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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서의동 2017. 1. 22. 22:42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로 나온 독일사. 책 제목에 '분열과 통일'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 듯 독일의 역사는 복잡다단하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중앙집권적인 절대권력을 수립했던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큰 울타리내에 소규모 마을들이 곳곳에 점재했던 형태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제국은 큰 울타리를 제공해 외부의 침입을 막아줄 뿐 중앙집권화의 여력은 없었던 셈이어서 각지의 제후들이 자기 영역에서 분권적인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비교적 느슨한 제국질서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이 복잡다단한 역사를 솜씨있게 요약해낸 저자(메리 플부룩)의 역량이 돋보인다. 


독일사를 살펴보기로 한건 요즘 클래식을 들여다보다 호기심이 생겨서다. 바흐, 헨델, 모차르트, 하이든 같은 음악계의 거장들이 하나같이 독일 출신이다. 이런 빛나는 예술적 성취가 어떤 터전에서 가능했던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솔직히 이 한권으로 책으로 그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좀더 다른 책들을 챙겨볼 필요가 있을 듯. 하지만 독일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훌륭한 입문서일 것 같다.

(책을 평가하거나 독후감을 쓸 역량이 없어 1871년 독일제국 수립때까지의 주요 대목을 스크랩해둔다.) 




(독일사의 시작)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독일이라는 국호가 부족이나 영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 유래된 희귀한 나라라는 점이다. (30p)


(중세초기와 성기의 독일) 오토1세는 936년에 왕으로 선출되어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렀는데, 이는 아헨을 수도로 하던 사를마뉴의 후계자임을 주장하는 행위였다. 그는 또한 교회를 공령들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사용했다. 왕은 주교의 선출을 결정할 수 있었고, 또한 교회재산은 왕조적 분할상속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주교들은 세속 제후보다 훨씬 더 충성스러운 왕의 측근이었다. 교회가 소유한 땅은 언제나 왕국을 순행하고 있던 왕과 그의 수행원들이 쉬었다 가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34P)

오토 1세는 초기의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에 롬바르디아 왕의 미망인과 결혼함으로써 롬바르디아의 왕이 되었다. 그뒤 그는 962년에 교황으로부터 황제로서 대관과 도유를 받았다. 그로써 독일이라는 군주국과 로마제국이 결합됐는데, 이는 유럽국가들 중에서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이 결합관계는 그에 부수된 힘, 의무, 긴장, 모순을 내포한 채 1806년까지 지속된다. 

 중세 독일의 군주들은 교황으로부터 로마에서 대관을 받게 되면서 그들의 힘은 이중적으로 분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황제로서의 권위를 주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세속적으로 이탈리아 정치에 개입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권력과 종교적 권력, 즉 황제권과 교황권간에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이 두가지 요소는 독일의 왕권을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만드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35p)


(중세말의 독일) 도시화가 훨씬 밀도있게 진행된 곳은 역시 남부와 서부였다. 시벽과 성루, 성, 교회, 이러저러한 종교건축, 찬란한 시청, 길드회관, 도시귀족들이 거주하던 튼튼한 주택 등이 도시의 특징적인 모습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독일정치의 분권적 성격으로 말미암아(비록 프라하가 오랫동안 제국의 주요 중심이었지만) 그 어떤 도시도 런던이나 파리 같은 왕도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43p)


인구 팽창의 압력때문에 벌어진 동쪽 슬라브지역으로의 식민화 운동은 13세기에 극히 중요한 흐름이었다. 튜튼 기사단의 수도기사들은 슬라브 이교도들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작업의 일환으로 머나먼 북동부 지역에 1226년부터 새로운 국가, 즉 프로이센을 성립시키기 시작했다.(47p) (중략)이 상대적이고 후진적이고 도시화되지 않았으며 경제적으로 빈곤한 식민국경지대인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은 그후 강력한 국가의 기초를 닦게 되고, 그 결과 19세기와 20세기초의 독일사를 지배하게 된다. (48p)


합스부르크 가문은 1438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이 몰락하는 1806년까지,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황제권을 세습했다.(49p) (중략) 1500년경, 이제 '신성로마독일제국'이라는 정식 명칭을 갖게 된 제국의 정치형세는, 잡다한 성속 제후들의 영토들 속에 자유 제국도시와 독립적인 제국기사들의 성채가 점점이 박혀 있는, 엄청나게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50p)


(독일농민전쟁)1524~26년 독일 남서부에서 북동부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서 농민들과 도시 평민들의 봉기가 발생했다. (중략) 1476년 '피리부는 니클라스하우젠'(1476년 뷔르츠부르크 주교령에 홀연히 등장해 성모마리아로부터 금욕적 삶을 통해 죄를 씻으라는 명령을 민중들에게 전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음악가)이 주도한 봉기가 발생했고, 분트슈 봉기가 1493년, 1502년, 1513년, 1517년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69p)


