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15. 14:57

 

미 해군  존 C. 스테니스 항공모함(왼쪽)과 영국의 인빈시블급인 일러스트리어스 항공모함. 출처 위키백과 

2차 재난지원금이 선별지급으로 낙착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 모두에게 지급하자는 의견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재정상 어려움이 크다면서 한정된 재원으로 효과를 극대화하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다. 재정 형편은 현실적인 이유다. 코로나19 위기 이후 재정지출이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세수는 제자리걸음이어서 내년에도 적자살림이다. 허리끈을 조이자는 설명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하지만 정부가 군비에 뭉텅이로 돈을 쏟아붓는 걸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정부는 지난달 국방중기계획에서 향후 5년간 방위력 개선에 100조원을 포함해 301조원의 국방비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규모도 천문학적이지만, ()항공모함과 극초음속 미사일, 북한 장사정 포탄 요격용 아이언돔 등 타당성과 현실성이 떨어지는 무기 도입에까지 돈을 쓰겠다는 데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항공모함은 원거리 전쟁 때 군용기의 해상 출격기지 노릇을 한다. 미국이 항모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것은 태평양·대서양 너머 유라시아에서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다. 한국은 원거리 전쟁을 할 일이 없는 데다 영해 면적도 작다. 한반도의 좁고 길쭉한 지형 자체가 불침항모(不沈航母)’. 갑판 격인 내륙 기지에서 전투기가 출격하면 된다. F-35A의 경우 작전 반경이 1100로 북한뿐 아니라 일본, 중국까지 커버할 수 있다. 일본도 경항모 도입을 추진하니 우리도 하자는 논리는 호소력은 있을지 몰라도 설득력은 약하다. 일본은 센카쿠열도를 포함한 동중국해, 도쿄 남쪽 1700에 있는 오키노도리시마를 포함한 태평양에 걸쳐 영해가 꽤나 넓다.

 

경항모 건조와 함재기 구입에만 1척당 5조원이 들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적의 유도탄 공격에서 항모를 보호하는 이지스함을 비롯해 구축함, 잠수함 등을 갖춰야 한다. 1개 전단을 구성하는 데 적어도 12조원, 운영유지비를 포함하면 30~40조원에 달할 거라는 추정이 나온다. 3면이 바다이니 1척만으로 끝날지도 의문이다. 군은 경항모 도입에 대해 초국가·비군사적 위협을 포함한 전방위 위협에 대응하고 한반도 인근 해역과 해상교통로를 보호하기 위해라고 했다. ‘초국가·비군사적 위협이라는 설명도 모호하지만, ‘해상교통로 보호라면 남중국해 같은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 한국도 발을 들이겠다는 뜻인지 궁금하다. 보수야당조차 과도한 안보수요’(신원식 국민의힘 의원 825일 국방위 질의)라고 할 정도다.

 

북한의 장사정 포탄을 유도탄으로 방어하겠다는 아이언돔 구상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비정규전 부대의 산발적인 로켓탄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이스라엘에서 개발된 무기체계인데, 수백기에 달하는 북한의 장사정포에서 강철비처럼 쏟아지는 포탄을 어떤 한국형 신기술로 막아낼지 의문이다. 더구나 주택 공급을 위해 태릉골프장을 헐어야 할 처지인데 사격통제센터와 탐지레이더, 유도탄 발사대, 통신소 등이 한꺼번에 들어갈 포대 부지를 서울에서 확보할 수 있을까. 음속보다 5배나 빠르다는 극초음속 미사일도 북한 위협 대비용이라면 과잉투자고, 그렇지 않다면 주변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뿐이다. 이런 과잉투자라도 해서 전시작전통제권을 되찾아올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차질이 생기면서 전작권 반환 과제는 차기 정부로 사실상 넘어간 상태다.

 

과도한 군비증강은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북한 비핵화를 저해할 수 있다. 신형 무기체계 도입으로 한국은 의도치 않게 미국의 불침항모노릇을 할 공산도 커진다. 반중전선에 발을 들이게 되면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온 외교전략이 차질을 빚게 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청와대가 왜 군비증강의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지 요령부득이다.

 

전쟁 위협을 줄이고 북한과 단계적 군축을 하겠다던 정부의 초심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여의치 않자 ‘5대 군사강국업적쌓기로 방향을 바꾼 것인가. 진보정부가 안보에 소홀하다는 비판을 듣지 않으려 군비증강에 열심이고, 보수야당도 크게 제동을 걸지 않아 군비가 부풀어 오르는 폐단이 이번 정부에서 두드러진다.

