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통상관료들이 욕을 먹는 이유

서의동 2010. 10. 29. 21:55
  

통상교섭본부 사람들은 이번 한미 FTA에 대해 함구하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28일 안호영 통상교섭조정관이 몇달만에 기자들과 오찬을 가졌다. 안 조정관은 통상교섭본부내의 넘버2다. 

정보에 목말라있던 터라 한마디라도 주워들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2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리 저리 찔러봐도 그 역시 "공개할 수 없다"는 내용을 이런 저런 톤으로 변주한 답변만을 내놨다. 
이날 추가로 알려진 것은 김종훈 본부장외에 최석영 FTA교섭대표와 6~7명의 직원들이 수행했다는 정도였다.
 
통상교섭본부는 하루전인 25일 회담개최 사실을 알리는 한문장짜리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장소가 샌프란시스코라고만 밝혔을 뿐 어느 곳인지도 공개하지 않았다. 
“회담 장소와 시간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미국이 구체적 정보의 공개를 원치 않습니다.” 

밥까지 같이 먹은 적 있는 통상교섭본부의 고위관료에게 "이런 식으로까지 정보를 제한하는 것은 심하지 않느냐"고 힐난조로 물었지만 그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곤혹스러워 했다.

한미 FTA의 실무협의라는 이름의 추가협상을 갖기로 한 것은 6월 토론토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자리였다. 이후 약 4개월간 실무협의 내용에 대해 통상관료들은 누구랄 것 없이 입을 다물었다. 
 
김종훈 본부장이 두차례 정례브리핑장에 나왔지만 "미국이 요구하니 한번 들여다보겠다" "협정문을 고치는 협상은 없다"는 내용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양국 사이에선 이미 깊숙한 논의가 오갔다는 정황이 감지되고 있다. 다음달 11~12일의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전까지 협상을 마무리짓겠다는 시한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쇠고기와 자동차 부문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우리 당국자들은 어느 누구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미국이 정보공개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바꿔 놓고 생각해보면 그들의 입장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모처럼 한미 FTA에 관심을 보인 상황에서 협상을 G20 정상회의 때까지 마무리 지으라는 특명까지 떨어진 마당이다. 

2007년 4월에 끝난 한미 FTA 본협상 자체도 사실은 '아낌없이 내준' 협상이었다. 협상이 타결된 직후 통상교섭본부는 협정문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자동차 3000cc이하 관세를 즉시 철폐하기로 한 것이 가장 큰 내용이었다. 투자자유화, 의약품, 지적재산권, 무역구제 부문에서 우리는 참패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관세철폐에 가려졌고, 정부는 국민들에게 수출이 크게 늘어나게 됐으니 기뻐하라고 호도했다. 

두어달 후 나온 협정문을 보면 도대체 뭐하러 협상을 했는지 의문스러운 내용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다 미국은 한술 더떠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협상의 내용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정해진 시간내에 협상을 마무리짓는 임무만이 부여됐을 뿐이다.  

통상협상은 대외협상과 대내협상이 있다. 대내협상은 바꿔 말하면 국민과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구하는 작업이다. 적절하게 국민들과 이해당사자들에게 알리면서 진행하면 협상후 뒤탈도 없고 상대방에 대한 협상력이 높아진다. "우리 국민들이 저렇게 들고 일어나니 이건 양보할 수 없다"는 말을 협상테이블에서 꺼내며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내에 협상을 마무리짓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있는 통상관료들에게 이런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번 협상은 양보만이 예정돼 있을 뿐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을 고치라는 국민의 요구는 안중에도 없다. 

통상교섭본부 관료들에게 '통상기술자'라는 오명이 붙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대외개방은 지고지선과 같은 이념이 돼버렸다. 여기에 미국은 본받아야 할 나라라는 '사대적 맹신'이 겹치면서 한미 FTA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 돼 버렸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반미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더구나 무소불위의 특권을 갖게 된 통상관료들은 모든 국내정책에 참견하기 시작했다. SSM법은 통과시켰다간 통상마찰이 우려된다는 김 본부장의 한마디에 표류하고 있다. 

한미 FTA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기회에 잘못된 통상정책 결정시스템을 반드시 손봐야 한다는 점이다. 

통상교섭본부 조직이 남아 있는 한 조직논리에 의해 새로운 협상을 벌이려고 할 것이고, 숙고되지 않은 채 속도전 방식으로 FTA를 체결하려는 정책오류들도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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