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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걸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이 지난 14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유투브의 검색창에 ‘김대중’과 ‘마지막’을 입력하면 고 김대중 대통령의 생전 마지막 연설 동영상이 뜬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19일 뒤인 2009년 6월11일의 6·15기념식에서 그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 되자”고 호소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민주주의가 기로에 몰리던 시점에 터져나온 김 대통령의 피맺힌 ‘유언’을 사람들은 가슴 한켠에 불씨로 간직했다가 지난 겨울 촛불로 피워 올렸다.

 

김 대통령 서거 8주기(8월18일)를 앞두고 목포와 광주, 서울 등에서 열린 추모행사는 전보다 볼륨이 커졌고, 참가자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고인의 일생 과업인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다만, 노 대통령에 대해서는 2편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정도로 추모열기가 활발한 반면, 김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14일 김 대통령의 셋째 아들 김홍걸(53)을 고인의 자택이 있는 서울 동교동 카페에서 만났다. 김홍걸은 지난해 초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뒤 총선과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적극 도왔고, 국민통합위원장을 맡아 활동중이다. 

김홍걸은 “조금이라도 많은 이들에게 김대중 정신과 철학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다”며 “아버지의 유업인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기회가 주어진다면 힘을 보태고 싶다”고 했다. 김홍걸은 정치권에서는 유일하게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과 관련해 “평생 음해와 오해에 시달렸던 아버지라면 우선 언론이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하실 것”이라며 적폐청산과 개혁작업 전반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언론개혁이 시급하다고 했다. 

 

2시간반의 인터뷰에서 김홍걸이 기억해낸 고인은 ‘호기심이 왕성하고, 책읽기와 사색을 즐기며 끊임없이 대안을 내놓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정치인이자, ‘안타깝게도 자상한 가장이 될 기회가 없던’ 바쁜 아버지였다.  


■“촛불혁명, 보셨다면 매우 기뻐했을 것”

 

- 지난 6일 목포에서 8주기 추모 ‘김대중 평화캠프’가 열렸다. 정권교체이후 첫 추모행사였는데 가보니 어땠나.  

“고인의 업적이 지난 9년간 훼손돼 많이들 안타까워 했는데 이를 복원할 기회가 온 셈이니 참가한 사람들의 분위기도 밝아진 느낌이다. 사람들 표정에서 기대감과 희망이 엿보였다.”

 

- 이희호 여사와 가족들의 근황이 궁금하다. 

“어머니는 동교동 자택에 계시는데 연로하셔서 바깥출입은 큰 행사 외엔 잘 안하신다. 큰 형님(김홍일)은 파킨슨병이 악화돼 10년 넘게 거동을 못하고 있다. 고 김근태 의원이 젊은 시절 당한 고문 때문에 파킨슨병에 걸렸는데, 큰 형님도 1980년 신군부에 연행됐을 때 고문을 심하게 당한 후유증 을 앓고 있다. 둘째 형님(김홍업)은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김대중대통령기념사업회 일을 거들고 있다.”

 

- 돌이켜보면 김 대통령이 2009년 6·15 기념식에서 한 연설이 두고두고 회자됐고, 촛불혁명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파동 때 벌어진 촛불시위에 대해 아버지가 ‘과거엔 정치인들이 투쟁을 이끌었는데 이제 국민이 정치권을 이끌어가는 직접민주주의 시대가 됐다’고 평가하시더라. 그게 한단계 더 발전한 것이 지난해 촛불혁명 아닌가 싶다. 국민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고, 국민이 직접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온 아버지가 살아서 직접 보셨다면 굉장히 기뻐했을 것 같다.”

 

-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다큐멘터리 2편이 만들어져 상영됐는데, 그걸 보면서 김 대통령 다큐는 왜 만들어지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노대통령은 젊은 지지자들이 많아 추모가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것 같다. 아버지를 모셨던 분들이 고인의 철학과 발자취를 되새기는 작업에 좀더 적극 나섰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현실정치보다 그런 일에 좀더 힘을 써주셨으면 좋겠다.”

 

- 김 대통령의 영상기록도 유신이전 시절 것은 제대로 없는 것 같다. 1971년 대통령 선거때 장충단 공원 유세의 필름은 남아 있나.  

“유세전체를 찍은 필름을 본 적은 없다. 당시엔 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었고, 1971년 대선 이후 16년간은 제도권 정치에서 추방당해 있었으니 제대로 챙길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국가정보원에 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글쎄. 문서 자료는 김대중 도서관에서 꾸준히 수집하고 있지만, 정보기관에 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외교가 국운좌우’, 늘 강조했다.”


