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47

'실용주의적 진보'론

지난해 하반기 이후 야당과 진보진영의 성적은 낙제점이었다. 이슈를 선점하지도,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지난해 여름 미디어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정권이 친서민을 부르짖으며 뒤통수를 치자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을 뿐이다. 보수가 날아다니는 동안 야당과 진보는 바닥을 기었다. 4대강 사업, 세종시 수정 등 정권의 폭주에 맞서기도 벅찼던 점은 인정한다. 거리에선 경찰력으로, 국회에선 숫자로 밀어붙여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슈 선점은 언감생심이었다”고 말하면 변명은 되겠지만, 여론은 외면한다. 이제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가 첫해에 저지른 정책 실패에 대한 기억을 서서히 지우고, 야당과 진보의 주장을 흘려듣기 시작했다. 경제가 빠른 회복세를 보이며 금융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이런 흐름에 ..

칼럼 2010.01.04

'한미 FTA 재협상'대처법

2000년 이후 금융위기 전까지 미국 경제는 ‘글로벌 불균형’에 의해 유지돼 왔다. 글로벌 불균형은 대략 이런 것이다. 중국이나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의 국채를 사들인다. 국채 수요가 많아지면 채권값이 올라가고 금리가 안정돼 신용 창출도 활발해진다. 소비가 국내총생산(GDP)의 70%를 차지하는 미국 국민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국채를 사는 데 지불하는 달러로 경상수지 적자에도 불구, 맘껏 소비를 누릴 수 있었다. 지난해 금융위기 이후 이 ‘불균형의 균형’은 조금씩 무너져내리고 있다. 집값이 폭락하자 미국 소비자들은 저축을 늘려 빚 갚기에 나섰고, 소비가 미국과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줄어드는 흐름이다. 지난 10월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글로벌 불균..

칼럼 2009.12.01

5년 단임제의 경제학

국내총생산(GDP) 지표는 지난 수십년간 비판의 도마에 올랐지만 실은 GDP의 발명자인 사이먼 쿠즈네츠조차 이에 비판적이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쿠즈네츠는 이 지표가 남용되는 것을 개탄해 미국 연방의회에 “한 나라의 복지상태는 국가소득의 합계(GDP)에서 추정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도 생전에 GDP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GDP에는 대기오염과 담배 광고, 앰뷸런스가 고속도로에서 사상자를 치우는 일, 삼나무 숲의 파괴와 슈피리어호의 죽음이 포함된다. 네이팜탄, 미사일, 핵탄두를 생산하면 GDP는 늘어나지만 가족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은 포함되지 않는다. GDP는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지..

칼럼 2009.09.21

외환위기 극복에 기여한 DJ의 대북정책

“(금강산 관광선의 출항장면은) 매우 신기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1998년 11월21일 서울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기자회견에서 금강산 관광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클린턴은 11월18일 동해항에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 826명의 승객을 태운 첫 배가 북한 장전항으로 향하던 장면을 호텔숙소에서 TV를 통해 지켜봤다. 전세계로 타전된 미 대통령의 이 한마디는 대북 강경론을 누그러뜨렸고, 한반도 상황을 우려하던 외국인투자자들을 안심케 했다. 11년 전 국민의 정부 출범 첫해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취임 반년 만인 1998년 8월31일 북한은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이 일..

칼럼 2009.08.17

심판이 선수 눈치보는 금융시장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금융시장이라는 경기장의 심판이다. 금융회사와 투자자들로 구성된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규정을 제대로 지키며 뛰고 있는지를 감독한다. 반칙은 적발해 벌칙을 내리고, 거친 플레이가 나올 경우 해당선수를 퇴장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심판의 경기운영 능력에 불신이 커지고 있다. 힘센 선수의 눈치를 보느라 퇴장감의 반칙에도 가벼운 벌칙으로 끝내는가 하면 스스로 룰을 어기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와 금감원은 지난 3일 삼성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차명계좌를 만든 삼성증권 등 10개 금융회사에 기관경고 조치했다. 재벌총수 일가의 세금 포탈과 경영권 승계를 위해 1000개가 넘는 차명계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관리해온 중대범죄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것이다. 삼성특검 과정..

