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대지진1년] 도호쿠 해안도시를 가다

서의동 2012. 3. 8. 11:26




ㆍ허리 꺾인 신호등·자동차 무덤… “잊혀져 가는 게 두렵다”

지진과 쓰나미의 상처는 단지 ‘깊었다’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었다. 3·11 동일본 대지진 1년을 맞아 지난 6일 찾은 도호쿠(東北) 지방의 이와테(岩手)현 리쿠젠타카타(陸前高田)시. 건물들이 남김없이 쓸려나간 시가지 한쪽에 밑동만 덩그러니 남은 가로수가 있고, 그 꼭대기에 까마귀가 앉아 있는 모습이 초현실적인 광경을 자아냈다. 차량의 내비게이션은 분명히 신호등이 있는 삼거리라고 표시했지만 어디가 도로이고, 어디가 건물이 있던 자리인지 분간조차 어려웠다.


5~6일 둘러본 미야기(宮城)현 게센누마(氣仙沼)시,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시와 오후나토(大船渡)시에서 만난 주민들은 “부흥은커녕 복구조차 시작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비좁고 습기찬 가설주택에서 도호쿠 지방의 을씨년스러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피해주민들은 “불편하고 괴롭지만 더 힘든 것은 복구도 되기 전에 잊혀져 가는 것”이라고 했다. 

▲ 주민들 가설주택 살고 건물들은 뼈대만 남아…

부흥은커녕 복구도 막막


지난 5일 오전 신칸센 정차역이 있는 이와테현 이치노세키(一關)시에서 게센누마항으로 향했다. 게센누마는 대지진 당시 항구 부근의 정유공장이 폭발하면서 시가지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던 곳이다. 항구에서는 밑동만 남은 건물터 사이로 굴착기와 덤프트럭들이 눈과 비가 뒤섞여 진창이 된 도로를 오가며 건물잔해 처리에 분주했다. 전날 내린 눈이 살풍경을 조금 누그러뜨리긴 했지만 항구부지 곳곳에 건물 쓰레기의 언덕들이 솟아 있었다. 해안에서 20m쯤 떨어진 7층 높이의 공공기관 합동청사는 쓰나미 당시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들어가 보니 2층까지는 유리창이 모조리 깨져 있었고 1층 천장에는 공조기 배관, 전선, 철제 파이프, 형광등 등이 흉칙한 내장을 드러낸 채 방치돼 있었다. 화장실 바닥에는 수백마리는 족히 돼 보이는 파리들의 영문모를 주검이 쌓여 있었다. 


항구에는 종잇장처럼 구겨진 자동차 수백대가 몇 겹으로 포개진 채 쌓여 있었다. ‘자동차 무덤’ 너머 보이는 바다 맞은편 야산은 눈과 안개로 뒤덮여 한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빚어내고 있는 광경이 이채롭게 느껴졌다. 시내 곳곳에는 쓰나미로 육지까지 올라온 배들이 아직도 치워지지 않은 채로 방치돼 있었다. ‘상어박물관’ 앞 공터에도 소형어선이 바닥을 드러낸 채 눈을 맞고 있었다. 

바다로부터 고지대 쪽으로 향하는 도로 곳곳에는 지진으로 밑동이 무너져 기울어진 건물들, 허리가 꺾인 가로등이 1년 전 참상을 증언했다. 시시오리(鹿析)에는 쓰나미에 떠밀려온 60m 길이의 거대한 ‘제18교토쿠마루(共德丸)호’가 게센누마시의 상징물로 자리잡고 있다. 게센누마시가 “사진을 찍을 때 희생자와 피해자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라는 글귀가 쓰인 입간판을 세워놓을 정도다. 이곳 명물인 ‘상어지느러미 라면’을 파는 식당 주인은 “건물 1층 내부만 수리해 영업을 하고 있을 뿐 2층은 아직 복구가 안돼 가설주택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게 안에는 쓰나미 피해 직후 건물쓰레기가 가게 앞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당시와 비교하면 가게라도 열 수 있는 것이 다행인 셈이다.

게센누마에서 해안을 따라 45번 국도를 타고 30분쯤 북진해 닿은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시 중심부는 철근 콘트리트로 지어진 쇼핑센터와 시청 등 여남은 채의 건물들이 뼈대와 지붕만 간신히 유지한 채 버티고 있을 뿐 시가지가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쓸려나갔다. 쓰나미는 시가지를 넘어 임야 부분까지 타고 올라오며 185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년 전 쓰나미로 인명피해가 컸던 곳은 해안에 가까운 지역이 아니라 고지대와 해안의 중간지대였다. 요네사키(米崎)가설주택에 사는 사토 가즈오(佐藤一男·46·어업)의 집도 해안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가족 7명이 전원 무사했다. 사토는 “50년 전에 쓰나미를 겪은 바 있어 해안가는 언제든 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 덕분에 인명피해가 적었다”고 말했다.