(독일 종교개혁의 전개) 많은 제후들이 종교개혁을 지지한데는 종교적 이유와 함께 정치적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그들은 우선 교황의 사법권과 과세권을 벗어던지게 된다는 사실을 기꺼워 했고, 또한 교회 재산을 세속화하는 것에도 매력을 느꼈다. (73p)(중략)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는 카톨릭과 루터파가 확보한 기존의 지위르 동결시킴으로써 대내적인 정치적 분규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제후가 자기 지배령의 종교를 결정하도록 규정했고, 선교활동을 벌이거나 다른 영방주민들을 개종시키려 하거나 다른 나라의 동일종파를 보호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한 영방국가의 지배적인 종파에 이견이 있는 자들은 그곳을 떠나야 했고, 종교적 소수집단은 도시에만 허용됐다.(78p)


독일 종교개혁에 대해 부인할 수 없는 통설이 있다. 종교개혁은 독일의 내적 결집을 촉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국은 정치적으로 분열돼 있었고 게다가 카톨릭 황제는 종교적 분열을 인정해야만 했다. 종교의 분열은 근대초 독일에서 영방국가가 발전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었다. (중략) 종교가 더이상 정치적 갈등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게 된 것은 1648년(베스트팔렌조약) 이후의 일이었다.

(83p)


(30년전쟁)분명한 것은 17세기 중반에 수많은 유럽국가에서 봉기, 혁명, 내전 같은 소요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의 프롱드난과 영국 혁명이지만 그 밖에도 귀족이나 한 지방 전체가 중앙집권적 군주의 압력에 대항한 봉기도 빈발했다. 그러한 소요사태에는 몇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봉기가 대부분 중앙집권국가 건설과 관련돼 있었고, 이는 다시 유럽의 국제적인 경쟁체제와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중략) 신성로마제국 내부의 긴장과 유럽의 국제적 긴장이 결합돼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지속된 일련의 충돌이 빚어졌으니 '30년 전쟁'이다. 제국 내부의 종파적 분열, 영방제후에 대한 지방 신분의회의 저항, 제국 권력에 대한 영방제후들의 저항, 독일 지역에서 쟁패를 벌이면서 동시에 독일내부의 갈등에 빠져든 여타 유럽국가들 사이의 갈등 등이 연관되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전쟁, 스웨덴과 폴란드의 전쟁, 프랑스와 합스부르크의 전쟁이 그랬다.(89p)

(베스트팔렌조약과 30년전쟁의 영향)베스트팔렌조약은 제국내부의 두가지 갈등을 해결한 타협이었다. 하나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갖가지 갈등이었고, 다른 하나는 야심적인 황제와 권력을 지키려던 제후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베스트팔렌조약은 제국의 공법과 정치의 기준점이 되었다. (99p)(중략) 베스트팔렌조약은 세속화, 즉 정치와 종교의 분리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였다. 종교적 이해관계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항상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전쟁의 와중에 역력히 드러났다. 영방국가의 신분의회와 제후들은 종파적인 동맹을 엄격하게 고수하기 보다는 야심적인 황제에 저항하는데 몰두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유럽의 갈등에는 잠재적인 동맹국이나 적국의 종파적 경향보다는 세력균형이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떠오르게 된다.(102p)


(절대주의 시대1648~1815년) 17세기 중반부터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몰락할 때까지 독일지역에는 독특한 정치적 패턴이 자리잡았다. 제국은 더이상 적극적인 정치적 기구도 아니었고,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할 잠재적 기초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국의 사법권이 지속되고 제국이 수동적이나마 정치적 보호막 역할을 수행함에 따라, 제국이라는 제도가 없었더라면 이웃 강대국에게 흡수됐을 군소 정치세력이 생존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소국가 놀음'이라는 독일적 패턴이 굳어졌다. 

장기적으로 이시기에 발생한 가장 중요한 정치변화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부상했다는 점이다. 문화적으로는 음악 문학 철학에서 찬란한 업적이 성취되었고, 문자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공중이 등장했다.


