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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세계사>전쟁이라는 거푸집을 통해 들여다본 인류사

서의동 2017. 3. 1. 21:25

 윌리엄 맥닐의 <전쟁의 세계사>(이산). 고대와 중세 시대의 전쟁방식, 무기의 발달과정 등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일단 책을 잡았지만 단순한 전쟁방식이나 무기에 관한 저서가 아니었다. 무기와 전쟁이 어떻게 역사를 움직여왔나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무기와 전쟁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책이 고찰하는 범위는 제철업, 해운업, 선박금융 등 사실상 산업전반에 걸쳐있다.  

저자는 이 책의 주제를 '전쟁의 상업화'와 '전쟁의 산업화'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전쟁의 상업·산업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서기 1000년으로 잡되 최근 1~2세기 동안 걷잡을 수 없이 속도가 붙었다고 본다. 


먼저 중국. 저자는 중국이 제철및 해운에서 유럽의 기술적 성과를 먼저 달성했지만 이 성취가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중국은 '시장'대신 '명령'에 의해 작동하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정부의 명령구조는 맹아단계의 시장경제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때로는 위태로운 적도 있었지만 결코 근본적인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제철업자나 조선업자도 다른 모든 사회구성원과 마찬가지로 끝내 한번도 자율성을 갖지 못했다(75p) 이런 이유로 11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의 상업과 공업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자기촉매적인 성격 같은 것은 중국에서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76p)


정허(鄭和)제독이 원정(1405~1433년)에 나섰을 당시 함대규모는 15세기말 포르투갈에서 인도양까지 갔던 바스코 다 가마 함대의 기함규모(300톤)의 5배에 달하는 크기였고 선박조종술, 내항성도 콜롬버스나 마젤란 시대의 유럽인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았음에도 15세기 중반에 명나라 조정이 내린 해금(海禁)조치에 의해 중국의 해양기술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반면 유럽의 경우 시장지향적 행동양식과 군사지향적 행동양식이 놀라울 정도로 융합을 이뤘다. 이는 그리스도권이 통일돼 있지 않고 다양한 정치체제로 분열돼 끊임없이 불화했으며 영토권이나 재판관할권에 대한 분규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14세기부터 용병군대가 등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시장지향적 행동양식이 발달한 국가가 전쟁에서도 우위를 점하게 된다. 영국이 16세기말 해상강국으로 떠올랐던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다시 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전쟁을 경영'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정치구조를 형성시켰다. 무기와 전쟁이라는 주형(鑄型)에 정치와 경제, 사회가 담겨 형상화돼 온 것이 유럽의 역사였던 셈이다. 


"근세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에 나타난 근본적인 차이는, 아시아에서는 명령에 의한 동원이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1차집단적 패턴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으며 동시에 그 보존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결국 복종하는 자는 오랜 기간에 걸친 친밀한 접촉을 통해 잘알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잘 복종하기 마련이다. (중략) 시장을 매개로 하는 사회관계는 이와 반대로 인간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전통적이고 국지적이며 1차집단적인 성격을 해체하고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인들은 각자 시장의 유인에 반응함으로써 종종 자기도 모르게 협력하게 되었다."(157p)


저자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대 프랑스 전쟁에 대비한 정부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인해 촉진되고 발전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예컨대 증기기관의 개량을 가능케 했으며, 제철업에 대한 전시의 자극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좋은 조건속에서 철도나 철선과 같은 결정적인 기술혁신이 일찌감치 실현될 수 있도록 했다."(284p)


'전쟁의 산업화'로 불릴 수 있는 이런 추세는 1880년대 해군을 중심으로 한 군비경쟁 과정에서 '군산복합체'의 등장으로 정점을 맞이하고 결국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경제학에서 일컬어지는 '구성의 오류'인 셈이다. 


"가장 큰 역설은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경영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 모든 개별적인 측면에서는 위대하고 인상깊은 성과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시스템 전체는 제어불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399p) 이 상황은 불행히도 현대에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 


어찌보면 '전쟁으로 본 거시경제사'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무기의 발달과정에 대한 디테일한 서술에도 있다. 전차의 보급, 석궁과 축성술, 머스킷및 라이플총, 대포의 발전과정, 군대편제의 전술의 변화 등에 대해서도 꽤 상세히 기술돼 있어 '밀덕'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