칼럼 2009.06.15

타성 벗어야 할 경제관료들

지난 40여년간 우리 사회가 좌표로 삼았던 나라는 미국이다. 사회구조가 비슷한 일본의 성장경험을 서둘러 좇으면서도 시선은 늘 태평양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편향은 외환위기 이후 더 심해졌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경제관료들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 일본 법령이나 제도를 참고하곤 했지만, 외환위기 이후에는 이런 일이 사라졌다. 참여정부 때는 '아메리칸 스탠더드'를 곁눈질할 게 아니라, 아예 송두리째 본받자며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로 찬란해 보이던 미국의 경제제도는 긴 꼬리를 끌며 어둠 저 편으로 사라질 처지가 됐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영향력은 예전과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축소됐고,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시장근본주의의 구각(舊殼)을..

칼럼 2009.04.20

로제타와 한국사회

17세 소녀 로제타는 공장에서 해고된 뒤 와플 한 조각과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며 온종일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나날을 보낸다. 그런 로제타를 좋아하는 와플가게 종업원 리케는 어느날 로제타의 저녁거리로 물고기를 잡는 일을 돕다 저수지에 빠진다. 그녀는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를 놔둔 채 숲으로 도망친다. 그가 죽으면 그의 일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되돌아가 리케를 살려 내지만, 그가 와플을 몰래 빼돌려 판다는 사실을 와플가게 사장에게 일러 결국 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가 한 청년 실업자의 가혹한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은 영화 의 한 장면이다. 관객들을 시종일관 불편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1999년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을..

칼럼 2009.03.02

'기부 자본주의'

신용카드를 쓰면서 쌓이는 포인트를 어떻게들 처리하시는지. 지난해 어중간하게 쌓인 포인트를 쓸 방법을 궁리하다 카드사 홈페이지에서 참 괜찮은 사용처를 발견했다. 신용카드 홈페이지에 있는 ‘사랑의 물주기’라는 기부코너. 모 복지재단과 연계,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를 후원하는 곳이다. 쌓인 포인트는 현금으로 몇만원에 불과하지만 전액 털어넣고 “얼마 안되는 포인트지만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짧은 글을 입력해 넣었다. 한 이틀가량은 대출이자와 생활비 등등 돈과 관련한 걱정들이 씻은 듯 사라지고 마음이 넉넉해지는 기분좋은 체험도 덤으로 얻었다. 연말에 복지재단이 보낸 기부금 영수증이 든 우편물을 뜯어보며 ‘뭘 대단한 일을 했기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흐뭇했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공간에서 손..

칼럼 2009.01.31

통상교섭 조직도 바꿔라

2007년 3월26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는 협상단, 취재기자, 경찰병력 등 수백명이 뒤엉킨 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끝장협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미 양측 협상단은 고도의 전략과 기싸움으로 8일간 밤잠을 설쳐가며 ‘한뼘의 땅’이라도 더 뺏으려고 백병전을 벌였다. 미국 행정부가 의회에 협상결과를 제출해야 하는 마감시한을 불과 20분 남겨둔 4월2일 낮 12시40분쯤 대단원의 막이 내려졌고 한국은 자동차·쇠고기 등 핵심쟁점에서 예상보다 ‘선전’하며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김종훈 수석대표를 비롯한 협상단에 찬사가 쏟아졌다. 협상취재를 맡았던 기자는 통상 최강국인 미국을 맞아 어려운 여건속에서 지혜를 짜내 최선을 다한 협상단의 분투에 감동하기도 했고 ‘총..

칼럼 2009.01.08

MB정권의 막말들

지난해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나온 참석자들의 발언이 두고두고 원성을 사고 있다. MB(이명박)정부 인사들의 '4차원성' 발언이 한두번은 아니었지만 국무회의 발언들 역시 압권이었다. 2008년 12월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한승수 국무총리는 "과거에는 정상들이 외국에 나가면 조마조마할 때가 있었는데 이 대통령은 대외관계를 잘하기 때문에 자랑스럽고 나라로서도 복된 일"이라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덜컥 개방하고, 남북관계를 10년이나 후퇴시켜 놓은 대통령을 두고 대외관계를 잘한다니.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제가 아마 과거 왕조시대의 호조판서를 포함해서 역대 재무 책임자 중 가장 돈을 많이 써 본 사람일 것이다. 올해는 정말 원없이 돈을 써봤다"고 말했다. ..

칼럼 2009.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