- <김대중 자서전>을 보면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많다. 김 대통령이 19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자 일본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당시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총리에게 “김대중의 구명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서한을 보낸 일도 있었다. 

“일본에는 보수·진보 구분없이 아버지에게 매료된 정치인들이 꽤 있었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총리는 보수 정치인이지만 아버지에게 매우 호의적이었고, 고노담화의 주역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외무상은 야당총재 자격으로 방일한 아버지를 스승처럼 대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이 1973년 아버지를 납치해 죽이려고 했지만 오히려 국제적인 거물 정치인으로 만들어 준 셈이 됐다. 전후(戰後)일본에는 그런 드라마틱한 삶을 산 정치인이 드물기도 했다. 이런 이력이 대일외교에서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해 1998년 한·일 정상회담이 역대 가장 성공한 회담이 됐고, 재임시기 한일관계가 가장 좋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상훈 선임기자

- 일본에는 세습 정치인들이 많아 ‘사형수가 대통령이 된’ 인간드라마가 더 호감을 불러일으켰을 것 같다.  

“일본에서 호의적인 반응과 평가를 받았지만 그게 과거사를 적당히 넘어가거나 친일성향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아버지의 좌우명중 하나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상대와 관계를 좋게 이끌어 가면서도 주관을 지키고 원칙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외교가 국운을 좌우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남북분단으로 인한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잃을 뻔 한 경험도 있어서 더 고민해오신 거다.”

 

- 재임기간을 돌이켜보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등으로 평생 준비해온 뜻을 펼치기에는 상황이 나빴던 것 같다. 

“보수정당인 자민련과 공동정부를 하느라 인사와 정책에서 제약이 있었고, 한나라당이 다수당이어서 국회가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외환위기 극복이란 과제도 있어 적폐청산이나 개혁을 하고 싶어도 ‘경제가 어려운데 과거사를 들추고 있을 때가 아니다’는 공격을 받을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한계이기도 한데 ‘저 사람은 사상이 의심스럽고, 집권하면 정치보복을 할 거다’라는 음해를 워낙 오래 받아 주눅이 들다 보니 과감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 대통령이 너무 늦게 됐다는 평가도 있는 것 같다. 

“전에 어떤 토론회에서 한 참석자가 ‘김 대통령이 5년 일찍 집권했더라면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 것 같다’고 하더라. 1992년에 됐다면 외환위기를 미리 방지해 IMF의 강권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할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전 노태우 정부 때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됐고, 북한 핵문제도 본격화되지 않았던 시점이어서 클린턴 행정부와 손발을 맞춰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 그땐 김일성 주석도 살아 있었다.  

“그도 남은 여생동안 한반도 문제에서 전기를 마련할 생각이었다더라. 남북·북미간 평화협정을 체결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몇차례 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무산됐다. 클린턴 대통령이 2000년 임기말에 평양을 방문하려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는 바람에 취소된 것도 그렇고.”

 

- 클린턴 행정부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대학교수 시절, 야당 정치인으로 가택연금 중인 김 대통령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 외국 지도자·정치인들과의 교류의 폭이 대단히 넓었던 것 같다. 

“1980년대 초중반만 해도 한국은 세계의 관심밖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어도 능숙하지 못한 아버지가 해외 저명학자와 정치인들을 만나 친구로 만들고,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논리를 동원해 지지를 얻어낸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 취임초기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했던 조지 부시 대통령이 2002년 방한에서는 김 대통령에 설복돼 대북 태도를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미국과 다른 의견을 보이면 ‘반미’라거나 ‘동맹을 뒤흔든다’고 주장들을 하지만 사실 한미관계가 가장 나빴던 시기가 박정희 정권 말기와 김영삼 정권 아닌가. 보수언론은 이런 점은 지적하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에서는 아버지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설득해 대북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개성공단도 미국이 회의적이었지만 꾸준히 설득해 이뤄냈고, 미사일방어체계(MD)편입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관계악화는 방지했다. 우리 이익을 지키면서도 우호관계는 유지하는 능동 외교가 필요한데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미국이 요구도 하기 전에 숙이고 들어갔고, 야당과 보수언론은 이를 당연시했다.”


■서태지를 좋아했던 김 대통령 


- 김 대통령의 회고를 보면 서태지의 노래를 좋아해 차에서 듣곤 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나이가 드셨어도 계속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하고, 새 트렌드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셨던 것 같다.”