 

선별지원을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토록 재정 형편을 우려하는 정부가 군비증강에 한없이 관대한 이 상황이 과연 정상인지는 의문이다. 두뇌(전작권) 없이 덩치만 키워봐야 헛일인데도 대중의 열광에 기대 자주국방신화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열광의 뒤안길에서 스러져가는 민생은 어찌할 건가.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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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5. 14:54

이승만 정부의 토지개혁은 불꽃이 튀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화약통’ ”(미 군정 정치고문 배닝호프) 같던 한국 사회를 진정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농림부 장관에 사회주의자 조봉암을 파격 기용했고, 조봉암은 당시 정부가 용인 가능한 가장 급진적인 인물로 토지개혁팀을 구성했다. 농림부의 초안은 지주세력이 중심이던 민국당의 반발로 좌초했지만 이승만은 전국 각지에서 청문회를 개최하는 등 대중동원 선풍을 일으키며 지주들을 압박했고, 개혁은 모처럼 언론과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추진됐다.

 

인구의 70%가 농민이고 그중 80%가 소작인이던 당시 남한에서 토지문제는 가장 정치적인 의제였다. 토지개혁이 이승만 정부가 사회에 침투하고 지지를 이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는 평가(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는 이후 농민은 (한국의) 강력한 안정요소라는 무초 주한 미대사의 보고로 뒷받침된다. 개혁의 완료시점 등은 좀 더 규명이 필요하지만, 민심과 거리가 멀었던 이승만이 토지개혁만큼은 열의를 보이면서 신생 한국은 위기를 넘기고 발전의 토대를 확보했다. 학자들은 1960~70년대 한국 고도성장의 주요 배경으로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실현한 토지개혁을 꼽는다. 높은 소작료 부담이 사라지면서 농민들의 삶이 안정됐고, 교육 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지면서 개천에서 용이 나기시작했다.

 

40년 뒤 노태우 정부가 시도한 토지개혁은 미완에 그쳤다.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으로 시중 자금이 몰리며 땅값이 폭등하자 서민 불만은 임계점으로 치달았다.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으로 기층 세력이 성장한데다 총선 참패로 정국 주도권이 약화된 노태우 정부는 개혁하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난다”(문희갑 당시 경제수석)고 여길 정도로 절박했다. 택지소유상한법, 토지초과이득세법, 개발이익환수법 등 토지공개념 3이 만들어졌고,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 매각 조치가 발동됐다. 하지만 토지공개념은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힘이 빠지더니 노무현 정부의 종합부동산세 정책으로 일부 계승되는 듯하다 보수정권 들어 폐기됐다. 이후 부동산은 성장률에 민감한 정권의 경기부양 수단으로 동원되면서 불가사리로 자라났다.

 

2020년 한국은 해방 후 지주-소작제가 부활한 듯한 형국이다. 문재인 정부 3년간 서울 주택가격은 34%가 올랐고, 아파트는 52% 상승했다. 직장인이 20년치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서울에서 가장 싼 아파트조차 살 수 없다. 반면 임대사업자들은 세금특혜까지 받아가며 수백채씩 집을 사들였다. 세입자들은 많게는 수입의 절반 이상을 주거비용으로 내야 하는 소작농신세다. 의욕적으로 창업한 청년들이 임대료에 채어 넘어지니, 학생들이 지주(건물주)를 꿈꾸는 것도 말리기 어렵다. 한때 노동의욕과 창의력, 기업가 정신이 이끌던 한국 자본주의는 건강을 잃었다. 토지모순을 해소하지 못하면 한국 자본주의의 엔진은 꺼져 버릴지 모른다. 코로나19 이후 뉴노멀 시대를 돌파하기 위해 정부는 한국판 뉴딜을 내놨지만, 더 시급한 것은 2차 토지개혁이다. 뒤늦게나마 정부·여당이 부동산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개혁은 좀 더 전복(顚覆)적이고, 전면적이어야 한다.

