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고베는 지진으로 항구대신 사람을 얻었다

서의동 2011. 3. 20. 09:54
“도호쿠 대지진을 보면서 16년전 5살일 때 겪었던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기억이 되살아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일 오전 11시. 효고헌 고베시 중심부인 한신전철 산노미야 역 앞에서 다케우치 렌(21·경제학과)을 비롯한 고베 가쿠인대학생 5명이 ‘도호쿠 피해주민을 응원합시다’라는 팻말을 들고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다케우치는 “(한신 대지진 당시) 머리에 모포를 뒤집어 쓰고 있었는데 그 위로 옷장이 넘어져 매몰됐지만 그 때문에 추위에 견뎌 살아남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쓰나미에 원전사고까지 겹친 도호쿠 주민들을 보면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모금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산노미야 역 고가보도에서는 타니가와 중학교 학생들이 ‘피해지에 사랑의 마음을 보냅시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5일째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다. 인솔교사인 우지 다카오(37)는 “모금활동을 하는 학생들은 지진 당시엔 태어나기 전이지만 부모·형제와 동네 어른들로부터 당시의 참상을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며 “이번 지진을 접하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활동 조직을 꾸리게 됐다”고 말했다.  

야경이 아름다워 일본의 3대 미항으로 꼽혔던 고베시의 주민들은 1995년 1월17일 이 지역을 강타한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6400여명이 숨졌고 주택 10만 가구가 완전히 파괴되는 등 재산피해가 당시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2.5%인 10조엔에 달했다. 한신 고속도로 일부와 산요 신칸센 등이 무너져 오사카-고베간 교통편이 완전히 끊겼다. 

한신아와지대지진 당시 고베 시가지 모습/연합뉴스


고베는 지진 이후 도시기능이 정상화되고 고베항이 제모습을 찾는 데만 2년가량 걸리는 등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 고베항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동북아 지역의 물동량이 부산과 요코하마로 옮겨가면서 컨테이너 취급량은 10년이 지나도 지진 이전의 70% 안팎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고베는 항구 대신 사람을 얻었다. 지진이 나자 전국 각지에서 지원이 쇄도하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원봉사를 나선 것이 재건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대재난으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자원봉사가 메웠다. 가설주택에 입주한 독거노인들이 고독사 하는 이들이 없도록 안부를 살피는 ‘자원봉사’ 서비스의 발상지가 바로 고베시다. 자원봉사가 ‘생명선’이었던 셈이다. 

패전 이후 고도성장을 거치면서 일본 사회가 조금씩 망각해가던 ‘협력과 나눔’ 정신은 당시 폐허속에서 자라난 해바라기처럼 고베에서 활짝 피어났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겨울철에 도시의 밤을 수놓는 ‘루미나리에’도 사람들의 발길을 다시 돌려놓고 있다.   

고베항 부근의 하토고베 거리에 건립된 ‘사람과 방재미래자료관’ 4층에는 당시 끔찍했던 지진상황을 재현한 영상들이 상영되고 있다. “자연재해는 피할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습니다.” 영상 속의 나레이터는 대지진이 자연과의 공생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고 강조했다.  

이규섭 부단장 내외


16년전 112명의 희생자를 낸 한국 교민들도 도호쿠 대지진 피해지역 돕기에 적극적이다. 민단 효고현지부는 지진발생 직후 200만엔(약 2700만원)의 성금을 일본적십자를 통해 전달한 데 이어 추가모금 활동을 벌이고 있다. 현지 자원봉사자 신청도 쇄도하고 있다. 민단 효고현지부 이규섭 부단장(64)은 “재난 당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으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졌고 마을과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사람간에 정이 넘치는 도시가 됐다”며 “고베 시민들이 도호쿠 대지진을 접하고 자기 일인 양 나서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고 말했다. 
 

 고베와 오사카 등 간사이(關西) 지방이 대지진과 쓰나미 재난을 겪은 도호쿠(東北) 지방 지원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자치단체장과 자원봉사 조직이 방사능 피폭우려에도 불구, 현장을 직접 찾아 협력을 다짐하는가 하면 시민들도 피해지역 주민돕기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중이다. 
간사이 지역 주민들은 1995년 6000명이 넘는 생명을 앗아간 한신·아와지 대지진을 겪은 바 있어 ‘동병상련’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20일 현지언론에 따르면 오사카부와 효고현 등 7개 부·현 지방정부로 구성된 ‘간사이 광역연합’은 19일 도호쿠 피해지역 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일시원격 피난소를 개설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준비에 착수했다. 
시가현이 최대 3만명을 수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데 이어 오사카부와 효고현이 각 1만명을, 돗토리현과 도쿠시마현이 2000명을 각각 수용키로 해 5만4000여명의 피해주민이 재해복구 때까지 간사이 지방에 정착할 수 있게됐다. 또 교토부와 시가현은 후쿠시마현을, 오사카부·와카야마현이 이와테현을, 도쿠시마·돗토리현이 미야기현을 각각 지원하기로 그룹을 나눴다. 
피해지역 주민들이 일시 이주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져 마을공동체가 파괴될 경우 노인이나 어린이 보호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효고현 고베시 직원 63명은 19일 한신·아와지대지진 당시 고베시의 경험을 전수하기 위해 도후쿠 지방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당시 행정경험을 기록한 699쪽짜리 책자도 전달할 예정이다. 시신 안치와 관의 조달은 물론 임시화장실 설치및 분뇨처리, 피난소 운영, 쓰레기 처리, 기반시설 복구, 지원물자의 배분 등 16년전 대지진 당시의 ‘노하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자다.
고베시를 끼고 있는 효고현의 이도 도시조 지사는 지난 19일 도후쿠 대지진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미야기현을 방문해 무라이 요시히로 지사와 면담을 갖고 피해복구 지원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별도로 효고현 의사와 간호사, 대학교수 등 80명의 자원봉사 선발대는 미야기현에 도착했다. 이들은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와 달리 피해범위가 넓어 재해현장에 지원물자가 크게 부족하다”며 “조속히 지원루트를 정비하는 한편 자원봉사자 활동거점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베시에서는 19일 자선콘서트가 열렸고, 교토시내 불교사찰인 히가시혼간지에서 열린 신도 4000여명이 모여 도호쿠 지방의 부흥을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