 

@이상훈 선임기자

- 대통령 취임식 때 팝가수 마이클 잭슨이 참석했었는데 원래 친분이 있었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나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같은 세계 경제인사들이 김 대통령을 찾아준 것이 외환위기 극복에도 도움이 된 것 같다.  

“취임 한해 전 마이클 잭슨이 한국공연을 왔을 때 인사를 나눴고 그 인연으로 참석하게 된 것 같다. 깊은 친분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외환위기 극복에 나섰고, 여러나라의 도움을 받았다. 예전부터 각국 지도자들과 구축해온 신뢰관계가 없었다면 신속하게 지원을 받기 어려웠을 거다.”

 

- 집에서의 모습은 어땠나. 

“정치를 활발하게 하실 때는 뵙기 어려웠고, 가택연금 때나 집에서 뵐 수 있었는데 거의 하루종일 책을 읽고 공부하셨다. 당장 활동은 못하지만 나중에 기회가 올 때를 대비해 꾸준히 준비하신 거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대비해 모의회담을 하는데 김정일 위원장 역을 맡은 이가 난감한 질문들을 쏟아냈는데도 막힘없이 답변하셨다더라. 임기응변이 아니라 ‘내가 대통령이 돼 북한 지도자와 만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걸 수십년간 머릿속에서 연습을 해왔던 거다.”

 

- 김 대통령이 연설 도중 유머나 농담을 섞어 좌중의 긴장을 풀어주곤 했던 것 같다. 그런 유머까지 미리 준비한 것인가.

“일일이 다 준비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참모들 얘기로는 연설문을 꼼꼼하게 챙기셨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도 15~20분 연설을 위해 전날 하루종일 준비했다고 한다. 대중연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고, 말씀하기를 좋아해 청중의 반응이 좋으면 좀더 길게도 하시고.”

 

- 김 대통령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나. 

“대부분 자서전에 쓰셔서 따로 소개할만 한건 없는데…. 아버지는 천성이 모질지 못해 당신을 공격하거나 탄압한 사람에게도 원한이나 복수심을 갖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총살당할 뻔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는데 그러면 보통은 극우 반공주의자가 되잖아. 그런데 아버지는 그 일을 계기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셨다. 정치할 때도 정적을 근거없이 비방하는 대신 한발 앞선 대안을 내놓고 합리적으로 비판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이 ‘저 사람에게 정권을 뺏길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꼈던 거다.”

 

- 한일회담 당시에도 보통의 야당의원들과 달리 국교정상화는 반대하지 않았다. 

“굴욕외교는 반대하지만 국교정상화를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웃나라와 국교가 없는 상태로 언제까지 갈 수는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베트남 파병도 당시 미국에 많이 의존하던 터라 무조건 반대는 어려우니 ‘지원군’ 형태로 파병하자는 제안을 했다.” 

 

- 김 대통령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신앙심이나 인내심, 관용의 정신이 커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1982년 말 (전두환 정권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 아버지가 가족들과 함께 10년만에 미국에 건너갔다. 10년전에 아버지를 돕다가 변절해 전두환 정권에 협력하는 이들까지 불러 챙기셨다.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줬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지금은 함께 하기 힘들겠지만 나중에라도 반성하고 돌아오면 받아줘야 한다’고 하시면서. 도쿄 납치사건에 가담했던 중앙정보부 직원들에 대해서도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했다’며 증오심을 갖지 않았다.”

 

- 아들로서 아버지의 어떤 모습이 가장 인상에 남았나.

“아무래도 죽음의 고비에 처했을 때인 것 같다. 1973년 도쿄에서 납치당했다가 돌아오셨을 때와 1980년 사형선고 받았을 때. 도쿄에서 납치된 지 5일째 동교동 집에 정치인, 기자, 친척들이 모여 있었는데 저녁 8~9시쯤 갑자기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아버지가 문앞에 덩그러니 서 계셨다.”

 

- 유신시절 학교 다니는 데 문제는 없었나. 

“나는 워낙 어려 별 어려움은 없었지만 형님들은 감시도 당하고, 취직도 못해 고초가 컸지.”

 

- 김 대통령이 집에 날아드는 참새 한마리의 먹을 것도 신경썼다고 하더라. 새 먹이로 남겨놔야 한다며 집 감나무의 감도 따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워낙 동식물을 좋아하셨다. 특히 수감기간 동안 꽃과 나무를 가꾸는데 심취하셨다.”


■“언론이 공정했다면 더 일찍 당선됐을 수도”

 


- 김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인연이 있나.  

