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109

방탄백팩

지금은 회사원들도 백팩을 메고 출근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백팩은 주로 등산용이나 여행용이었다. 198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학생운동이 본격화되던 무렵 백팩 차림의 대학생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당시엔 얇은 천으로 만든 꾸러미에 목을 죄는 끈이 달린 신발주머니 같은 ‘원시적’ 백팩도 있었는데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학교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책 한두 권 넣을 정도의 용량이면 충분한 데다 기동력이 있어 편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학생, 회사원은 물론 국회의원, 고위 공직자, 대기업 총수들도 메고 다닐 정도로 백팩이 대중화됐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초등학생용 란도셀 같은 큼지막한 백팩에 자료와 책은 물론 치약·칫솔, 물티슈, 휴지 같은 비상용..

여적 2018.02.27

이상화와 고다이라의 대결과 우정

보는 이들의 마음을 이처럼 따스하게 해준 한·일전이 또 있었을까. 18일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경기에서 이상화가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小平奈緖)와 다정하게 포옹하며 격려하는 모습은 올림픽 정신을 일깨우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36초94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고다이라는 2위로 경기를 끝낸 뒤 눈물을 쏟아내던 이상화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잘했다. 여전히 너를 존경한다”고 위로했다. 둘은 어깨동무를 한 채 각자의 국기를 흔들며 트랙을 돌았고, 관중들은 박수와 환호로 격려했다. ‘승패를 떠나’라는 관용구가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상화와 고다이라는 주니어 선수 때부터 함께 겨루면서 우정을 쌓아왔다. 늘 긴장을 놓지 않고 도전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준 라이벌이자 친구였다. ..

여적 2018.02.27

핵태세 검토 보고서

미국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9년 4월 체코 프라하에서 “미국은 핵무기 없는 세계의 평화와 안보에 공헌하겠다”는 비전을 선언했다. 그해 9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핵 비확산 및 군축 정상회의’를 개최해 핵무기 폐기를 촉구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노벨위원회는 ‘핵무기 없는 세상’의 비전을 높이 평가해 오바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다. 오바마는 재임 기간 핵안보정상회의를 4차례 개최했고, 2015년 7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및 독일과 협력해 이란의 핵동결을 담은 ‘포괄적 공동행동 계획’ 타결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2016년 5월에는 원자폭탄 사용국 수반으로서 피폭지인 일본 히로시마를 71년 만에 방문해 원폭 희생자들을 추도했다. 물론 야당과 군부 등의 반대로 핵..

여적 2018.02.27

독일차의 인체실험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나치)은 집권 반년 뒤인 1933년 7월 ‘유전적 결함을 지닌 자손의 예방을 위한 법률’을 시행했다. 이 법으로 37만5000여명이 강제로 단종수술을 받았다. 1935년 9월에는 유전성 질환, 정신착란, 결핵, 성병환자의 결혼을 금지하는 ‘뉘른베르크 법’이 시행됐다. 이도 모자라 1939년부터는 ‘안락사’라는 이름의 장애인 집단학살이 시작됐다. 안락사 대상 장애인들은 회색버스와 밴에 실려 브란덴부르크 등에 위치한 안락사 센터로 이송됐다. 1941년 8월까지 최소 7만여명이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에서 일산화탄소를 마시고 죽어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대량학살에 동원된 가스실의 원조다. 1940년 5월 유럽대륙의 중앙부인 폴란드 오비시엥침에 아우슈비츠 비르케나..

여적 2018.02.27

카불과 강대국

유라시아 대륙의 정중앙에 자리 잡은 아프가니스탄은 19세기 이후 ‘제국의 무덤’으로 불려왔다. 영국과 소련이 아프간을 섣불리 침공했다가 실패하면서 몰락했고, 미국도 그 전철을 밟고 있다. 영국은 1839년부터 1919년까지 3차례 전쟁을 치렀지만 1차 전쟁(1839~1842)에서 영국군 4500명과 지원인력 1만2000명이 궤멸되는 등 번번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국은 결국 1919년 아프간을 중립국으로 인정하는 조약을 맺은 뒤 철수했다. 1979년에는 소련이 한 해 전 쿠데타로 성립한 아프간 사회주의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다. 소련군은 주요 도시를 빠르게 장악한 뒤 승리를 선언했지만, 저항군인 ‘무자헤딘’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병력 5만명을 잃은 채 1989년 철군..

