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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석영 @김영민 기자

작가 황석영(75)의 자전(自傳) <수인>을 읽다 보면 그의 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개의 ‘지리·정치적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광주와 북한. 황석영은 1989년 방북을 결행해 공고한 분단체제에 충격을 던진다. 문화활동과 삶의 근거지였던 광주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희생과 항쟁을 국내 언론들이 단 한줄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던 5공화국 시절 광주항쟁 기록의 출간을 감행한다. ‘인생과 문학을 일치시키겠다’는 청년기의 다짐에 비춰볼 때 가장 뜨거운 현장에 있어야 하는 건 그로서 당연한 선택이었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 듯 하다.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에 6차 핵실험까지 강행하면서 북한은 더 뜨거워져 있고, 신군부에 대한 사법적 단죄까지 끝난 ‘광주’ 역시 보수정권 10년간 제기된 여러 논란에다 최근 개봉된 영화 <택시운전사>가 1000만명이 넘는 관객몰이를 하며 다시 ‘핫스포트’가 됐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 1일과 4일 두차례에 걸쳐 황석영을 만났다.  

 

황석영은 김대중 정부 당시인 1999년 대북 메신저로 활동했던 일을 처음 공개했다. 한때 ‘변절했다’는 오해까지 감수하며 이명박 정부와 추진하다 실패한 ‘알타이 연합’의 뒷얘기도 풀어놨다. “망명중에도, 출옥 직후에도 정부 요청으로 북한과의 메신저 역할을 계속 해왔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고, 남북이 화해상생할 길을 모색하는 게 작가로서 내 할 일이다.”

 

황석영은 문재인 정부가 대북정책에 대해 지나치게 즉자적인 대응을 보이고 있는 점을 걱정하며 “남북간의 핫라인을 조속히 복원하고, 북한과 미국이 평화협상에 나서도록 문재인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냉전의 관성이 남아있는 동북아의 의제를 정치·군사에서 경제·문화로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문재인 정부는 ‘통일’ 대신 ‘평화’를 한반도의 중심 담론으로 세워야 한다”고도 했다. 

 

황석영은 광주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우리가 향유하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출발점은 광주이고, 현재의 우리의 삶이 광주의 피의 대가로 이뤄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이라며 “7~8년에 걸쳐 이룩된 87년 체제의 전야가 부마항쟁이고, 광주항쟁이 절정을 이뤘다면 6월 항쟁이 종지부였다. 그 미완의 87년 체제가 촛불로 매듭지어지려 하고 있다”고 했다. 


‘보통사람의 10인~20인분의 삶을 살아냈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황석영은 4시간 동안의 인터뷰에서 정치, 사회, 문학 등 다방면에 대해 풍부한 경험 속에서 퍼올린 생각들을 거침없이 펼쳤다. 남북관계에서는 오랜 방북체류 경험에서 우러나온 통찰력과 식견이 돋보였다. 한국문학의 거장임에 틀림없지만, ‘원로’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활기와 유쾌함이 넘쳤다.  

 

■“남북관계 경제·문화적 접근 필요” 

 

-최근에 보니 강연도 하고, 청년들도 만나시더라. 작품 준비도 하시나. 

"내년까지는 쉬려고 해. 다른 일도 많고."

 - 어떤 일인가.  

“남북관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예전에 정부 때도 정상회담을 도와달라고 해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서신을 보내고 대신 접촉도 하고 그랬지.”

 

-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라. 


“김대중 정부 때는 방북건으로 5년간 수감됐다 석방된 뒤 반년쯤 지났을 무렵인데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에서 사람을 보내 도와달라더라. 나더러 북에 다녀오라고 하길래 ‘북에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10년을 허송세월했다’고 항의했다. 그래도 주변에서 ‘김대중 정부는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 <장길산>영화 남북합작 추진을 명분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길래 그러자고 했다. 베이징에 갔는데 공교롭게도 도착한지 사흘만에 제1차 연평해전이 터져 분위기가 싸늘했었다. 주중북한대사를 통해 북에서 파견된 인사들을 만나 ‘남북끼리 이야기를 하고 신뢰를 쌓아야 미국과도 제대로 협상할 수 있지 않느냐’고 달랬다.”