“문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 이전에는 서울에서 활동하지 않아 인연이 깊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노 대통령 서거 얼마 후 문재인 대통령 등과 아버지 측근들을 한데 불러 식사하면서 당부하셨다.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은 다 잊고 야권의 대통합을 이뤄 꼭 정권교체를 이루라’고. 그 말씀을 하시고 한달쯤 뒤 입원하셨고 한달 뒤 돌아가셨다. 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정신적 충격이 컸고, 장례식 날 더운 땡볕에 앉아계시면서 몸이 많이 상하셨다.”

 

-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지 100일이 됐는데 평가를 한다면? 

“이제 막 내각을 구성한 단계이니 평가는 이른 것 같다. 다만, 당부하자면 지지율 하락을 각오하고 적폐청산과 개혁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개혁작업이 본격화되면 불만과 반발이 터져 나오고 현재 수준(70~80%대)의 지지율도 내려갈 것이다. 그래서 20%쯤 빠져도 50~60%대라면 낮은 지지율이 아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집권 초기 빼놓고 지지율이 더 낮았다. 여론조사 수치에 연연하지 말고 나중에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개혁작업을 하겠다는 각오로 나아가야 한다.”

 

- 김 대통령이라면 특히 어떤 부문의 개혁을 당부했을 것 같은가.  

“아마 언론개혁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공영방송 문제도 불거졌고, 삼성과 언론사 간부들간 문자내용이 공개되면서 언론과 재벌간의 유착을 국민들이 알게 되지 않았나. 언론개혁을 강조하는 이유는 정부와 정치권의 힘 만으론 적폐청산이 쉽지 않고 언론이 제대로 보도해 여론의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이 바로 서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아버지는 그리 생각하실 것 같다.”

 

- 자서전에서도 언론에 대한 야속함을 읽을 수 있다. 평생토록 오해에 시달렸고, 서거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으니. 

“언론이 상대 후보를 미화하지 않고, 편견없이 보도했더라면 1992년, 아니면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지 않았을까. 다른 정치인에 비해 부당하게 공격받은 일이 워낙 많아서 그런 한이 있었을 거다.”

 

- 아직도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나돌고, 보수 정치권이 이를 이용한다. 

“5·18때 자유한국당 대변인이 성명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거론하지 않았나. 보수 정치인들이 아직도 그런 거짓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이비 보수라는 말을 듣는 거다.”


■“남북관계에 필요하다면 역할 하겠다”

 

- 한반도의 긴장이 심상치 않다. 김 대통령의 재임시에 비해 ‘북핵 방정식’이 더 복잡해 보인다

“우리가 독자적인 목소리를 더 내야 할 것 같다. 북한이 이제는 핵·미사일 능력을 완성시키고 보겠다는 식이어서 협상의 여지도 쉽게 내주지 않는데다 트럼프 행정부도 예측불허다. 하지만 우리가 ‘미국이 무리한 억지를 쓰거나 요구를 하지 않을테니 웬만하면 다 들어주자’는 식으로 가다간 상황악화를 앉아서 보고만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미국이나 보수언론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대화냐’고 비판해도 개의치 않고 (대북대화에) 대담하고 과감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주변국과 우호관계는 해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상황을 이끌어가는, 외교의 묘를 발휘해야 한다.”  

 

- 대담하고 과감한 태도를 좀더 설명하면?

“남북대화의 여건은 우리가 적극 나서서 만들어야지, 여건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간 영영 못하게 된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남북관계에서 실패를 두려워 해 시도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우선 저질러놓고 봐야 한다’고 하더라. 대화시도를 보수언론이나 미국이 비판할 수 있지만, 일단 시도해 좋은 결과가 나오면 시비걸지 못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돌이켜보면 방북직전까지 의제가 합의되지 않았다. 정상회담은 회담전에 의제를 다 합의하는게 보통인데 북측은 ‘그냥 오시기만 하면 된다’ ‘회담 자체에 의의를 두자’고 하더라. 그런데도 아버지가 ‘괜찮다’며 가셨던 거잖아. 북측 실무진이 나중에 ‘김 대통령은 정말 대단한 분이다. 우리가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 성과없이 돌아가면 정치적으로 곤란해질 수 있는데도 배짱좋게 올라오셔서 감탄했다는 거다. 그런 태도로 임해야 남북관계가 풀릴 수 있다. 남북문제에서 미국과 보수언론, 북한을 동시에 만족시킬 방법은 없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다 보면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 김 대통령이라면 이미 북한은 물론 미국, 중국에 특사를 보내지 않았을까. 