해안가에 수백년 된 소나무 7만여그루가 장관을 이루던 다카타마쓰바라(高田松原)는 용케 살아남아 ‘기적의 소나무’로 불리는 한 그루만 빼고 모두 쓸려 내려갔다. 소나무로부터 30m 정도 되는 거리에 바다가 있었다. 거친 숨소리 같은 파도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자 1년 전의 참상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리쿠젠타카타시의 해안부에 있는 '기적의 소나무'/by 서의동


시가지가 있던 곳에는 건물 면적을 가늠할 정도의 기초부분만 남아 있었고, 잡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아직도 쓰레기 사이에 먹이가 남아 있는지 까마귀들이 날아다녔다. 차의 내비게이션이 엉뚱하게 대지진 이전의 장소를 안내해주는 바람에 시청을 찾는 데 한참 헤매야 했다. 새로운 주소를 전화로 확인해 시외곽 고지대에 가설로 지은 청사를 찾을 수 있었다. 시청으로 향하는 곳곳에는 가설주택이 들어서 있었고, 시 중심부에 있던 편의점, 각종 상가도 고지대의 공터에서 가건물을 지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지진과 쓰나미 이후 1년간 도호쿠 지방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간바루(열심히 한다는 뜻의 일본어)’했다. 오후나토 시내 사무실에서 만난 지역신문의 한 기자는 “해안가로부터 비교적 떨어져 있던 신문사 건물이 2층까지 침수되며 모든 집기가 쓸려가 버렸다”며 “내륙지역에 임시 사무소를 차려 숙식을 같이하며 새벽 6시부터 취재를 다녔다”고 회상했다. 직원 295명 중 68명이 숨진 리쿠젠타카타시의 구보타 다카시(久保田崇·35) 부시장은 “용케 살아남은 직원들도 가족이나 친척을 잃은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흥은커녕 복구전망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다. 리쿠젠타카타시의 경우 해안가 시가지 복구를 위해서는 먼저 해안에 높이 12.5m의 제방을 수㎞ 길이로 쌓아야 하는데 최소 5년은 걸린다. 고지대의 임야를 사들여 평지로 다듬은 뒤 주택을 지어 가설주택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도 역시 5년은 잡아야 한다. 늘 습기가 차 있고, 옆집 이야기 소리까지 다 들리는 불편하고 비좁은 가설주택의 주민들은 앞으로도 4년은 더 참고 견뎌야 한다. 농업·임업·수산업 외 이렇다 할 산업기반이 없는 리쿠젠타카타의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하러 고향을 등지고 있다. 고령화율이 35%로 전국 최고수준인 이곳의 사정을 감안하면 과연 부흥동력이 생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주민 오카모토 신스케(岡本新助·56)는 “언론들은 새로 상점이 영업을 재개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도호쿠 지방이 빠르게 복구되고 있는 양 유도하고 있지만 복구는 턱도 없는 소리”라며 “복구·부흥 전망은 보이지도 않는데 세간의 관심이 멀어져 가는 게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자치회장 사토 가즈오씨 인터뷰 



사토가즈오씨

“4조반(2평)도 안되는 방에 5명이 자야 합니다. 방과 욕실·주방이 제대로 차단되지 않아 습기가 그대로 전해지면 천정에 물방울이 굅니다. 다 큰 여고생이나 20대 젊은 여성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늘 부모와 함께 자야하는 생활도 견디기 힘든 것이죠.”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시 요네사키(米崎) 가설주택 자치회장을 맡고 있는 사토 가즈오(佐藤一男·46·사진)는 지난 5일 자치회 사무실에서 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가설주택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다다미 4조반 크기가 대부분인데 보통 주택과 달리 수납공간이 없어 실제 생활공간은 3조반에 불과하다. 

 비좁은 공간에서의 생활이 스트레스의 1차 원인이 된다. 게다가 옆집 주민의 목소리까지 다 들려 사생활 보장이 전혀 안되는 것도 문제다. 이 생활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 또다른 고통이다. 사토 회장은 “토지 매입문제 등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만 행정당국이 주민들에게 진척상황을 속시원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으니 주민들의 불만이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리쿠젠타카타시의 가설주택/by서의동

 사토 회장은 지진 이후 일본 국내는 물론 스위스, 오스트레일리아, 한국, 대만, 중국 등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모포, 옷, 음식 등 현물지원이 점차 맛사지 자원봉사 등의 서비스 지원으로 바뀌었고, 수예 교습 등을 통해 피해 주민들 간 커뮤니티가 이뤄질 수 있도록 돕는 형태의 지원으로 다각화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새로운 리쿠젠타카타시의 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안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쓰나미 경보가 발령될 때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해안도로를 봉쇄하고 주민들을 고지대로 대피시키느라 수십명이 희생됐다”며 “사람을 대피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도시구조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토 회장은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기자에게 “대지진 당시 보여준 한국민들의 지원과 격려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