 

김영삼 정부 때 상황은 <수인>에도 나와 있다. 황석영이 방북했다가 미국 망명중이던 김영삼 정부 초기, 정부가 사람을 보내 ‘정상회담을 하고 싶은데 김일성 주석의 의향을 알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황석영이 김 주석 앞으로 편지를 썼고,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던 재미동포가 방북해 서신을 전달한 뒤 김 주석의 답을 받아 유엔대표부를 통해 정부에 전했다는 게 요지다. 

 

- 이명박 정부 때는 남북관계 일을 돕다가 ‘변절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반도의 1.8배쯤 되는 동몽골을 남북이 공동으로 개발하는 구상이 이전 정부 때부터 검토되고 있었다. 기후변화로 농사가 가능해졌고 북부 유연탄 지대는 시베리아 탄전보다도 질좋은 석탄이 나와. 이걸 이명박이 하겠다고 하길래 진보보수가 힘을 합해 도와야 할 일이라고 보고 몽골을 몇차례 다니며 협의했다. 몽골 정부는 동몽골에 북한 노동력을 200만명까지 유치하겠다면서 의욕을 보였다. 그렇게 되려면 북한 군사력을 상당규모 빼야 하고, 자연스럽게 군축과 평화협정 논의로 이어질 수 있거든. 북한의 식량난도 해소될 기회였지. 기업들은 얘길듣고 침을 질질 흘리더구만. 돈은 정치보다 훨씬 진보적이야.(웃음)”

 

- 그런데 왜 무산됐나. 


“그때 김정일 위원장에게 편지를 썼다. 부친과의 인연을 거론하면서 민족이 함께 살길을 찾아보자며 제안을 정리한 편지를 들고 메신저가 방북했다. 편지를 전달한 다음 날 당 조직지도부 간부들이 ‘편지를 독회하면서 모두 울었다. 장군님께서 당장 시행하라고 했다’고 했다더라. 우선은 남북한과 중앙아시아 5개국, 몽골이 함께 하는 ‘알타이경제문화연대’를 만들자는 구상을 추진하면서 남북 정상회담도 할 계획이었지. 그러던 도중에 몽골 대표단이 한국에 왔는데 이명박 정부의 외교참모들이 엉뚱한 소리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어. 아마 청와대 내 친미세력들이 견제한 것 같다.”

 

- 미국과 사전협의가 없었기 때문인가.


“외교라인 핵심들이 강경하게 반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쨌건 2010년 8월에 몽골 울란바트로에서 초원문화제를 열어 ‘알타이 문화경제연대’를 발족시키려 했는데 그해 2월 청와대에서 북한을 빼자고 하더라. 욕먹어 가며 한 건데 북한을 빼버리면 명분이 없잖아. 그래서 빠졌지. 그 뒤 3월말 천안함 사태가 터지면서 완전히 문이 닫혀버렸다.”

 

- 박근혜 정부 때도 요청이 있었나. 


“드레스덴 선언 나온 뒤에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이 보자고 해서 만났는데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통일위원회를 꾸릴테니 들어오라길래 거절했어. 드레스덴 선언의 가장 큰 하자가 핵문제 해결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는데, 이건 대화를 안하겠다는 뜻이잖아.”

 

-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한반도 문제의 방정식이 더 복잡해졌다.  


