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반한류 시위 도대체 왜 일어났을까

서의동 2011. 8. 16. 20:37
낮 12시~1시 ‘웃어도 좋고말고 2PM 출연’, 오후 2시10분~오후 3시30분 한류알파(α) 제빵왕(김탁구)’ 방영, 오후 3시30분~4시30분 ‘전개(展開) 케이팝(K-POP) 동방신기 등 출연’, 오후 7시~8시50분 ‘헤이 헤이 헤이(Hey Hey Hey) 소녀시대, 카라 등 출연’, 오후 10~11시 ‘스마스마(SMAP×SMAP) 게스트 장근석’ 
 
동영상 사이트 유투브에 올라온 ‘후지TV의 한류세뇌 모음’ 중 후지TV의 지난달 18일 프로그램 내역이다. 이날 하루에만 5편의 프로그램에 한류스타들이 출연한다. 일본 민간방송 후지TV가 ‘한류편중’이라는 논란이 일면서 이런 류의 동영상들이 상당수 유포되고 있다. 한류가 일본의 대중문화에 폭넓게 진출하면서 일본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반(反)한류’ 움직임의 일면이다. 최근 도쿄 오다이바의 후지TV 사옥 주변에서 ‘한류편중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벌어졌는가 하면 ‘한류스타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는 비판성 기사들도 주간지에 등장했다. 일본 배우 다카오카 소스케(高岡蒼甫·29)의 후지TV가 ‘한류편중’이라는 비판은 이런 움직임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일본사회 일각의 ‘반한류’ 현상은 한류 컨텐츠 자체에 대한 반감이라기 보다는 수익률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는 일본 방송산업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사회에서는 ‘민간방송들이 볼게 없고, 시청자를 우롱한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일본 방송산업 “수익률 지상주의에 매몰됐다” 불만 고조
 
일본의 주간지 ‘주간포스트’가 최근호에서 민간방송들의 파행을 다룬 특집기사를 보면 민간 TV에서 요즘 급증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한류 드라마, 통신판매, 방센(番宣·본 프로그램의 내용을 축약해 보여주는 예고프로)이다. 
 
10년전인 2001년 8월6일과 올해 8월1일의 프로그램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뚜렷하다. TBS와 후지TV는 10년전 해외드라마가 전혀 없었으나 최근엔 각각 매일(월~금) 1시간, 2시간50분씩 한류드라마를 내보낸다. 지상파 방송외에 BS(위성방송) 등에서도 한류드라마를 방영하는 곳이 적지 않다. 
 
한류드라마는 예산은 적게 들면서도 시청률이 보장돼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내보내는 추세다. 후지TV 관계자는 “엔고의 영향으로 한류드라마의 구입단가가 점점 내려가고 있다”며 “자체제작 드라마보다 비용이 저렴하면서도 구매력이 있는 주부층을 중심으로 시청률이 높아 광고스폰서들도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이런 영향으로 자체제작 드라마의 방영시간은 10년전 주당 4시간10분에서 현재 2시간20분(후지TV)으로 줄어들었다. 배우 등 일본 연예인들이 방송편성의 변화에 불만을 가질 이유가 있는 것이다.
 
10년전에는 거의 없던 통신판매(통판) 프로그램도 버젓이 등장한다. 일본TV, TV아사히, 후지TV 등의 평일 심야 2시~5시 시간대는 통판으로 거의 채워진다. 심지어 TBS는 오전 10시, 오후 3시30분, 새벽 3시 등 하루 3차례에 걸쳐 통판을 내보낸다. 통판의 방영이 늘어난 것은 광고수익이 보장되는 이유도 있지만 상당수 방송사들이 통신판매 회사를 직접 자회사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 주말시간대에는 ‘방센’ 프로그램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해당 방송사가 공들여 만든 프로그램의 본방송 전에 미리 내용을 요약해 방영하는 것으로 타국에선 예를 찾기 어려운 ‘전파낭비’형 프로그램이다. 일본의 민간방송들이 수익률 지상주의에 경도되면서 이런 기괴한 프로그램들이 많아졌다. 한류드라마의 편성비중이 높아진 것은 컨텐츠 자체의 경쟁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방송사들의 수익논리를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민간방송들의 이런 파행편성이 시청자들의 원성을 사는 과정에서 한류가 유탄을 맞게 되는 셈이다. 
 
“채널8(후지TV)은 한국 TV라고 생각한다. 일본인은 일본 전통 프로그램을 원한다.”
 
