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서 경찰개혁위원장 @정지윤 기자
문재인 정부에서 경찰이 수십년의 적폐를 걷어내고 ‘인권경찰’로 거듭날 수 있을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죽만 울리다 그치곤 하는 행태가 이번에도 되풀이되는 건 아닐까. 민간 전문가 19명으로 구성된 경찰개혁위원회가 한 달여간 논의 끝에 지난 19일 권고안을 발표했다. 경찰의 물대포에 숨진 백남기 농민 사건,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등에 대한 진상조사, 내사 단계부터 변호인 참여권 보장, 영상녹화·진술녹음 의무화, 장기수사 일몰제 도입 등 실현만 된다면 ‘체감 인권’을 높일 획기적인 내용들이 담겼다. 하지만 경찰이 수십년간 쌓아온 ‘악업’을 생각하면, 백남기 농민을 향해 무자비하게 물대포를 직사하던 장면을 떠올린다면, ‘과연 바뀔까’ 하는 회의감은 가시지 않는다.
다만, 경찰개혁위원장을 대한민국 초대 인권대사 박경서(77)가 맡았다는 점은 이런 의구심을 다소 누그러뜨린다. 경찰청 인권위원장으로 있던 2008년 6월 이명박 정부의 폭력적 시위진압에 항의, 사퇴한 그가 경찰개혁의 키를 다시 잡게 된 건 그만한 각오가 섰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박경서는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유엔 인권정책센터 이사장, 유엔 세계인권도시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대한민국 인권의 얼굴이기도 하다.
지난 21일 남산 3호 터널이 보이는 서울 소공로의 카페에서 박경서를 만났다. 박경서는 “지난 촛불시위 때 경찰이 인내하면서 시민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며 ‘개혁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면서 “분위기가 무르익고 제도가 뒷받침하면 경찰도 바뀔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는 검경 수사권 조정에 대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립해서 경찰과 검찰에 각각 주는 것은 두 집단 모두에 이익이 된다”고 강조했다.
■“촛불 보며 경찰 ‘개혁’ 가능성 읽었다”
- 경찰개혁위원회가 내놓은 권고안은 전향적이긴 하지만 ‘과연 되겠느냐’는 의구심은 여전하다.
“경찰들 각오가 대단하다. 한 달 남짓 경찰 간부들, 일선 지구대(파출소)의 경찰들을 면담하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요즘 경찰은 똑똑하고 자부심도 있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을 거고, 처음부터 퍼펙트하게 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고, 차근차근 개선해 나가면 1~2년쯤 지나 정착될 걸로 기대한다. 개혁은 제도와 각오가 맞물려야 이뤄질 수 있다.”
- 주요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했지만 책임자 처벌이 없으면 ‘눈 가리고 아웅’식이 될 거라는 우려도 있다.
“책임자를 가려 처벌할 건 처벌해야 한다고 본다. 이미 대법원 판결까지 난 사건도 (제대로 단죄됐는지) 살펴볼 생각이다. 다만, 고소·고발이 진행 중인 건은 사법부 판단을 지켜볼 것이다. 진상조사의 기본 취지는 앞으로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처벌이 능사가 아니고 더 이상 재발돼서는 안된다는 데 무게를 싣고 싶다.”
- 진상조사위는 언제부터 가동되는가.
“9~10명 규모의 진상조사위를 8월 말쯤 출범시켜 1년가량 활동하도록 할 생각이다. 구성원의 3분의 2를 민간인으로 하되 조사위원이 될 경우 한시 공무원으로 위촉할 거다.”
- 이철성 경찰청장을 유임시켜야 한다는 의견이던데 백남기 농민 사건 때 청와대 치안비서관인 만큼 책임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 의견도 물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개혁위원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 청장에게서 진정성을 느꼈다. 백남기 농민 사건에 대한 사과도 서울대병원 발표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더라. 나더러 ‘좀 나이브한 거 아니냐, 사람이 좋아서 그런 거 아니냐’고들 하는데 그런 건 아니다. 10월21일 경찰의날까지는 전력투구해 개혁안을 제대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 노무현 정부 때 경찰개혁이 추진됐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원점으로 돌아갔고 ‘인권경찰’은 구호로 끝났다. 시위 때마다 불법채증에 차벽설치, 통행제한 등 시위를 원천봉쇄했다. 경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씻겨질 수 있을까.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경찰이 스스로 그런 결정을 했을까. 경찰에만 돌을 던지는 것은 온당치 않고, 권력의 시녀로 만든 국가권력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반대로 지난겨울 촛불 국면에서는 경찰이 수백만의 시민들과 함께했다. 시위 참가자 일부가 경찰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인내했다. 경찰개혁위원장을 맡은 것도 촛불시위에서 ‘경찰의 (개혁)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국제회의에 가보면 촛불집회가 온통 화제인데 한국 경찰이 보여준 인내에 놀랍다는 반응이 많다. 파키스탄이나 인도 사람들은 ‘우리 경찰은 무조건 쏴버린다’고 하더라.”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권력이 아노미 상태가 되다보니 경찰도 결국은 국민의 뜻에 따라가는 식이 됐던 거 아닌가.