1740년경의 프로이센은 여전히 경제적 후진국이었고 국력이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같은 주요 강대국과 비교도 안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의 치세에서 극적으로 변화했다. 프리드리히는 그가 물려받은 군사력을 이용해 주저하지 않고 국제정치에 개입했다. 1740년에 합스부르크의 슐레지엔 영토에 침입했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1748년)이 끝나자 슐레지엔의 주인이 됐다. 그 땅을 프리드리히 2세는 다시 7년전쟁(1756~1763년)에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의 강력한 동맹군으로부터 방어해야 했지만 그 공격을 격퇴하고 슐레지엔에 대한 소유권을 승인받게 되었다. 이 때부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경쟁관계는 독일 문제의 주요한 변수가 됐다. '양강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126p)


(종교,문화,계몽주의)프로테스탄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필립 야코프 슈페너(독일 경건주의의 대표적 인물)의 외침에 호응했다.(중략) 경건주의의 영향은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많은 학자들은 경건주의에서 독일 문화의 주요한 특징들, 예컨대 감정이입적인 예민함이나 시민적 교양소설의 발전 등의 뿌리를 찾는다. 어떤 학자들은 경건주의에서 헤르더에게서 두드러지는 세속적 문화적 민족주의 또는 애국주의의 기원을 보기도 한다. 경건주의가 교회와 목사를 우회해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이해한 것을 토론하는 모임을 주도했던 사정에서, 이성에 대한 새로운 신뢰와, 신분이나 출생과 무관한 새루운 능력주의가 생겨났다. 특히 재능을 촉발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프로이센 같은 나라에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이 확대됐다. (135p)


(독일계몽주의)독일 계몽주의에 대한 상투적인 평가는 그것이 사상과 영혼의 자유를 현실의 지배체제에 대한 예종에서 분리시킨, 본질적으로 비정치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이다.(중략)계몽적인 관리들과 목사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봉사하는 군주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몽된 군주치하에서 좋은 정부를 통하여 행정체제를 개선하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독일 계몽주의가 '소국가 놀음'이라는 맥락속에 있는 이상, 프랑스에서처럼 독립적인 비판적 지식인이 아니라 국가에 의존하는 동시에 국가를 견인하는 전문가 집단이 계몽주의 운동을 끌고 나갈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143p)


(프랑스혁명의 영향)1792년에 프랑스군은 신성로마제국 영토에 침임했다. 프랑스군은 손쉽게 승리를 거듭했고 1794년까지 라인강 서쪽의 모든 독일 땅이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는 1814년까지 지속된다. 프랑스의 통치는 라인강 서부에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다. 행정 사법 입법체계가 재조직되었고, 농노제와 봉건적 사회관계가 폐지됐다. (중략) 나폴레옹은 1806년에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다름슈타트를 포함하는 16개 국가들로 구성된 라인동맹을 결성했고 또한 신성로마제국 외부에 놓여있는 바르샤바 대공국을 창설했다. 이제 신성로마제국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고, 제국은 결국 1806년 8월8일에 공식 해체됐다. 

 (나폴레옹의) 해방전쟁은 1814년 4월에 종결됐다. 그리고 1814년 10월에서 1815년 6월까지 빈회의가 열렸다. 회의를 좌지우지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외상이었고 1821년부터 총리를 겸임한 메테르니히였다. (중략)장래의 잠재적인 프랑스 팽창주의에 대비해 강력하고 안정된 독일을 건설해야 한느 숙제를 풀어야 했다.(중략) 신성로마제국의 자리에 독일연방이 들어섰다. 연방은 34개 군주국과 4개의 자유도시를 합해 모두 38개 국가로 구성됐다. '독일연방'은 연방국가는 아이었다. 오히려 독립국가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국가연합이었다. 국가수반도, 행정기구나 집행기구도, 공통적인 법체계도, 공통적인 공민권도 없었다.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연방의회는 본질적으로 독립국가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대사들의 총회였을 뿐이다.(157p)


(산업화의 시대1815~1918) 빈 회의가 유럽의 세력균형을 위해 설치했던 자치는 19세기 내내 유럽의 평화를 성공적으로 지켜주었다. 그러나 1871년 독일이 프로이센의 주도아래 통일을 성취하고 급속하게 산업화하면서 세기 전환기에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자 유럽의 세력균형은 흔들리게 되었다. (160p)

(19세기에) 생산이 가속화되면서 경제의 정치적 틀 역시 변화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이센이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채 주도한 관세동맹의 결성이다. 1834년 1월1일 총인구 2300만에 달하는 18개 나라가 프로이센의 주도아래 독일관세동맹을 조직하게 되었다. 


(1848년혁명) 프랑스 2월 혁명소식이 전해지자 독일 전역에서 봉기가 발생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헌법과 경제적 자유를 주장했으며 민족주의자들은 통일을 요구했다. 노동계급의 저항은 임금과 노동조건의 즉각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1848년의 혁명은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 프롤레탈리아 혁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략) 자칭 예비의회가 프랑크푸르트에 소집되었다. (중략)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는 그후 몇달간 일련의 근본 문제를 논의했다. 개인주의적인 경제질서와 교역의 자유가 천명되었고 1848년 12월28일에 기본권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통일독일은 연방적인 국가이되 황제가 있고 내각은 의회에 책임을 진다는데 합의가 이뤄졌으며, 예기치 않게 1849년 4월29일에 성인 남성 보통선거권을 도입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179p)

