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간토 대지진 피살자 명부 공개, 일본 반응은

서의동 2013. 11. 19. 19:31

일제 조선인 학살 증거 60년 만에 햇빛

ㆍ3·1운동 630명·간토대지진 290명 희생자 명단 첫 확인
ㆍ징병자 22만여명 명단도

한국 정부가 1953년에 전국적으로 조사한 3·1운동과 일본 간토(關東·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가 사상 처음으로 발견돼 공개됐다. 정부가 최초로 작성한 일제 강제징병자 세부 명부도 나왔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 피해보상 문제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박경국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장은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1권 217장·630명), ‘일본 진재(震災) 시 피살자 명부’(1권 109장·290명), ‘일정 시 피징용(징병)자 명부’(65권·22만9781명) 등 3가지 명부 67권에 대한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박 원장은 “1952년 12월15일 제109회 국무회의에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내무부에서 전국적인 조사를 한 뒤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명부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들 명부는 지난 6월 주일대사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사 과정에서 발견됐다.

630명의 희생자가 실려 있는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에는 지역별·읍·면 단위로 이름·나이·주소·순국일시·순국장소·순국상황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국내외에서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최초의 피살자 명부다. 그동안 3·1운동을 하다 순국한 이들 중 공식적으로 인정된 독립유공자 수는 391명이지만 ‘피살자 명부’ 발견으로 그 숫자는 대폭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진재 시 피살자 명부’에는 1923년 9월1일 발생한 간토대지진 당시 희생된 한국인 290명의 명단이 수록돼 있다. 간토대지진 당시 한국인 피살자 수는 6661∼2만명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희생자 명단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명부에는 간토대지진 희생자 이름 외에 본적·나이·피살 일시·장소·피살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일정 시 피징용(징병)자 명부’는 지금까지 작성된 피징용자 명부 중 가장 오래된 원본 기록이다. 22만9781명의 명단을 담고 있는 명부는 1957년 한국 정부가 작성한 28만5771명보다 5만5990명이 적지만 기존 명부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생년월일이나 주소 등이 포함돼 있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과 간토대지진 당시 피살자 명부는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과거사 증빙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며 “일제강점기 피해배상 문제가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김창영·배문규 기자 bodang@kyunghyang.com>



한국 국가기록원이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와 간토(關東)대지진 조선인 학살자 명부,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등을 19일 공개한 것과 관련해 일본 정부는 공식적인 반응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교가에서는 가뜩이나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한·일 간에 악재가 또 불거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반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 작업을 벌여온 일본 시민단체들은 학살 피해자 명단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에 기대감을 표시했다.

 

일본의 한국 문제 전문가는 “하필이면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양국 간 쟁점이 되고 있는 시기에 왜 한국 정부가 명단을 공개했는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전문가는 “한국 법원이 일본 기업에 배상 판결을 내린 마당에 새로운 피해자 명단이 발견됨으로써 일본 기업에 대한 소송이 늘 가능성도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로서는 이번 공개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배상문제와 무관하게 일제강점 시기 우리 국민에 대한 일본의 폭력적인 만행을 상기시키는 자료들이어서 한국민의 반일감정이 악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 13~15일 사흘 연속 한국인사들을 만나고, 박근혜 대통령의 동북아 공동역사교과서 발간 제안에 담당 장관이 환영의사를 비치는 등 한국과의 관계회복의 전기를 마련하는데 부심해온 아베 정권으로서는 이번 자료 공개는 당혹스러운 사태전개임에 틀림없다. 

 

일본 시민단체와 재일조선·한국인 연구자들은 이번 기록 공개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상이 규명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학살자 명부가 얼마나 신빙성을 갖고 있는지는 좀 더 검증해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반응도 있었다.

 

간토대지진 당시 도쿄 일대에서 군경과 민간인에 의해 자행된 조선인 대학살을 보여주는 증언집을 만든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 대표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53)는 19일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옛 일본 군부와 경찰에 조선인 학살과 관련한 문서와 피해자 신원 기록 등이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일본 정부가 철저히 외면하면서 묻혀버린 사건”이라며 “명단 발견이 희생자들의 원혼을 해소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진상규명을 위한 큰 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니시자키는 “일본의 연구자들이나 관련 단체들이 이 기록을 직접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리일만 사무국장(69)도 “조선인 학살자 명단이 남아 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크다”면서 “한국에서보다는 일본 안에서 진상규명 작업과 연구가 축적돼 있는 만큼 일본 내 연구자들이 기록을 직접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