배우 다카오카가 지난달 23일 트위터에 올린 글도 한류 자체에 대한 반감보다는 입지가 좁아들고 있는 일본 연예계 종사자의 불만을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개그맨이자 가수, DJ 등으로 활동하는 후카와 료(36)도 최근 라디오 방송에서 다카오카를 거론하면서 “공공 전파를 이용해 (방송)기업이 이익을 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후지TV가 지난 5월 도쿄 에비스에 개장한 일본최초 케이팝 전용극장에 투자하면서 한류 아이돌그룹 소개프로그램을 내보낸 것을 겨냥한 발언이다.
 
일본 방송들이 수익지상주의에 빠져 공공성을 외면하고 있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일본 방송사들은 본업외에 영화·음악 제작및 유통업, 전시회 등 이벤트사업은 물론 부동산 임대업에까지 발을 뻗치고 있다. 그러면서 자사가 출자한 영화나 이벤트에 대한 홍보성 프로그램을 버젓이 내보낸다. 전파를 사익추구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민간방송의 무분별한 태도도 시청자들을 TV앞에서 떠나게 한다. NHK방송문화연구소가 발표한 2010년 국민생활시간조사보고서에 따르면 ‘TV를 전혀 보지 않는다’는 국민비율은 95년 8%에서 지난해 11%로 증가했다.  
 
“1960~70년대 일본 방송국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일반 취직기회를 잃은 재기발랄한 청년들이 상당수 모여들었다. 일반 기업처럼 매뉴얼도 없고, 제약도 없던 시기라 이들의 창의성이 한껏 발휘될 수 있었고 이에 힘입어 방송이 활짝 꽃을 피웠다.” 
 
우치다 타츠루(內田樹)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는 “하지만 방송이 성공하자 ‘예스맨’ 기질이 강한 일류대학 출신들이 몰려들면서 결과적으로 방송쇠퇴의 원인이 됐다”며 “기껏 성공사례의 모방정도나 할 줄 아는 예스맨들이 방송계를 장악하면서 방송에서 창조성과 비판정신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일본사회의 열패감도 ‘반한류’의 배경 
 
하지만 지난 7일 오다이바 후지TV 앞에서 벌어진 시위는 한류에 대한 일본사회 일각의 불만이 잠재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날 벌어진 시위에는 일장기인 ‘히노마루’와 ‘한류를 그만둬라’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극우성향의 인터넷 게시판 ‘2채널’이 주도한 이날 시위에선 “조선인들은 한반도로 돌아가라”는 과격구호가 나오는가 하면 시위대들은 ‘기미가요’ 합창을 하기도 했다. 전 항공자위대막료장(공군참모총장)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는

지난달 29일 트위터로 “TV에서 온종일 한류 드라마를 내보내는 것에는 나도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라며 한류편중 논란에 가세했다. 전 요코하마 시장 나카다 히로시(中田宏)도 트위터로 “(다카오카가) 바른말을 하고 있다. 쭉 그렇게 생각했다. 도대체 어느 나라의 텔레비전인가 하는 느낌”이라는 글을 올렸다. 방송사들의 파행에 대한 불만을 극우세력들이 파고들면서 반한류가 확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의 배경으로 일본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열패감’을 거론한다. 1990년대초 거품경제 붕괴로 초래된 장기불황에 3·11 동일본대지진까지 겹쳤지만 여전히 구태를 보이고 있는 정치권과 관료, 방송 등 기득권층에 대한 염증이 만연해 있다. 한국이나 중국의 급성장도 심기불편 요인이 된다. 일본 민방의 한 관계자는 “중국의 고속철도 개발, 한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가 일찌감치 석권한 분야인데’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주변에 꽤 있다”며 “일본은 쇠락하는 데 이웃나라가 약진하는 것에 불편해하는 이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권혁태 교수(일본학과)는 “한때 일본 방송에서 미국 드라마를 많이 방영하던 적이 있지만 그 때문에 시청자들이 불만을 표출한 적이 없었다”며 “이런 점에서 한류에 대한 반발은 예사롭게 생각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한국과 중국에 대한 열패감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려는 움직임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3년 드라마 ‘겨울연가’의 대히트를 계기로 상륙한 한류가 이미 일본의 대중문화에 깊게 뿌리내린 만큼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많다. 산케이신문 문화부 편집위원인 기타 요시히로(喜多由浩·50)는 “케이팝의 영향으로 한류를 향유하는 팬층이 과거 40~50대 여성층에서 전 연령대로 확대됐다”며 “한류는 이미 일본 대중문화의 일부로 봐도 좋을 정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