 독일을 통일하자는데 원칙적으로 합의하기는 쉬웠다. 그러나 독일을 현실적인 국경을 정하는 일은 해법이 없을 정도로 어려운 문제였다. 국적문제가 특히 난감한 세나라가 있었다. 우선 두말할 나위없이 오스트리아였다. 합스부르크 지배령가운데 독일연방에 속하지 않는 지역을 '대독일'에 편입시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독일연방에 속하는 지역을 포함해 오스트리아 전체를 제외시키고 프로이센으로 하여금 '소독일'을 지배하도록 할 것인가 하는게 가장 난감한 문제였다. (중략) 결국 열띤 토론끝에 하인리히 폰 가게른이 이끄는 '소독일주의'온건파가 승리했다.(중략) 국민회의는 통일논의를 지루하게 진행한 끝에 1849년 봄에 소독일 황제 자리를 프로이센 국왕에 부여했다. (180p)


(비스마르크)1863년부터 1871년에 이르는 시기에 비스마르크가 추진한 정책에 대해서는 평가가 분분하다. 그는 아마 조작의 수괴라기 보다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영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주요목표는 프로이센의 지위를 지키고 확대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위해 세차례의 전쟁을 감행했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둘러싸고 벌어진 1864년 전쟁과 1866년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그리고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그것이다. 이 결과 1871년 독일제국이 창건되었다.(189p)

(오스트리아와의 전쟁결과) 이제 기존의 독일연방과 상이한 정치체제가 수립됐다. 북독일연방이 독일연방을 대체했던 것이다. 새로운 체제는 국가연합이라기보다 연방국가였다. 새로운 연방에는 오스트리아 뿐 아니라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부르크, 헤센-다름슈타트 등의 남북구가들도 배제돼 있었다. (남부국가들을) 프로이센의 지배영역 속에 포함시킨 사건이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이었다. (중략) 전쟁기간 중 남부 독일국가들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북독일연방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았따. 전쟁이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나자 그 나라들은 프로이센에 종속되는 길외에 대안이 없었다. 

그리하여 1871년 1월18일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여러나라의 군주들이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통일독일의 세습 제위를 수여했다. 그로써 독일제국이 수립되었다. (193p)

(제2제정 헌법)제국의회는 입법에 대한 거부권만을 보유했을 뿐, 입법권을 행사하는 기구는 연방참의원이었다. 참의원은 제국을 구성하는 개별국가들의 대표로 구성되었다. 프로이센은 가장 거대한 국가로서 참의원에서 사실상 거부권을 보유함으로써 프로이센의 이익에 배치되는 조치나 개헌안은 언제라도 차단할 수 있었다. (중략) 군대는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1883년에 제국의회는 군 예산에 대한 통제권마저 상실함으로써 군대에 갖고 있던 최소한의 통제력마저 잃어버렸다. 독일군이 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정치에서 대단히 모호하고 결과적으로 치명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바로 그때문이다.(195p)


비스마르크는 한편으로 사회주의자들을 정치적으로 핍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적인 사회입법을 도입했다.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 구상은 1881년 황제교시로 발표되었고, 의료보험은 1883년, 산재보험은 1884년, 연금보험은 1889년에 각각 도입되었다.(중략) 비스마르크는 독일에 대단히 모호한 유산을 남겼따. 한편으로 그는 프로이센이 지배하는 소독일 통일 민족국가의 창건을 주도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유럽의 강대국이요 세계의 강대국인 한 나라를 지휘했다. 다른 한편 그가 입안한 국가는 권위주의 국가였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과부화된 나라였다.(203p)


독일사의 독특한 특징은 정치적 단위와 지리적 영토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합스부르크의 지배령이 신성로마제국 외부에도 존재했다는 점이 그 단적인 예다. 합스부르크는 사실 제국 외부의 영토 때문에 독자적인 힘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합스부르크의 이해관계가 제국내 비 합스부르크 제후들의 이해관계와 상치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불일치는 합스부르크 권력의 주요한 기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이 중앙권력으로서는 약화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제국내부에 분규가 발생하는 결정적 시점에 다른 곳의 분규에 연루돼 있는 황제가 조기에 제국 내부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고, 따라서 (종교개혁 때처럼) 저항세력이 성장할 여지가 많았다.

다른 한편 포괄적인 제국이 존재했기 때문에 독일지역에 연방적 국가체제가 발달했고, 그 덕분에 제국의 보호가 없었더라도 팽창주의적인 거대 영방국가의 먹이가 되었을 소국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중략) 
또한 개별 영방국가를 넘어서는 제국이라는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에, 군소국가들의 상대적 독립성을 지원하는 외교적 동맹과 방어체제가 발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제국과 주권국가들의 묘한 공생관계가 발전했다. (362~36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