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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개혁적 진보의 메아리(경제학자 김기원 유고집)

서의동 2016. 12. 26. 13:45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의 유고집이다. 블로그 등을 통해 틈틈이 쓴 글을 지인들과 후학들이 책으로 냈다. 실제 책을 읽어보면 단순 블로그글이라고 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김교수의 혜안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우리 사회의 진보진영에 나타나는 타성적 사고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거대기업과 공공부문의 ‘노동귀족’의 문제를 방치할 게 아니라 적극적인 해법을 모색하려는 그의 치열함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책 내용에서 참고할 만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산별노조 왜 안되나)한국에서도 산업별 노조를 만들려고 오랫동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헛수고입니다. 이미 거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격차가 굳어진 상황에서 임금수준을 비슷하게 만드는 산업별노조를 거대기업 노동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요. 이는 노동자들이 석가, 공자같은 성인이 아닌 한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임금(복지)을 높여서 실질적인 생활격차를 줄이면 됩니다. 그러면 중소기업 노동자의 근속연수가 늘고 숙련도가 향상돼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거대기업과의 교섭력이 커지고 아예 세계시장을 사대로 사업을 벌일 수도 있지요. (40p)

2012년 일본에서 출간된 <북유럽모델>에서는 스웨덴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스웨덴에서 고부담(고세율)이 가능했던 이유로 다음의 세가지를 제시합니다. 1)조세와 사회보장 시스템이 지방분권형으로 돼 있기 때문에 수익과 부담의 관계가 알기 쉽게 돼 있다. 2)복지는 고령층에 편중되지 않고 현역세대에도 혜택을 주는 구조로 돼 있다. 아동수당, 육아휴업급부, 실업수당 등 3)정치와 정부에 대한 신뢰감이 높다. (48p)

(사회적 신뢰)사회적 신뢰가 높으면 거래비용이 적게 듭니다. 거래비용이란 시장거래에 소요되는 비용, 즉 재화와 서비스의 직접적 가격이외의 비용을 의미합니다. 신뢰정도는 거래비용만이 아니라 복지사회의 작동가능성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에 정부의 복지급여에만 기생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면 정부는 그 재정적 부담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52p)

(타락한 직업윤리)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신자유주의 타령’이 유행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를 논할 수 없던 1970년에도 비슷한 남영호 참사가 일어났으므로 신자유주의는 이런 참사의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아울러 한국보다 신자유주의가 더 극성을 부리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은 걸 보면 신자유주의는 참사의 충분조건도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 타령’ 대신에 오히려 타락한 직업윤리 문제를 따져보는게 더 의미있을 것입니다. (55p)

(경제독재 해법)우리사회의 경제독재에는 크게 노동측면과 자본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다. 노동의 측면에서는 거대기업(공공부문 포함) 정규직이 집단적 지배력으로 중소기업 노동자 및 비정규직에 비해 부당하게 우월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걸 말한다. 자본의 측면에서는 재벌체제 문제가 그 핵심이다. 재벌체제는 재벌 외부적으로는 재벌그룹이 중소기업을 포함해 나라(경제)를 갑의 지위에서 멋대로 주무르고, 재벌 내부적으로는 총수의 왕조적·세습적 독재체제를 지속하는 ‘이중적 독재체제’다. 재벌의 외부적 독재체제를 바로잡으려면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공정거래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대리점이나 하청업체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단체협상력을 제고하든가, 부당거래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강화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중소기업의 경쟁력과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사회적 복지강화도 포함된다. 사회적 복지가 강화돼야 중소기업 노동자의 근속연수가 늘어나 숙련도가 향상된다. 또 사회적 복지는 중소기업이 부당거래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하기도 한다. (66p)

(순환출자)만약에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지분이 외국자본에 넘어갈까 걱정되면 삼성의 경우처럼 우호적 회사를 찾으면 됩니다. 또는 국민연금이나 한국 기관투자가에 그 지분을 넘기면 되는 일입니다. 물론 이건 재벌에게 귀찮은 일입니다. 국민연금이 지분을 갖고 있으면 장차 총수의 황제경영에 제동을 걸 수도 있으니까요. 민주주의가 독재자에게 귀찮고 또 제동을 거는 세력을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82p)