“이게 사실은 예상됐던 거다. 2005년 9.19 합의 직후에 미국 부시 행정부가 금융제재에 들어가면서 평화체제 논의가 좌초됐고, 오바마 행정부도 ‘전략적 인내’라며 북을 방치했잖아. 그 기간동안 북은 경제를 다지고 핵과 미사일의 성능을 높이면서 여기까지 온거지. 박근혜 정부초기에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동결할테니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하라’고 했는데 박근혜가 ‘노’했고 미국도 무반응이었다. 이번엔 그 카드가 거꾸로 이쪽에서 거론됐다. ‘한·미훈련 중단할테니 핵 동결하라’고. 그런데도 북이 반응없이 여기까지 온 거는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은 토대 위에서 협상하겠다’는 뜻인 것 같다.”

 

작가 황석영 @김영민 기자

- 문재인 정부의 대응이 쉽지 않을 거 같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실책은 섣부르게 사드배치를 현실화시킨 거다. 또 북이 미사일 쏘면 전략폭격기 연습으로 대응하는데 그런 즉자적인 태도가 걱정이다. 빨리 북한과 핫라인을 복원하고 물밑접촉을 시작해 남북간에 예전에 있었던 관계들 중 낮은 단계부터 차례로 복원해야 한다. 미국도 이미 1.5트랙(반관반민) 접촉을 하고 있잖아. 이번 정부내에 남북관계를 수교단계까지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동시에 북미 평화협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평화협정을 하려면 종전선언을 해야 하고, 그럴 경우 주한미군의 주둔 명분이 사라지는 문제가 생긴다. 주일미군 역시 마찬가지가 될테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오래 전부터 ‘평화협정이 이뤄져도 동북아 안정을 위해 미군이 주둔해도 좋다’고 여러번 이야기를 했거든. 북미수교 과정에서 한반도 미군주둔을 용인하는 걸 조건으로 하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 

 

-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도 오락가락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쌓은 노하우를 아직 학습하지 않은 것 같다. 안정된 정책을 끌고갈 역량이 있을지도 걱정이다. 그래서 한국이 잘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도 해가면서 북·미 조정자 노릇도 해야 하니 쉽지 않겠지. 가장 걱정은 미국이 평화협상 가는걸 귀찮아 해서 핵보유국을 인정하면서 현상유지할 가능성이다. 그러면 우리만 난처해질 수 있어.”

 

- 동몽골 개발은 제대로 추진됐더라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지평을 크게 바꿔놨을 프로젝트일 것 같다. 알타이 연대는 아직도 유효한가. 


“계획이 어그러진 뒤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눈치를 채고 ‘유라시아 연합’을 선언했어. 중국도 큰일났다 싶어 ‘일대일로(一帶一路·실크로드 경제벨트)’를 내놨지. 태평양에서 카스피해에 이르는 ‘유목영역’은 4억 인구에 매장량 세계최대의 지하자원을 가진 지역이니 지구권 시장에 새로운 활력이 생길 거다. 지구촌 판도가 달라질 빅 이벤트였는데 냉전시대의 타성에 함몰돼 있으니. 지금도 푸틴의 ‘유라시아 연합’과 연계해 ‘유라시아 알타이연합’으로 할 수도 있다. 여전히 시베리아 개발에 남북이 참여하고 철도연결도 해주길 바라고 있거든. 남북한과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5개국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봐. 아세안(ASEAN) 같은 경제문화협의체가 많은데 못할 이유가 없어. 동북아에는 여전히 냉전의 관성이 남아 있잖아. 동북아의 이슈를 군사정치에서 경제문화로 확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 <수인>을 보면 ‘망명기간은 이후 내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고 세계시민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게 한 하나의 학교’라고 했다. 


“민족주의로는 남북관계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봐. 동북아 전체의 지역차원에서 세계와 더불어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거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던 시대에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는 모순된 개념이 아니었다. 남북이 늘 편협하고 격렬해지는 것이 민족주의적 전제 때문인데 이제 벗어나 생각해야 할 거야. 그런 의미에서 경제문화적 접근이 좋을 거다.”

