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오늘

[어제의 오늘]1998년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소떼 방북

서의동 2009. 6. 15. 13:41
ㆍ남북관계 해빙 이끈 큰걸음

1998년 오늘 오전 임진각. 화환을 목에 건 황소 옆에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 회장은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의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17살 때 강원 통천군 아산리의 고향집에서 부친의 소 판돈 70원을 몰래 들고 가출한 사연을 회고하는 83세 노신사의 주름진 얼굴에서 벅찬 감회와 설렘이 느껴졌다. 

정 회장은 이날 북한에 제공할 소 1차분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적십자사 마크를 단 흰색 트럭 수십대에 실린 소들이 오전 9시22분 판문점 북측지역을 먼저 넘었다. 정 회장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분단 이후 민간 차원의 합의를 거쳐 군사구역인 판문점을 통해 민간인이 북한에 들어간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정 회장의 소떼 방북은 향후 10여년간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20세기 마지막 냉전지역인 한반도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소떼의 모습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 ‘전위예술’의 총감독인 정 회장에게는 찬사가 쏟아졌다. 
그의 방북은 외환위기 직후 어려운 경제상황에 힘들어하던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줬고, 50년 가까이 그리운 가족과 헤어져 있던 실향민들도 설레게 했다. 정 회장은 6월23일까지 8일간 북한에 머물면서 북측과 금강산 관광 개발사업 추진 등에 합의했다. 

소떼 방북으로 ‘햇볕정책’으로 불리던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이해 11월18일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됐고, 2000년 6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어 같은 해 8월 남북은 개성공단 건립에 합의했다. 남북 민간교류는 외국인 투자를 늘리면서 외환위기 극복에도 기여했다.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등으로 한반도 긴장이 높아지던 당시 금강산을 오가던 관광선의 모습은 한반도 정세를 우려하던 외국인 투자자들을 안심시켰다.

소떼 방북 11년이 지난 현재 남북간의 긴장은 유례없이 높아져 가고 있다. 대북강경책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 금강산 관광은 중단됐고, 개성공단도 존폐위기에 몰렸다. 작고한 정 회장이 중절모에 흰색 코트를 곱게 차려입은 채 군사분계선을 넘던 장면도 우울한 빛깔로 퇴색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