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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암흑의 대륙(마크 마조워)

서의동 2017. 2. 12. 18:58

식구의 권유로 보게 된 책 <암흑의 대륙>(마크 마조워). 세계사는 개설서만 대략 훑어본 적이 있고 유럽사는 개별사안을 다룬 책을 파편적으로 읽어본 터라 20세기 유럽의 통사는 사실상 처음이다. 

너무도 방대한 내용의 이 책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하는 것은 무리임에 틀림없다. 다만 내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른 대목들은 정리해둘 필요가 있겠다. 


1.  우선 전간기(1차 세계대전 직후와 2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은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극심한 염증과 혐오감이 팽배했다는 점이다. 


 1918년이후 유럽국가들에서는 평균 1년이상 지속된 내각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평균 8개월, 이탈리아에서는 5개월, 1931년 이후 스페인에서는 4개월도 버티지 못했다.(41p) 


민주주의가 공격받는 가운데 행정부는 권위주의로 나아간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행정부는 히틀러 직전에는 거의 권위주의에 거의 다가섰다. 반민주주의 사조는 1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면서 '폭력의 복음'으로 부를 정도로 나아간다. 


프랑스의 우익 청년 드리외 라 로셸은 <청년유럽>에서 "세상의 어떤 것도 피를 흘리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나는 피의 숙청을 고대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44p) 앙리 드 몽테를랑은 부르조아의 무기력한 '추석한 눈동자'와 파시스트 '신체혁명의 수혜자'로서 잘 훈련받은 권위주의자의 활력을 대조하고 있다. 자유주의가 이기적인 개인들을 미화하는 데 반해서 전체주의는 자기희생과 복종,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을 제시했다.(45p)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의회 민주주의는 거의 파탄상태에 놓이게 된다. 재정균형과 금융우위의 경제운용 방식이 의회주의와 결합한 것도 이런 경향을 심화시켰다. 



유럽전체의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으로 정부가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 더욱 높은 생활수준을 약속하게 된 반면, 부르조아는 전쟁 이전의 안정상태로 돌아가려는 욕구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귀환 병사들을 위한 주택제공'은 금본위제로의 복귀와 모순적이었으며 그 결과 민주주의는 혼란을 겪었다.(162p)

각국 정부들이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은 줄곧 논란거리였다. 대부분은 통상적인 방법대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공공지출을 줄여 투자자들의 신뢰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직접적인 정책은 없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불황인 상황에서 정부가 재정을 확대하면 이것이 부채로 이어져 국가의 경제운용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163p)




2. 중동부 유럽 거의 전역에서 인종에 대한 편견과 배제(특히 유대인)분위기가 광범위하게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을 통틀어 민주주의든 권위주의 체제든 상관없이, 근대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엘리트들 사이에선 반유대주의가 자연스럽게 퍼져갔으며, 결국 이런 배경을 이용해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된다. 당시에는 나치 정권이 특별히 비정상적인 정권이 아니었으며 인종청소라는 정책을 최초로 시도한 정권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이런 경향을 극단까지 몰고 갔으며 그때까지 존재했던 동화정책에 조종을 울렸을 뿐이다. (93p)



3.유럽에서 전후 부역자에 대한 추방과 배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철저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냉전체제가 조성되면서 경찰 등 행정에 있던 부역자들은 이른 시기에 컴백했다. (하지만 핵심부역자들 상당수는 처형을 비롯해 엄벌에 처해졌으니 한국 상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인적청산이 이뤄졌음엔 틀림없다.)  


 1945~1946년쯤이 되면 일정한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립정부는 고위 정치인이나 작가, 배우들을 공개재판에 세우고 부역자를 대상으로 한 전면적인 수사에 착수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바라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했다.(기업가들은 대개 가벼운 처벌로 끝났다). 다층적 재판체계가 만들어졌으며 새로운 죄목들이 정해졌다. 그러나 중벌이 선고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1946년이 되면 이런 과정 전체에 대한 환상이 점차 깨졌다. 첫번째 사면이 이뤄진 이후 연이어 다양한 사면이 이뤄졌다. 1950년대 초가 되면 대부분의 사법수사가 사라졌다.(316p)


대체로 서유럽정부들은 처벌보다 연속성을 선택했다. 일부 공무원들은 징계를 받았지만 국가 권력의 보루, 특히 경찰은 대부분 수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드골이 새로 공화국보안대를 창설한 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서유럽에서 좀더 전형적인 모습은 이탈리아의 카라비니에리나 그리스의 방위대처럼 1943년과 1946년 사이에 같은 사람이 제복만 갈아입는 식이었다.(318p)


4.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수립은 온전히 '소련의 사주'가 아니었고, 그 정세에서 가장 인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거버넌스였다.


비록 동유럽국가들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돌이켜보면 진행양상은 유사했다. 연립정부가 있었고 그 안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난 뒤에 다른 정당들과 연립정부 밖에 남아있는 분열적인 집단을 주변화하고 철저하게 억압했다. 마지막은 선거였는데 득표율을 보면 연립정부가 폴란드에서는 89퍼센트, 루마니아에서는 98퍼센트, 불가리아에서는 79퍼센트를 획득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47~48년 무렵에는 민주적 정치환경에서 공산당 헤게모니를 가장 위협하는 세력이었던 농민당들과 사회민주당들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사전에 신중하게 계획된 마키아벨리식 전략이었을까?(중략)사건의 실제 과정을 보면 -적어도 1947년까지는-소련은 훨씬 망설였고 확신이 없었다. 


이밖에 역자인 김준형(한동대 교수)가 후기에서 지적하듯 '1989년 사회주의 붕괴는 자본주의가 경쟁에서 이긴 타살이 아니라 소련 자체의 모순으로 인한 타살'이었다는 점, 전간기 파시즘의 공세를 막아낸 일등공신은 자유주의가 아닌 공산주의였다는 분석도 특기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