 

황석영은 한반도의 중심담론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가 돼야 한다고 했다. “통일은 정권들이 마케팅으로 너무 써먹어서 더렵혀졌고, 남북 민초들도 많이 속았잖아. 지금 젊은 세대들은 통일을 원하지 않아. 지금 중요한 건 남북이 평화롭게 교류하고 경제적으로 도우며 사는 거야. 평화를 모든 담론의 중심에 놔야 해.” 

 

- 방북한지 28년이 됐는데 지금와서 방북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나는 망명중에도, 출옥 직후에도 정부 요청으로 북한과의 물밑접촉 역할을 계속 해왔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고 난 양쪽을 붙이려는 사람이니 죽을 때까지 그런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어. 남북이 전쟁없이 화해상생할 길을 모색하는 게 작가인 내가 할 일이지.”

 

■광주이후 “살아있는 것 자체가 미안해 무슨일이든 해야 했다”


황석영은 1985년 5월 출간된 광주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너머 너머>)의 ‘공식’ 저자였다. 1982년 제작된 지하 유인물 <광주백서>를 토대로 광주의 활동가들이 추가 취재를 통해 마무리한 원고를 손질하는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건 당시 상황에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 5.18 직전 광주를 비운 탓에 부채의식이 있던 황석영은 ‘총대’를 메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너머 너머>는 출간 직후 2만부가 통째로 압수당했지만 대학가를 중심으로 풀리면서 광주항쟁의 ‘바이블’이 됐다. 

 

- 신문이 역할을 못하고 있을 때 언론역할을 대신한 셈이다. 기성언론은 88년에 들어서야 광주를 제대로 다루기 시작했다.


80년대 기자들이 많이 해직됐는데 그들이 썼다가 신문에 싣지 못한 광주기사들이 돌아다녔지. 지하로 돌아다니니 볼 사람만 본 거지만. <너머 너머>는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료조사를 함께 했던 거다. 명지대 근처 풀빛출판사 부근 여관방을 잡아놓고 한달반 동안 숙식하면서 작업했다.”

 

- 감옥갈 각오하고 저자로 이름을 올렸을 텐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셨나. 


“광주에서 살았었고, 알던 사람들이 죽어갔으니 살아있는거 자체가 미안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누군가 ‘광주 사람들이 서로 돕고 밥해주고 그런 장면만 나오냐. 나쁜 놈들도 있을텐데 너무 낭만적’이라고 했던데 뭘 몰라서 그래. 함께 겪던 사람들이 죽어가니 사람들이 다 뭉치면서 도적적으로 순결한 지역공동체가 만들어졌던 거야. 서비스 노동하는 청소년들, 일용직 노동자들이 수류탄 차고 총메고 다녔지만 은행 한군데 안 털렸잖아.”


- 그래도 겁은 났을 거 같은데.


“아니. 난 겁 같은 건 없어. 작가는 아무리 망가져도 작가니까. 그게 좋은 점이야. 북에 다녀온 뒤 안기부가 조사하면서 ‘황작가 당신 또 쓸텐데. 이런거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게백반 아뇨?’ 그러더라. (웃음) 다른 나라였다면 이런 고생 자청할 필요는 없는데 여기가 이 모양이니 짊어지게 된 거지.”

 

황석영은 출간 직후 당국에 연행됐다가 국내에 머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저명작가를 구속, 재판하는 과정에서 광주의 진상이 널리 알려질 것을 당국이 우려했던 것이다. <너머 너머>는 지난 5월 초판 2배 분량의 전면개정판으로 지난 5월 재출간됐다. 계엄군의 군사작전 내용과 5·18 재판 결과를 반영해 역사적·법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최근 부각된 헬기 기총소사에 관한 여러 증언들도 담겨 있다.  


- 전두환은 여전히 ‘폭동외에 표현할 길이 없다’고 한다. 


