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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책]아저씨 도감

서의동 2012. 7. 16. 10:08

48가지 유형으로 본 아저씨들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세대가 올해부터 은퇴를 시작한 영향인지 일본에선 어딜 가든 중노년의 아저씨들이 넘쳐난다. 도쿄 도심의 지하상점가에는 평일 오후 6시를 조금 지난 시각인데도 이미 불콰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는 아저씨들의 무리가 목격된다. 휴일에 공원에 가면 조끼차림에 카메라를 목에 걸고 벚꽃을 접사촬영하는 아저씨들, 이젤을 받쳐놓고 풍경화 그리기에 몰입하는 아저씨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일본 아저씨들의 생태를 식물도감처럼 분류해 소개한 <아저씨도감(おじさん圖鑑)>(쇼가쿠칸)이 최근 일본에서 화제를 몰고 있다. 출간한지 5일만에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의 재고가 동이 났고, 아마존이 집계한 올 상반기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올라있다. 

 

저자는 올해 31세의 여성 일러스트레이터 나카무라 루미. 그는 4년간 50~60대의 다양한 아저씨들을 직접 만나거나 관찰하며, 사진을 찍고 일러스트를 그려 48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양복차림의 보통 샐러리맨형부터 ‘허리띠를 높이 두른 아저씨’,‘불평불만이 있어 보이는 아저씨’,‘야한 아저씨’, ‘나이키 모자를 쓴 아저씨’ 등 거리에서 목격되는 다양한 아저씨 군상들을 세밀한 캐리커처와 코멘트를 붙여 소개했다. 책을 보면 절로 무릎을 치게 될 정도로 온갖 유형의 아저씨들이 망라돼 있다. 저자는 책을 쓰기 위해 노숙자들 자원봉사에도 참가했고, 아저씨들의 저녁회식과 ‘아저씨 밴드’의 연습장 등을 돌며 겉모습뿐 아니라 속내까지 들여다보려 했다. 

 

“아저씨들의 몸짓이나 말투에는 오랜 기간 시대를 걸어온 인생이 배어있다. 시시하거나 재미있거나 위선적이거나 천차만별이지만 그 안에 감춰진 훌륭함, 젊은이들은 아직 갖추지 못한 맛과 멋을 전하기 위해 도감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별로 신경쓰지 않아왔던 ‘아저씨’들을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다.”(저자의 말)

 

<아저씨 도감>이 인기를 얻게 된 데는 여러가지 배경이 있다. 우선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중노년 세대들의 활동반경이 넓어진 점을 꼽을 수 있다. 한국에 비해 정년이 늦고, 고령의 현역들이 많은 것도 아저씨들이 많이 보이는 이유다. 아저씨 세대들은 장기불황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젊은 층에 비해 여유가 있고 소비여력도 왕성하다. 1947~49년생인 단카이세대들이 지갑을 열면서 일본의 내수가 살아난다는 보도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일본의 고도성장기를 살아온 ‘아저씨’들은 패기없고 소심한 일본의 젊은 ‘초식남’들과 분위기가 다르다. 일부이긴 하지만 전철에서 예쁜 여성이 있으면 거침없이 쳐다보고, 꽃이 아직 피지 않은 벚나무 아래에서도 “술맛만 좋다”며 태연하게 꽃놀이를 즐긴다. 이런 대범함이 폐색감에 사로잡힌 일본 사회에서 미덕으로 재평가되는 듯하다. 


최근 아저씨들과 20~30세 이상 차이 나는 젊은 여성들과 결혼하는 ‘격차혼’이 늘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지난해 동일본대지진 이후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결혼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고 있는 데다 아저씨들은 경제적으로나 경륜면에서 동년배 미혼남성에 비해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는 ‘잘 나가는’ 아저씨들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슬픈 눈을 하고 등을 동그랗게 구부린 채 어디론가 향하는 처연한 모습들이 오히려 더 많다.  

 

어느 나라나 엇비슷하겠지만 일본도 꽤 심각한 세대간 격차와 갈등이 존재한다. 기성세대들은 젊은층이 심약하다고 혀를 차지만, 거꾸로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모든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원망한다. 이런 점에서 젊은 저자가 시종 따뜻한 시선으로 아저씨들을 관찰한 이 책은 세대간 화해의 의미도 담고 있다. 일본의 여고생들이 서점에서 이 책을 들고 킥킥거리는 모습에 사람들이 미소짓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