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도쿄리포트] “원전 반대” 목소리 외면하는 日 언론

서의동 2011. 4. 18. 09:51
도쿄 서북부 스기나미구의 고엔지(高円寺)는 잡화·의류점과 라이브하우스 등이 몰려 있는 대표적인 젊음의 거리다. 20~30대 인구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아기자기한 카페가 즐비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이 ‘고엔지’가 최근 외신의 관심지역으로 떠올랐다. 동일본 대지진 한 달 뒤인 지난 10일 이 거리에 무려 1만5000명이 모여 대규모 반(反)원전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출처=http://ensen.homes.co.jp



유투브에 오른 동영상을 보면 트럭 짐칸에서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이색복장의 악대가 시위대를 이끄는 모습이 일본의 전통축제인 ‘마쓰리’를 연상케 한다. 참가자들은 유쾌하지만 진지하게 “원전 반대”를 외치며 거리를 진동시켰다. 경찰은 예상을 넘는 시위규모에 허둥대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 시위를 조직한 시민운동가 마쓰모토 하지메도 “솔직히 이 정도로 모일 줄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1000명이 넘는 시위가 드문 일본에서 고엔지 시위는 후쿠시마 원전사태에 대한 일본인들의 위기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준다.

고엔지 집회장면

하지만 기묘하게도 일본 언론은 이 시위를 철저히 외면했다. 외신들이 비교적 비중 있게 보도한 반면 일본 내에서는 NHK와 교도통신이 단신으로 처리했을 뿐이다. 대학생 시위가 사회면 구석에 1단 기사로 실리던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 신문을 연상케 했다.


알고 지내는 일본기자에게 물으니 “반원전 시위는 극좌파들이 배후에 있는 경우가 많다”며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했다. 고엔지 시위대의 행장을 보면 사전준비도 있었을 것이고, ‘좌익’ 세력이 가담했을 수 있겠지만, 1만명이 넘게 참가한 대규모 시위라면 그 자체가 엄연한 여론이다. 하물며 체르노빌에 버금가는 대참사가 벌어진 상황에서 ‘원전 반대’ 외침을 한 줄도 다루지 않는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지난 한 달여 동안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방사성물질 오염사태에 대한 일본 언론들의 보도태도도 석연치 않았다. 장기적으로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사능의 위험성을 제대로 환기시키기보다 ‘이 정도면 안전하다’는 제목을 우선 돋보이게 뽑고 본다.
전문가들의 우려는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제목으로 소개한다. 국민에게 지나친 불안감을 주지 않으려는 뜻으로 이해하려 해도 ‘자기검열’이 지나치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신문들이 원전정책을 둘러싼 찬반토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일도 드물다. ‘일본은 원전의존도가 크니 안전대책이라도 철저히 세우자’는 논조가 일방통행식으로 흐른다. “정부가 원전 의존도를 높이려고 여타 발전의 가동을 줄여왔다. 일본의 기술력이라면 원전 없이도 친환경적으로 에너지 정책을 펴나갈 수 있다”는 반론들은 시위현장에서만 들을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의 핵연료가 손상되면 플루토늄이 당연히 검출될 것이 명백한데도 대부분의 언론들은 한동안 도쿄전력의 요오드와 세슘 검출발표만 ‘받아쓰기’ 해왔다.


특파원 부임 전, 많은 취재인력으로 저인망식으로 팩트를 훑어내는 일본 언론의 취재력에 탄복한 적이 많다. 하지만 그런 취재력이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는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느낌이다.


정치권과 관료, 기업이 이끌어온 전후(戰後) 시스템은 한동안 일본 국민에게 윤택한 삶을 제공했다. 그 성공신화가 무너진 지 20년이 지났는 데도 일본사회가 신화의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데는 아래에서 꿈틀대는 목소리를 외면해온 일본 언론도 책임이 있는 건 아닌지. 원전사태를 지켜보며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