“신군부가 1979년에 일으킨 12.12가 사법부에 의해 군사반란으로 단죄가 됐으니 광주 진압군은 반란군이고, 광주시민들은 저항권을 행사한 것이다.” ‘12·12, 5·18 재판’에서 대법원은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이고 신군부가 ‘공수부대를 동원해 난폭한 방법으로 분쇄한 것’은 ‘국헌문란’이라고 판단했다. 


- 광주의 현재적 의미를 간추린다면?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본은 6월 항쟁의 결과다. ‘87체제’라고 하는 타협의 한계 속에 출발했지만 촛불을 거치며 정치사회적으로 선진화할 기회를 쟁취한 거지. 그런데 그 출발점이 광주항쟁이었던 거다.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은 같은 파도안에 있는 거야. 전야가 부마항쟁이고 광주항쟁이 절정을 이뤘다면 종지부가 6월 항쟁이다. 그 미완의 87년 체제가 촛불로 매듭지어지려 하는 거다.”


- 5.18에 대해서는 사법적 단죄가 이뤄졌는데도 아직도 ‘북한군 침투설’ 같은게 나온다.  

“인천서 광주로 시집온 어느 여성이 항쟁당시 북파공작원인 친구 오빠를 광주시내에서 봤다더라. ‘오빠, 왜 여기 왔어’하니 ‘일하러 왔지’라면서 바로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항쟁기간이던 5월25일 서울역 앞에서 간첩을 체포했다고 발표하고, 전남도청 안에서 독침사건도 조작해 ‘북한군 침투설’을 만들려 했던 거지. 한국은 현대적인 옷을 입은 듯 보여도 벗겨놓으면 딱 ‘안보국가’인거야.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거나 하면 안보를 들고 나와 ‘탁’ 엎어지면 또 그게 먹혀. 전쟁나면 이 터전이 또 사라지지 않겠냐는 두려움, 탈 없이 먹고 살자는 심리가 모든 정치적 비판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니 아직도 광주참극 같은 반인륜적 행위조차 ‘북한군이 와서 했다’는 둥 해서 덮고 가려는 전근대적인 후진성이 우리 사회에 공존하고 있는 거지.”


- 돌이켜 보면 통합진보당 해산사태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도부들 술자리 이야기 정도를 갖고 정당을 해산하는 거는 안보국가에서나 할 수 있는 거다. 안보국가론을 떠받치는 국가보안법, 이게 온갖 허무맹랑한 가설을 현실화하는 기초다. 유엔이 이미 50년전에, 심지어 미국 국무부도 ‘정치발전을 저해한다’며 70~80년대 개폐를 권유했지만 개폐 논의하면 빨갱이로 몰리고, 표떨어질까봐 정치인들이 손을 안대려는 거지. 그간 지식인들이 북한비판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건 북한을 비판하더라도 조금만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면 국가보안법에 걸리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어. 균형있게 이야기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입을 닫자는 식이지.”


- 진보정치세력들이 잘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도 있다.  


“민주노동당 분란을 보면 80년대 학생운동권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 지혜롭게 민중을 설득하면서 살얼음판을 딛고 나갔어야 했는데. 분단이래 혁신정당들 다 (정권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잖아. 80년대 학생운동이 급진화됐을 때 ‘혁명한 뒤에 혁명기지인 북한과 협상해 베트남식으로 가자’는 논의도 있었는데 그 이전부터 북한은 혁명기지가 아니라고 언명했거든.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은 적대적 공존상태가 됐어. 남한은 유신을 통해 종신 통치체제로 갔고, 북도 수령유일체제로 진입했지. 나는 70년대 이후 북한은 사회주의 이상이 사라진 군사독재 체제로 본다. 북한에 대해 이런 비판은 해야 해.”

 

- 그걸 진보세력들이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다. 


“못했지. 어떻게든 북과 대화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이후에 탈북자를 진보세력이 적대시한 것도 잘못이지. 북한인권도 비판할 건 했어야지. 국제사회의 봉쇄로 이뤄진 ‘농성체제’라고 해도 그것만으론 변명이 안돼. 우리도 이렇게 불리한 상태에서 피흘리며 민주주의를 이뤘잖아. 진보세력이 그런 비판을 하면서 국가보안법 개폐노력을 함께 전개했다면 명분이 생겼을 거다.”

