. 그러려면 임금인상 말고도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노동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노조활동을 보호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청년들이 중소기업에 들어가기 꺼리는 것은 임금이 낮을 뿐 아니라 노동조건이 나쁘기 때문이다. 툭하면 임금을 체불하거나 잔업·야근수당이나 휴일수당을 생략하는 회사들이 아직도 숱하다. 출근시간은 있지만 퇴근시간은 없고,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이용하려면 사표를 쓰라는 회사도 적지 않다. 취업사이트를 보면 “제발 중소기업은 들어가지 말라”는 퇴직자들의 경험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노동자들이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일한 대가가 정당하게 주어지는 일터를 만드는 것은 사용자의 선의가 아니라 노동조합의 힘이다. 드라마 <송곳>을 보면 외국계 할인마트 노동자들이 퇴근할 때마다 받던 가방검사가 노조설립 이후 중단되는 장면이 나온다. 노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노조가 활성화되면 중소기업은 매력적인 일터로 바뀔 수 있고, 중소기업 ‘미스매치’ 현상도 사라질 수 있다.

1990년만 해도 18%였던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지난해 말 10.3%로 추락했다. 그나마 대기업은 조직률이 47.7%에 달하는 반면 중소기업은 2%대에 그친다. 임금노동자 중 대기업 비율이 10% 남짓한 반면 중소기업 노동자는 90%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하면 노조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는 극소수다. 이처럼 조직률이 낮은 것은 노조를 협력의 대상으로 보려 하지 않는 기업과 정부의 뿌리 깊은 편견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은 아예 노조를 박멸 대상으로 삼겠다는 기세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게 소요죄를 적용한 것은 노조가 ‘사회혼란의 주범’이라는 딱지를 붙이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하지만 경제가 어려울수록 노동조합을 보호하고 힘을 실어 책임있는 선택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전체 노동자의 3%만 대변하는 민주노총이 큰소리친다고 비난만 할 게 아니라 노조설립 방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노조를 쉽게 만들도록 해야 한다.

한국 경제가 기로에 서 있는 데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돈이 필요한 부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업 곳간에 쌓인 돈이 노동자 가정에 흘러들어가야 한다. 한국경제에 필요한 것은 규제완화나 해고를 쉽게 하는 노동관련법 개정이 아니라 임금인상과 노조활동 보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