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 김정은 위원장이 걸어온 1년

서의동 2018. 12. 5. 16:53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 앞길에는 탄탄대로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 못했던 도전과 난관, 시련도 막아나설 수 있습니다.”

9·19 평양공동선언을 채택한 직후 기자회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표출한 우려는 곧 현실이 됐다.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미관계는 장기 교착상태에 빠졌다. 북한이 여러 차례 비핵화 의지를 피력해왔지만 미국은 대북 압박의 고삐를 놓지 않고 있다.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미국은 지난 25년간의 낡은 대북 접근법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표정만 부드러워졌을 뿐이다. 

 

요즘 김정은 위원장의 머릿속은 ‘미국이 정말로 북한과 관계개선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으로 차 있을 것이다. 최근 북·미대화에 응하지 않는 것은 이런 회의감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과 국제사회의 많은 이들은 ‘한반도 대전환’이 일장춘몽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지난 1년간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이 기울여온 노력이 무색하게 된 형국이다. 

 

지난해 11월29일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호를 발사하고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이후 김정은 위원장은 대외관계 개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난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 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을 보내 문재인 대통령의 대화 의지를 확인한 뒤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남북관계를 진전시켰다. 

 

김정은 위원장은 선대 지도자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 나오는 ‘두 갈래 길 중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이 아니라 수풀을 헤치며 새로 길을 내면서 전진했다는 표현이 어울려 보인다. 우선 9월 정상회담에서 ‘남북 간 불가침선언’이나 다름없는 군사분야 합의서를 채택했다.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실천방안을 육·해·공의 군사적 특성에 맞게 촘촘하게 합의한 것은 분단 이후 처음이다. 

 

북한은 합의서를 즉시 실행에 옮겼다. 시범철수키로 한 비무장지대 전방초소(GP) 11곳을 남측보다 먼저 폭파해 완료했다. 남북 공동유해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비무장지대 철원지역에 남북이 오갈 수 있는 길을 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비무장화를 이행하고, 한강 하구 공동이용을 위한 수로조사를 개시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으로 본다면 자신들보다 10배 가까이 많은 군비를 지출하는 한국군, 세계 최강의 미군이 버티고 있는 접경지역을 무장해제하는 것이 결코 간단한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을 폐기하고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을 채택한 것도 선대 지도자라면 기대하기 힘든 결정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4월 정상회담을 위해 판문점의 분계선을 넘었고, 9월 정상회담 때는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15만 평양시민을 향한 문 대통령의 연설을 지켜보는 그의 표정은 묘했다. 최고존엄인 그만이 차지해온 스포트라이트를 얼마 전까지 적국이나 다름없는 남한의 대통령에게 내주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북한의 변화를 믿지 못하겠다는 이들에게 진심을 알릴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감내할 수 있다고, TV화면에 비친 그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진심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의 보수세력들은 여전히 ‘위장평화쇼’로 여긴다. 시중엔 ‘임종석 비서실장이 북한에 비트코인 수십억원을 보냈다더라’ ‘쌀을 북한에 보내느라 쌀값이 폭등했다더라’는 가짜뉴스가 판친다. 자유한국당은 총기사고, 산불이 났는데 군사합의 때문에 헬기 출동이 지연됐다는 사실왜곡을 보수언론을 통해 퍼뜨리고 있다. 남북관계가 최악이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보다 오히려 적게 편성한 남북협력기금을 깎겠다고 벼르는 한국당의 행태는 ‘발목잡기’라고밖에는 달리 이해할 길이 없다. 

 

김 위원장의 올해 행보는 대담과 파격의 연속이었지만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핵을 포기해 경제를 살리려던 계획은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그의 비핵화 의지를 여전히 의심하는 것도 현실이다. 답답한 일이겠지만 이런 불신은 북한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후퇴하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김정은 위원장은 9월 기자회견에서 도전과 난관, 시련을 이야기했지만 동시에 “그 어떤 역풍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 지금이 그 각오와 결단력을 보여줄 때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서울 답방 약속을 지켜야 한다. 연내 답방이 어렵다면 언제 오겠다는 시기를 명확히 해두면 된다. 서울행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에 대한 그의 진심을 확실하게 보여줄 기회가 될 것이다. (경향신문 2018년 11월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