여적 2018.02.27

마케도니아 이름 소유권

인터넷 검색창에 마케도니아를 입력하면 연관검색어로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년)이 뜬다. 마케도니아의 ‘정복왕’ 알렉산드로스는 즉위 후 아시아 원정에 나서 지금의 터키, 이란 지역인 소아시아와 페르시아는 물론 이집트와 인도 서부지역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20세에 왕위에 올라 33세에 숨지기 전까지 13년의 재위기간 중 10년을 애마 부케팔로스를 타고 이역만리를 누볐다. 고대 마케도니아는 그리스권에 속하지만 독자적 언어를 썼으며, 기풍도 그리스와 달랐다. 이런 마케도니아인들을 그리스인은 ‘발바로스(야만인)’라며 멸시했다. 하지만 필리포스 2세 시대에 그리스권을 대표하는 패권국으로 성장했다.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의 종주권을 놓고 이웃 간인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가 27년째 대립하고 있다. ..

여적 2018.02.27

아키히토의 퇴위

일본 정부의 8일 각료회의 결정으로 아키히토(明仁) 일왕(83)이 2019년 4월 말 퇴위한다. ‘국가원수’로 침략전쟁에 책임이 있던 부친 히로히토(裕仁) 일왕과 달리 아키히토는 온전히 ‘국가의 상징’으로 활동한 첫 일왕이었다.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전쟁에 대한 반성과 평화를 역설했으며, 재해지역을 방문해 국민들과 직접 아픔을 나눴다. 2011년 3월11일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때 도호쿠(東北)지역에 마련된 피난소를 미치코(美智子) 왕후와 함께 찾은 일왕이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낮춰 주민들과 대화하는 장면은 대재앙의 충격에 빠진 국민들에게 깊은 위로가 됐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도쿄지역에 계획 정전이 실시되자 정전시간에 맞춰 거처인 황거(皇居)의 전원을 일부러 끄기도 했다...

여적 2018.02.27

하산의 경우

한국의 근현대사는 유민(流民)과 난민(難民)의 역사였다. 구한말 농민들이 농사지을 땅을 찾아 간도로 넘어갔고, 일제강점기가 되자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연해주, 상하이로 망명했다. 해방 후에는 제주 4·3사건 때 많은 이들이 배를 타고 제주도를 탈출해 일본으로 넘어갔다. 한국전쟁 때도 많은 이들이 미국, 유럽 등지로 건너가 새 삶을 찾았다. 최인훈의 소설 의 주인공 명준은 인민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뒤 중립국 인도행을 택하지만 선상에서 바다에 투신한다.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넘겼지만 최근에도 한국을 탈출하려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병역을 피해 프랑스로 간 이예다씨(27)가 2013년 6월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난민지위를 인정받았고, 2016년 11월에도 동성애자이자 병역거부자인 한국 청년(31)이 프..

여적 2018.02.27

한일 정보보호 협정

2012년 6월29일 오후 3시가 좀 넘은 시각, 일본 외무성으로 향하던 도쿄의 한국 특파원들은 오후 4시로 예정된 행사가 연기됐다는 연락을 받고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행사는 ‘밀실추진’ 논란을 빚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서명식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사흘 전 국무회의에서 비공개 의결을 하면서까지 밀어붙이려던 이 협정은 국내 여론의 반발이 심상치 않자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까지 우려를 표명하면서 결국 1시간 전에 무산되는 ‘외교 해프닝’을 빚었다. 그로부터 4년5개월 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시민의 관심이 쏠려 있던 지난해 11월23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체결됐다. 당시 국방부가 재추진을 발표한 뒤 27일 만에 일사천리로 체결을 강행한 것이다. 협정 체결이 우여곡절을..

여적 2018.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