 

■“기성세대들, 젊은 세대에 어떤 사회 넘겨줄지 고민해야” 


- 어디선가 ‘말은 과격하고 주장은 급진적이지만 늘 말로 소비해버린다’고 하셨다. ‘단절’이 제대로 안되니 진영간에 혐오만 확대재생산되고, 이런 틈에 전두환 같은 이들도 한마디씩 하는 거 아닐까. 


“87년 체제가 기득권 세력에 엄청난 공간을 내준 채 한줌만 들어가서 조금 바꾸다 말았지. 사회변혁은 한치도 진전되지 못했고 비정규직·청년실업 문제가 더 심화됐어. ‘같이 살자’는 공화주의 이념을 어떻게 실현할지가 중요한데 그런걸 못한 채 말만 관념적으로 과격하고 날아다니고 있는 거야. 더구나 ‘나쁜 정치주의’라는 블랙홀이 있어서 선거만 치르면 예전 잘못이 다 없어져 버려. 그러고는 유권자에게 모든 잘못을 돌려버리는거지. 그러니 과거 잔재나 악폐가 같이 가는거야. 피곤하고 진전은 느리고.”

 

황석영은 그래도 촛불에서 희망을 봤다고 했다. “시민들이 지혜로워지고 정치적 민도도 높아진 걸 느껴. 유럽사람들이 ‘어떻게 총 한방 안쏘고 그런 변혁을 이뤄내냐’고 놀라워 하길래 ‘우리가 그런 정도의 사회까지는 이미 올라와 있었다’고 대꾸해줬어. 촛불이전과 이후의 시민들은 전혀 다르고, 뒤로 안돌아갈 거다. 파시스트들이 부활을 꿈꾸는지 몰라도 어림없는 생각이지.”

 

- 촛불이후의 한국사회는 어떤 과제가 있을까. 


“세월호 최순실이 터졌을 때 ‘이게 나라냐’고 이구동성으로 탄식했잖아. 공공성을 책임져야 할 세력에 대한 실망이었던 거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한몸이라는 거다. 근대화 초기 정부가 국산품 사용하라고 강요하고, 국민학생들 저금한 돈으로 저리 대출해주고, 외환 쏟아줬으니 출발 때부터 재벌은 사회적 책임이 있다. 그래서 함께 누리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적반하장으로 골목상권까지 독점하려 들고 막대한 부를 쌓아두고 있잖아. 그걸 돌려야 함께 살 수 있어. ‘민주적으로 자유롭게 더불어’ 살아야 하고, 그 역량으로 선진적 민주주의를 이루면 북한도 변화시킬 수 있어. 그게 우리들의 꿈이고 소망이다.”

 

- 황 선생의 작품중 신천학살을 소재로 한 <손님>은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이라는, 밖에서 유입된 모더니티가 충돌하면서 끔찍한 사태로 치닫는 내용이다. 한국사회 내에서도 그런 충돌이 보인다. 


“그렇게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고 기득권 세력이 좌우대립을 키워온 거다. 80년대 들어 한국 자본주의가 재생산 구조를 갖추고 ‘3저호황’을 거치며 처음으로 사회과학적 의미에서 중산층이 생겨나는데 내 소설 <해질무렵>은 천민자본주의에서 형성된 중산층의 자기회한을 그린 거였어. 개발독재 하에서 국물 조금 떨어뜨린 걸 먹으면서 살만큼 됐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거든. 자기 회한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이 무렵 신문들이 보수화되면서 ‘너희들 이데올로그가 돼줄께’하고 나선다. 그쪽이 구매력이 있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게다가 대통령 직선제가 이뤄지고 주의주장을 다투며 선거가 되풀이되면서 진보·보수가 극명하게 나뉘게 된 거다. 그렇게 되니 민주화운동을 하면 좌파 빨갱이가 되는 거지. 진보·보수가 사회를 가르고 있다지만 사실 진보는 먼지만큼 있잖아. 국회의원 6명 있는 정의당 정도?” 