(한국노동귀족의 등장)바로 1987년 민주화시기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민주화를 계기로 독재적 정치권력 대신에 등장한 새로운 권력인 재벌·관료·검찰·언론의 문제를 여러 자리에서 언급했는데, 사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도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힘을 갖게 됩니다. 대기업 정규직은 중소기업 노동자및 비정규직과의 격차를 점점 확대해가는 노동귀족으로 변모해갑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노동시장의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는 수구세력으로 돼 가고 있습니다. (103p)중소기업에서도 경영상황에 따라 해고가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로 인한 대립은 별로 치열하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힘이 미약하기도 하지만 노동자가 다른 회사로 취직하면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잃을게 크지 않지요. 이에 반해 대기업 노동자는 해고당하면 특권을 상실합니다. 다른 대기업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따기이고 중소기업에 취직하니 예전과 처지가 크게 달라지지요. 그래서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경영상 고용조정이 불가피할 때도 막무가내입니다. 우리의 진보파는 이런 고용조정에 대해 신자유주의 운운하면서 비판합니다. 하지만 경영상황이 악화됐는데도 고용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건 사회주의 기업처럼 이윤이나 손실따위를 무시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104p)

(유연안전성 모델)복지를 확대해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처지를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복지를 확대해 이런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을 올려줘서 대기업 정규직과의 격차를 줄이는게 해결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 가계의 지출 중 교육비·의료비·주거비 지출을 줄여주고 노후 안정을 도모하는게 복지의 확대입니다. 재벌기업과 부자들 뿐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에게도 세금을 더 많이 거두고 이를 통해 사회복지를 혹대하면 노동자 사이의 실질격차가 줄어듭니다. 이리되면 경영상황에 따른 고용조정에 대기업 노동자들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일도 줄어들 겁니다. 이게 바로 노동유연성의 증진이고 이는 자본측에도 좋은 일입니다. (중략) 정규직의 유연성이 증가하면 비정규직을 사용할 필요성이 줄어듭니다. 따라서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분도 희미해지지요. 요컨대 복지확대→노동자 사이의 실질격차 축소→노동유연성 향상→비정규직 사용축소라는 선순환이 가능해집니다. 유연안정성 모델의 구체적인 실현방안은 우리 사정에 맞춰야 하겠지만, 시장의 효율성과 삶의 안정성을 결합하려는 그 정신은 배울 바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는 바로 우리 정규직 문제해결에도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106p)

(거대기업 노조의 노동귀족화 문제)해법은 두가지 방향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는 재벌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복지확충입니다. 부당한 갑을관계 해소를 포함한 재벌개혁을 통해 중소기업들의 수익이 향상되면 자연히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거대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부당한 격차도 줄어듭니다. 이게 경제민주화이지요. 사회적 복지를 확충하면 역시 거대기업 노동자들과 여타 노동자들 사이의 실질적인 생활격차가 줄어듭니다. 예컨대 거대기업에서는 작원 자녀의 대학등록금을 회사에서 내줍니다. 그런데 만약 사회 전체적으로 대학등록금이 내려가면 여타 노동자들도 혜택을 보겠지요. 그리하여 자연히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회적 임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지확충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합니다. 재벌총수 뿐 아니라 거대기업 정규직으로부터도 세금을 더 거두면 이것도 노동자 사이의 격차축소에 기여합니다. (115p)

사회적 복지확충은 또한 ‘좀비’중소기업을 정리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는 사회보장이 취약해서 정부가 중소기업을 제대로 구조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복지가 확충되면 중소기업의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고 이것이 바로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켜 줄 것입니다. (116p)

(초과노동 규제)초과노동시간에 대한 규제도 격차해소에 기여합니다. 예전에 토요일·일요일의 특근은 주당 12시간이라는 잔업시간 제한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현대·기아차에서는 평일에 잔업을 2시간씩 하고 추가로 토·일요일에 특근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 시간을 잔업에 포함시키면 자연히 현대차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노동자들사이의 격차도 줄어들게 됩니다. 정규직의 줄어든 노동시간을 채우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을 고용한다면 일자리 늘리기에도 도움이 됩니다.(117p)

(노동·자본 양측반발에 대한 해법)노동계의 반발에 대해선 점진적으로 특근을 줄여나가는 방식을 취하면서 반발에 대처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재계의 반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대안을 내놓으면 어떨까요? 예컨대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르바이트를 동원해서 공장을 돌리면 노동자 고용을 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르바이트에 대해서는 350%의 특근수당을 줄 필요가 없으니 금전 부담이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 아르바이트는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선 훨씬 대우가 좋을 것이니 대학생이나 대리기사 등 지원자는 많이 몰려들 것입니다. 혹시 그런 미숙련자로 공장을 돌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자동차 공장들이 노동자들의 여름휴가 때 이런 아르바이트를 동원해 공장을 돌리는 걸 보면 우리라고 못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11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