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오늘

[어제의 오늘]제2차 국공합작 성사

서의동 2009. 9. 21. 18:22
ㆍ일제 침공 맞선 불안한 좌우연합

시안사변(西安事變)은 1936년 12월12일 동북군 사령관인 장쉐량(張學良)이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산시성 시
안을 찾은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를 화칭츠(華淸池)에 가둬둔 채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에 나설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동북 5개성을 통치하던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이 1인자 장제스를 무력 감금한 이 사건은 세계를 경악시켰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사되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국민당은 27년 제1차 국공합작 결렬 이후 공산당의 소비에트 지역을 공격했고, 궤멸위기에 빠진 공산당의 홍군은 근거지를 서남부에서 중국 북서부 옌안(延安)으로 옮기는 대장정에 나서야 했다. 한편 일본군이 동북 3성을 침략하자 중국에는 항일여론이 들끓었고, 공산당은 국민당에 내전 중지와 항일을 위한 제휴를 제안했다.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지만 장쉐량이 이에 동의해 시안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어 일본군이 37년 7월7일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을 일으키며 중국 내륙 침략을 본격화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37년 9월22일을 기해 제2차 국공합작에 들어갔다.

국민당은 공산당을 합법화시켰고, 38년에는 국민참정회에 공산당을 비롯한 제 당파와 각계인사들을 참여시켰다.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八路軍)과 국민혁명군 신편제4군(新四軍)으로 재편성됐다. 국공합작 기간 중에도 양측간 반목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 이후 합작이 결렬되며 제2차 국공내전으로 이어졌다.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시안사변과 장쉐량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8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지만, 문서는 한 장도 없고 모든 합의는 구두로만 이뤄졌다.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은 무력으로 사건 해결에 나서려던 국민당 정부 대신 시안으로 날아가 장쉐량, 공산당 특사로 급파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담판을 벌였다. 장쉐량은 2주일 만인 36년 12월25일 장제스를 풀어준 뒤 함께 난징(南京)으로 날아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장쉐량은 49년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옮겨진 뒤 90년 6월1일 생일 때까지 53년간 연금생활을 해야 했다. 수십년의 연금기간 중 그에게 힘이 돼 준 것은 젊은 시절부터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쑹메이링이었다. 장쉐량은 연금이 풀린 다음해인 91년 대만을 떠났고, 2001년 하와이에서 101세로 일생을 마쳤다. 구국의 일념으로 권력과 부귀를 포기하고 고난의 반세기를 견뎌야 했던 장쉐량의 생애는 대만과 본토 중국인들 모두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