 

황석영은 어디에 속할까? “나더러 좌파라고 하지만 ‘진보적 자유주의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난 조직을 싫어하거든.(웃음)”

 

- 한국사회에서 중도가 튼튼해질 여지가 없을까. 


“상식적으로 살지만 너무 급진적인 생각은 어쩐지 싫고, 그러나 선량하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합리적 보수일텐데 촛불의 절반이상이 그런 사람들일거다. 외연을 넓히면서 아량을 가지고 이념적 편협함을 줄여나가야 해. 그래야 파시스트를 최소화할 테니. 그런데 중도를 부르짖으면서 ‘싸우겠다’고 외치는 어떤 이를 보면 자기 정치적 포지션을 모르는 거 같다. 정치공학만으로 판단하는 거지.”

 

- <해질무렵>의 ‘작가의 말’에 ‘지난 세대의 과거가 업보가 돼 젊은 세대의 현재를 이루었다’는 말이 나온다. 


“천민자본주의를 돌아보고 반성하자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살만큼 됐지만, 그래서 너희 자식과 젊은 세대들에게는 어떤 사회를 넘겨줄 건데?’ 이런 물음에 봉착한 거지. 기성세대 지식인들에게 하고픈 이야기인데, (용케)가난에서 빠져나왔고, (적당히)운동권에도 있었고. 그런데 그 결과가 뭐야. 세상도 바꾸지 못하고 혼자 간신히 빠져나온 다음 뒤돌아 보며 (젊은 세대를) 걱정하고 있는 거잖아. 노동운동도 했다는 이들이 뱃지달고 각계 지도층이 돼 있는데,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 책임을 져야지.”

 

■한반도의 민초들 여전히 서사에 목말라 해 


- <수인>을 보면 현대사의 주요 현장에 늘 계셨던 걸 확인하게 된다. 그런 이력을 생각하면 아직 서사문학을 더 하실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객지>나 <장길산>을 쓰던 그런 리얼리즘을 좀더 심화시켜 써야 한다는 거지? 나를 두고 요즘 환상적 리얼리즘, 서정적 리얼리즘 혹은 샤먼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던데 어쨌건 내 소설은 리얼리즘이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세계가 변하니, 소설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당시엔 한반도를 벗어나 있었고, 세계시민이 되겠다고 생각했어. 세계시민이 되겠다는 건 우리가 겪은 현실을 세계인들과 공유하겠다는 거고, 세계의 현실을 자기화하겠다는 것도 돼. 우리 형식과 서사방식으로 세계 현실을 담는 ‘리얼리즘의 확장론’이지. 굿, 민담, 판소리, 인형극, 가면극 같은 전통 형식과 서사가 있잖아. 여기에 현실을 담아낼 생각이다. 마지막 작품은 철도원 3대를 그린 소설이 될 거야. 지금의 노동자가 시간여행을 통해 철도원 3대를 만나는.” 


‘철도원 3대’에 관한 구상은 황석영이 방북했을 때 평양백화점 부지배인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원래 영등포 철도공작창 동네에 살던 그의 아버지는 일제 때 경성과 (당시 만주국 수도인) 신경(新京·현재 장춘)을 오가던 철도기관사였고, 그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관사가 됐다가 월북했다. ‘철도와 기차는 근대의 상징이며, 섬처럼 고립된 분단이후 우리는 대륙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저에 착안해 소설을 구상했다.’(수인 1권 317p)

 

- 언제쯤 나올까.  


“내 나이가 75세인데 80세까지는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취재를 위해) 화물열차 앞칸에 타고 다녀볼려고 해. 장춘에도 가서 한달쯤 있으면서 분위기를 익힐 생각도 하고.”