“아마 정상회담 채널외에도 특사를 보내 미국을 설득하고, 중국의 협조를 얻어내려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 분야가 전공이나 다름없지만 문 대통령은 그 정도는 아니니 보좌진의 어깨가 더 무거울 것 같다.”

 

- 북한은 김 대통령의 유족에 대해서는 각별한 태도를 보인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김홍걸 위원장이 남북관계에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글쎄. 대북경험이나 경력이 있는 분들이 많으니 내가 할 필요는 없겠지. 다만, 아버지가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고 나도 6년전 어머니를 모시고 김정일 위원장 조문을 다녀왔다. 북한은 유훈통치 국가여서 김정은 위원장의 아버지와 조부가 했던 일들은 꼭 받들어야 하는 사회다. 그런 면에서 내 역할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하려고 생각한다.”

 

김홍걸은 2011년 12월 김정일 위원장 조문을 위해 어머니 이희호 여사, 작은 형님인 김홍업과 큰 형수, 조카, 현대아산 관계자 등과 함께 개성공단 육로를 통해 1박2일로 방북했다. 당시 방북 조문단 외에 김정은 위원장을 접촉한 이는 국내에 없다. 

“김정은 위원장과는 조문을 마치고 잠깐 인사를 나눈 정도다. 상중이라 편히 대화할 상황은 아니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당시엔 앳되고, 너무 어려보였다. 그런데 몇달 뒤에 TV에 나와서 연설하는걸 보니 외모나 목소리가 무게감있게 바뀌었더라. 집권 초기엔 ‘나이도 어린데 뭘 알겠느냐. 원로들에게 일일이 물어서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많았지만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잖아. 요즘엔 중국 전문가들도 ‘저렇게 배짱 좋을 줄 몰랐다’고 놀라더라.”

 

- 김 대통령의 측근들중 상당수가 국민의 당에 가 있는데 김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다고 보기 힘든 것 같다. 

“언론에서 ‘동교동계’라는 표현을 쓰면서 동교동계가 주로 국민의 당에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동교동계’는 아버지가 당선되면서 해체를 선언해 20년전에 이미 없어졌다. 그냥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분당할 때 열린우리당으로 가지 않았던 ‘구 민주당계’로 불려야 한다. 호남출신이고 아버지를 모신 적이 있어야만 ‘김대중 정신을 계승한 사람’이라는 것도 잘못이다. 고인의 정신과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 내가 국민의 당으로 간 분들을 비판했던 이유가 김대중 정신을 계승한다면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익, 정치생명 연장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그런 비판을 했는데 올해 대선을 거치면서 현실로 드러났다. 안철수 후보가 보수표를 얻기 위해 햇볕정책을 포기하는 듯한 발언을 했는데도 그 분들중 누구도 정면으로 반박한 분이 없지 않았나.”

 

- 대통령의 아들로 산다는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이 많을 수 밖에 없지 않나. 실수를 해서 누를 끼쳐서는 안된다는게 있으니 행동을 조심해야 했고, 내가 성공하면 아버지 덕을 봤다고 할 거고, 실패하면 대통령 아들이 저거 밖에 안되느냐 손가락질 할 것이고, 이래도 저래도 말이 나오니 처신하기 쉽진 않은 거지. (그래서 오래 은둔해온 건가) 성격이 내성적이고 사람을 쉽게 사귀는 편이 아니니.”

 

- 그럼에도 정치를 하겠다고 한 건 아버님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서인가. 

“그분이 워낙 하신 일이 많고 업적을 남기셨으니, 다 따라할 수 없겠지만 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유업을 계승해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김대중 정신과 철학을 잊지 않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한반도 평화정착은 정치발전을 위해서도 긴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김홍걸은 정치를 하게 된 이유로 한마디를 더 보탰다.  

“아버지가 평생 추구한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정착은 긴밀하게 묶여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우리 정치가 한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교체된 지금에도 자유한국당이나 보수언론은 북한카드로 상대를 협박하고, ‘종북좌파’로 몰고 있다. 문재인 정부나 여당도 정권을 잡았지만 말도 제대로 못하고 금기도 아직도 남아 있다. 이렇게 되면 정치발전이 어렵다.”

 

@이상훈 선임기자

-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서로 맞물려 있다는 뜻인가. 

“북한과 관련된 것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금기’잖아. 그러면 표현의 자유, 정치적 자유도 억압된다. 유럽이나 정치 선진국처럼 그런 제약이 없어야 정치수준이 높아진다. 그러기에 한반도의 평화가 중요하다는 거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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