“그걸 바꿔 말하면 분위기와 여건이 무르익고 제도가 정착되면 경찰은 거듭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셈 아닐까?”
- 어느 인터뷰에서 경찰대학은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했던데.
“내 의견이 아니라 위원들 중에 그런 의견이 있다는 걸 전한 거다. 경찰이 되는 코스로 경찰대학이나 간부후보생이 돼 경위로 바로 임명되는 길이 있다. 나머지는 순경부터 올라간다. 이철성 청장은 순경부터 시작했다. 경찰대학 출신들이 엘리트 집단인데 경찰대학을 나온 사람들 중 20%가량이 로스쿨에 갔다가 경감이 돼 돌아오거나 아예 변호사로 빠진다. 이렇게 되면 경찰 간부를 양성한다는 본래 목적이 흔들리게 된다. 선진국의 경찰은 순경부터 시작해 잘하면 특진해서 간부가 된다. 지금은 경찰학과가 있는 대학이 100곳이 넘고, 경찰대학과 배우는 내용이 크게 다를 게 없는데도 한쪽은 간부(경위)로, 다른 쪽은 말단(순경)으로 시작하는 것은 형평에도 안 맞는다. 어떻게 할 건지 장기과제로 다뤄볼 생각이다.”
@정지윤 기자
■“수사권 조정, 검찰 보호에도 도움”
- 경찰이 인권개혁 노력을 하겠다는 건 수사권을 쥐려는 명분 쌓기 아닌가.
“그건 아니다. 시대정신에 맞춰 인권경찰로 거듭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걸 위해 개혁위가 꾸려진 것이다. 경찰 수사권 독립하려고 위원회가 만들어졌다고? 그런 말 들을 거면 (개혁위원) 19명 전원 사퇴해버릴 거다.”
- 최근 청와대가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를 보면 경찰 수사권 독립 문제는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어정쩡하게 표현돼 있더라.
“경찰이 인권경찰로 거듭나면 수사권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경찰이 수사권을 가지려면 헌법을 바꿔야 한다. 수사권을 경찰이 갖되 검찰이 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해 직접 수사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을 모두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형사소송법도 바꾸려면 갈 길이 머니 100대 국정과제에서는 ‘열어둔 표현’으로 정리한 것 같다.”
- 큰 그림은 어쨌건 검찰과 경찰,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가 각기 독립해 견제도 할 수 있도록 하는 식인가.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립해서 경찰과 검찰에 각각 주는 것은 두 집단 모두에 이익이 된다. 수사권을 경찰에 주는 것은 검찰을 보호하고, 국민이 더 신임하도록 만드는 장치다. 검찰이 잘못한 걸 검찰이 조사하면 국민이 웃어버린다. 검찰은 집단에 대한 보호막은 상대방이 쳐줄 때 더 튼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경찰들 아직 수준 이하’라는 식으로 반응하며 스스로 보호막을 치려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대부분이 하고 있는데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
하지만 지난 24일 검찰총장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문무일 총장의 답변을 보면 ‘경찰 수사권 독립’은 험로를 걷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문 총장은 검경 수사권 조정이 되더라도 검찰의 직접수사와 특별수사 기능은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사형제·보안법 폐지, 군 대체복무 도입 등 인권 과제 많다”
박경서는 서울대 교수 시절인 197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른 것을 계기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났다. 스위스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18년간 아시아 국장을 지내며 유엔, 국제적십자사 등과 함께 인권 현장을 누볐다. 1988년부터 1999년까지 북한을 28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도 만났다. 수십년간 대면해온 인권에 관한 그의 생각은 의외로 소박하다. “내가 정직하게 살아가는 지침이 인권이고, 사람들이 웃으면서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게 인권신장이다.”