 

- 일제 강점기이긴 해도 당시 만주는 코스모폴리탄적인 느낌이 있다. 


“만주는 아시아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소지. 만주, 중국, 일본, 한국, 러시아인이 뒤섞여 살았다. 일본이 ‘오족협화(五族協和)론’을 내세운 건 침략명분이긴 하지만 내용 자체는 근사한 거거든. 내가 알타이연합을 꿈꾼 건 그런 뜻도 있어. 그 만주의 기억과 아시아의 노동계급을 그려보려 해. 한국문학에서 근대 산업사회의 노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게 거의 없지. (일제 강점기에)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가 단편적으로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다루긴 했지만 본격 노동계급의 초상은 보이지 않아.” 

 

- 왜 그랬을까.  


“분단이나 여러 이유가 있겠지. 노동을 이념화된 것으로 보기도 했고. 김진숙(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1년 가까이 벌인 투쟁을 감명깊게 지켜보면서 안타까워 했는데 우리 노동자가 처한 현실이 그 행위 안에 다 들어있어.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동아시아 혹은 세계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그거지.”

 

- 굴곡 많았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았던 이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들이 겪었던 삶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20년쯤 전만 해도 각지를 다니다 목포 유달산 비탈길에 찌그러져가는 술집에 가보면 주모 혼자 화투짝을 들고 있다가 술상 차려놓고 앉는데 자기도 소주 한잔을 받는데 작가라고 하면 깜짝 놀라 ‘내 이야기가 소설 10권은 나올 거’라며 써달라고 해. 통영 같은 곳에서 술을 먹다 늙은 선장을 만나면 그도 그래. ‘내 이야기 좀 써주라. 엄청난 소설들이 수십권 나올거다.’ 우여곡절을 겪은 한반도의 민초들이 자기 서사에 대한 욕구가 목까지 차 있는 거야.”

 

- 소설가들이 좀더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거 같다.  


“올 상반기에 조선희가 쓴 <세여자>를 참 감명깊게 읽었다. 주세죽, 고명숙, 허정숙 이 셋의 남편들이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창시자거든. 그 전에도 안재성이 박헌영·이현상 평전, <경성트로이카>를 썼는데 그런 게 많이 나왔으며 좋겠어. <세여자>도 문학적 평가를 떠나 실록 자체가 감명깊은 줄거리였다. 이런 작업들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해.”

 

- 웹튠 <송곳>을 보고 소설보다 더 서사적이라고 평가했던데. 


“<송곳>과 <미생>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 ‘웹튠이 저렇게 현실에 가까이 가 있구나’ 하고 감명도 받았고. 그런 작업들을 문학이 해야 하지 않을까. 요즘 젊은 작가들이 현실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데 굉장히 좋은 현상이다. 자기 세대 이야기니까 그럴 의무가 있고, 그래야 읽히고 기억되지.”

 

- 한국인들이 ‘착한백성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어디선가 이야기했다. 


“어느 대담에선데 영화 <국제시장>이 떠들썩 하길래 ‘한 시대를 열심히, 내 식구 데리고 먹고 살았고, 그래서 이만큼 살게 됐다’는 이야기가 무슨 자랑거리냐 싶더라고. 시대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없고,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을 기억하고, 너희도 그렇게 살아라’는 거고, 그래서 ‘착한백성 신화’라고 비판한 거지. 신민이 아니라 시민으로, 비판적 안목으로 시대를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거야.”

 

- <해질무렵>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녹아 있는 것 같다. 


“청년들이 개별화돼 있어 문제라지만 별로 걱정 안해. SNS같은데서 설왕설래하는 걸 보면 간단치 않거든. 청년들에게 연대의식이 있고 촛불에서도 그걸 봤어. 그래서 젊은이들이 정치·사회 세력화하려는 노력들을 도와주고 싶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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