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 우리는 서독만큼 매력적인가

서의동 2019. 1. 18. 15:54

예멘 난민 문제는 한국 사회의 협량을 확인하는 좋은 본보기가 됐다. 제주 출입국·외국인청이 지난 14일 예멘 난민 신청자 중 2명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했다는 뉴스에 붙은 댓글들이다.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를 빼앗길 수는 없다”, “분단에 휴전국인 나라에서 무슨 난민이냐”, “자국민 살기 힘들어 죽어나가는 건 남의 일인 양 보면서…”. 제주 예멘인 난민신청자(484명)의 난민 인정률이 0.4%에 불과하다는 건 ‘그러거나 말거나’다.

 

‘포용력 부족’ 정도로 넘길 문제는 아니다. 난민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다보면 공동수도와 화장실을 쓰느라 비좁은 골목길에서 악다구니가 오가는 피란민촌의 아침 풍경이 떠오른다. 경제 볼륨은 세계 10위권으로 커졌지만, 사회의 심리상태는 전쟁통 난민촌에 가깝다. 간신히 맞춰놓은 삶의 질서에 티끌만큼이라도 영향을 받을까 신경들이 곤두서 있는 것이다. ‘우리도 취업난민, 주거난민이 넘쳐나는 판에 어딜 비집고 들어오겠다는 거냐’는 적의가 엿보인다.

 

돌이켜 보면 한국사회는 관용과 포용, 신뢰나 연대의 가치를 체득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전쟁과 분단, 군사독재, 외환위기를 거쳐오며 체득한 신조는 ‘각자도생(各自圖生)’ 정도인 듯하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나 연대감을 확인할 기회가 간혹 있었지만 세상은 바뀌는 법이 없었고, 배신감만 맛봤을 뿐이다. 아이들은 철들자마자 경쟁의 무한궤도에 오른다. 전쟁 같은 입시·취업을 거쳐 진짜 정글에서 구르며 날마다 ‘번아웃’된 채 살아가는 한국인들 마음속에 ‘도움 안되는 타자’에 대한 포용과 관용을 넣어둘 공간은 없다.

 

그렇다면 탈북인들은 애초 번지수를 잘못 찾았는지 모른다. 사선을 넘은 그들을 기다리는 건 따스한 공동체가 아니라, 벼랑 끝에 선 난민촌이었다. 북한과 체제경쟁을 하던 시절엔 그나마 ‘상품가치’가 있던 탈북자들은, 이제 천덕꾸러기가 돼버렸다. 2017년 남북하나재단 조사에 따르면 탈북민의 주당 근로시간은 한국인 평균보다 9시간 더 많지만, 월평균 소득은 178만원으로 63만원이 적었고 실업률은 평균보다 2배 높았다.

 

더 가혹한 건 그들의 삶의 방식에 ‘한국사회에 동화(同化)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명사회에 적응하려면 북한에서 배우고 익힌 모든 것을 없애라’고 한국사회는 명한다. 북한을 부인하고 남한을 찬양하지 않으면 잠재적인 간첩으로 몰릴 수도 있다. 북한에서의 삶은 웃음의 소재가 돼야 비로소 유통된다. 이건 제국주의 일본이 식민지 조선인을 대하던 방식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와 동화정책에 저항하는 이들을 불령선인으로 몰던 일제의 수법과 다를 게 없다. 그런 탓인지 남북 간 화해가 추진된 지 30년이 돼가지만 우리 사회가 북한과 그 주민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빈약하다. 16년 전 군 복무 중 비무장지대를 넘어온 주승현(인천대 초빙교수)은 “통일을 준비한다면서도 북한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탈북인에 대한 포용은 분단극복과 통일을 위한 예비과정이다. 하지만 숫자들을 보면 절망적이다. 통일부가 2015년 발표한 탈북인들의 자살률은 세계 1위라는 한국 평균의 3배다.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제3국이나 ‘탈남(脫南)’한 사람만 5000여명이다. 탈북인 3만명 중 15%가 한국을 등진 셈이다. 26명(2017년 말)은 아예 북한으로 되돌아갔다. 북한인권정보센터가 2016년 3월 실시한 탈북민 설문조사에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응답이 20.8%나 됐다. “북한으로 돌아간 재입북자를 이해한다”는 응답도 37.9%였다. 한국이 싫어서 영국으로 떠난 의사 출신 탈북인은 한 인터뷰에서 “한국이 북한의 미래가 돼서는 안된다”고 단언한다.

 

남북관계가 복원되면서 ‘남북경협으로 한국경제의 돌파구를 마련하자’는 논의가 유통된다. 남북경협은 분명히 필요하고 한국경제에 플러스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값싼 자원과 노동력 공급지’가 과도하게 부각되는 현상은 불안하다. 사람이 두 동강이 나도 기계는 돌리고 보는 한국 자본주의의 야만이 북한에 간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서독이 동방정책을 펴면서 20년간 매년 평균 32억달러의 현금과 물자를 동독에 지원한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동독 주민들이 마음을 연 것은 사회적 시장경제와 협치로 관용과 공존, 포용의 가치를 가꿔온 서독 자체의 매력 때문이었다. 남북은 독일과 길이 다를 것이고,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때까지 우리가 과연 서독의 발치라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한국이 관용과 평화가 넘치는 사회로 바뀌지 않으면 북한주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한반도 대전환이 이뤄지려면 ‘한국사회의 대전환’이 필요하다.(2018년 12월26일자 '경향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