- 인권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
“스위스 같은 나라들은 소득이 우리보다 훨씬 높지만 사는 걸 보면 1만~1만5000달러 수준이다. 우리는 소득은 2만7000달러 안팎인데 사는 건 5만~6만달러 수준이다. 어떻게 거품을 빼고 살아가도록 할 것인가가 새로운 시대정신이다. 인권이 별 게 아니다. 사람들이 정직하게, 웃으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인권이다. 내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상대방의 권리를 먼저 살피는 것도 인권이다.”
- 인권 수준을 높이기 위해선 바꿔야 할 게 아직도 많은 것 같다.
“사형제도도 1997년 이후 집행을 안 한 걸로 버티고는 있지만 한국이 언제 사형제를 폐지할 것인지 국제사회는 묻고 있다.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대만은 이미 2000년부터 대체복무제를 도입했다. 곧 집총거부 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이런 문제도 대비해야 한다. 인권은 미래사회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한국이 1996년 OECD에 들어갔지만 20년이 지나도록 투명성, 공정성 면에서 꼴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어느 인터뷰를 보니 ‘1등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릴 때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검찰의 예에서 보듯 시험으로 결정된 엘리트 집단들이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이야기한다. ‘세계에 200개 국가가 있는데 한국은 미국, 일본, 중국 정도만 외국으로 친다. 너희들은 200개의 나라 각각에서 좋은 점 나쁜 점을 고를 줄 알아야 한다. 미국이 1등도 아니고 좋은 나라도 아니다. (유학하려거든) 아이비리그 가려 하지 말고 유럽으로 가라. 유럽에선 졸업만 있지 등수를 매기지 않는다’고. 어느 여고 앞을 지나다 ‘스카이’ 대학 합격자 18명 명단을 현수막으로 걸어놨길래 들어가 따졌다. ‘여기 졸업생이 360명인데 그 18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2등부터 꼴찌는 바보란 말이냐.”
@정지윤 기자
- 국제기구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북한에도 자주 다녔던데.
“WCC 아시아 국장 시절 ‘당신은 예외적으로 북한에 가도 좋다’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특별 허가를 받았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하던 시절엔 4300만달러어치의 무상원조를 해줬다. 2015년 10월 박근혜 정부의 방북 허가를 얻어 16년 만에 7박8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각지를 돌아봤는데 배고픔에서 벗어났고, 나름의 시장경제가 작동하는 듯 보였다. 평양, 원산, 해주, 사리원 같은 도시에서는 중산층도 생겼다. 평양은 저녁 6시만 되면 교통정체가 생길 정도다. 예전엔 빌딩 엘리베이터가 불량해 10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간 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지금은 1층부터 바로 올라간다.”
- 대북정책 틀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원조해 주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평화론’으로 가야 한다.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를 배울 필요가 있다. 빌리 브란트는 ‘평화가 전부는 아니지만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며 동방정책을 폈고, 처음엔 반대하던 미국·영국·프랑스를 설득시켰다. 트럼프, 아베, 시진핑에 둘러싸여 문재인 정부의 운신의 폭이 좁으니 교황청, 국제적십자사, WCC 등이 외곽에서 지원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1.5트랙을 활성화시키는 거다.”
- 주변국들의 움직임을 보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중국 군인 사상자 200만명을 포함해 450만명이 죽거나 다친 비극인데 상황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주변 4강은 현상유지를 바라지만 우리는 뚫고 나가야 한다. 이런 거 하려는데 언론도, 정치인들도 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72년간 분단 피곤증에 시달리고 있고, 예산의 15%가량이 국방비로 빠져나간다. 이제는 좀 다르게 해보라는 게 촛불 들고나온 이들의 염원이다.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진 정치인들이 나와야 한다.”
- 청년들은 한국을 ‘헬조선’이라 한다. 격차는 확대되고 기득권은 관용정신이 없다.
“하나의 대안모델이 사회적기업 협동조합이다. ‘국수나무’ ‘도쿄스테이크’ 등을 운영하는 외식 프랜차이즈 업체인데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해피브릿지’(HB)란 곳이 있다. 거기 송인창 이사장이 나에게 스페인 노동자협동조합인 몬드라곤협동조합그룹과 협력을 하는데 도와달라고 해서 HBM협동조합경영연구소의 이사장을 맡게 됐다.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주성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는 사회적기업 협동조합이 늘어나면 청년들이 조금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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