 

해법들은 이미 나와 있다. 다주택 소유를 규제해 처분토록 하면 공급부족은 간단히 풀린다. 하승수는 “3주택 소유자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내에 처분하게 하고, 이후 국가가 사들이자고 제안한다.(<배를 돌려라-대한민국 대전환>)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국민연금기금에 매각해 마련한 재원으로 다주택자들이 처분한 집을 사들이는 방안도 있다. 이를 장기 공공임대주택으로 돌리면 서민 주거안정도 꾀할 수 있고, 국민연금기금도 월 임대료로 안정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으니 주식투자보다 낫다. 종합부동산세는 전국 토지를 용도 구분 없이 과세하는 국토보유세로 강화하고, 이 세금은 공공임대주택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유력해 보인다.

 

이승만이 조봉암과 손을 잡고 지주세력을 고립시키며 농민 편향의 토지개혁을 밀어붙인 것이나, 노태우가 토지공개념을 강행한 이유는 정권 안위가 컸을 테지만, 그 결과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그러므로 ()시장적이니 편가르기니 하는 비판은 귀담아듣지 않아도 된다. 보수세력들이 국부(國父)로 숭앙하는 이승만도 토지개혁 당시 반시장적이었고, 편가르기의 귀재였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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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5. 14:51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장면 출처 조선중앙통신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북한의 불만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 폭파로 이어진 6월의 격동은 남북관계의 흑역사로 남게 됐다. 그 바람에 한국전쟁 70의 현재적 의미를 차분히 성찰할 기회도 사라졌다. 그렇다 해도 지난 한 달간 북한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를 짚어보는 일마저 생략해선 안 된다.

 

 4·27 판문점선언은 21항에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지 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 행위들을 중지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는 애초부터 지켜질 가능성이 낮은 거품조항이었다. 반북주의가 뿌리 깊은 한국 사회에서 대북전단 규제는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재개 이상으로 풀기 힘든 난제이기 때문이다.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재개가 안 되는 것은 미국 탓이라도 할 수 있지만, 전단 규제는 한국 정부의 역량과 의지, 여론 설득 능력과 직결돼 변명의 여지도 없다. 대북전단은 북한에 대한 극도의 증오와 저주를 담고 있고, 음란비디오 표지에 최고지도자 부인 얼굴을 합성하는 따위의 저속한 지라시도 있다. 규제가 마땅한 헤이트 스피치’(증오표현)의 일종이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허울 아래 보호돼 왔다. 북한에 대해서라면 명예훼손도, 거짓말도 용서되는 반북무죄사회이니 대수로울 것도 없다.

 

하지만 판문점선언 이후 북한은 남측의 이행 여부를 주시했을 것이다. 민간이 하는 일을 규제할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도, 남측이 남북화해를 제도화할 의지가 있다면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낼 것으로 기대했을 법하다. 하지만 판문점선언 이후 64일 김여정 담화 이전까지 대북전단이 한국 사회의 주요 현안이 된 적은 없었다. 탈북민단체들은 버젓이 전단을 살포했고, 정부·여당의 입법 노력은 없다시피 했다. 자유북한연합은 지난해에만 11차례 대북전단을 날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년 전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아무리 좋은 합의나 글이 발표돼도 이행되지 못하면 기대를 품었던 분들한테 더 낙심을 줄 것이라고 했는데, 말한 그대로였다.

 

거품은 또 있었다. 남북은 판문점선언 32항에서 남과 북은 군사적 긴장이 해소되고 신뢰가 실질적으로 구축되는 데 따라 단계적으로 군축을 실현해 나가기로했다. 9·19 남북군사합의도에서도 단계적 군축을 실현해 나가기로 한 판문점선언을 구현하기 위해 실행 대책들을 협의하기로했다. 군사합의 직후 남북은 접경지역 일대에서 적대 행위를 중단했고, 비무장지대 감시초소를 시범 철수했으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비무장화도 이뤄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2019년 들어 정부가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증강 계획을 내놨고, F-35 스텔스기 등 공격형 첨단무기를 잇따라 들여왔다. 2018년엔 중단한 한·미 연합훈련도 재개했다. 8월 훈련 때는 수복지역에 대한 치안·질서유지’, 즉 북한 점령훈련도 실시됐다. F-35는 레이더에 발각되지 않고 평양 상공까지 침투해 선제타격할 수 있는 무기로 북한의 전투기와 지대공 미사일로는 대응할 수 없다. F-35가 지난해 3월부터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비상이 걸린 북한은 단거리 미사일과 초대형 방사포 개발로 맞대응했다. 이쯤 되면 우리를 겨냥한 최신 공격형 무기 반입과 미국, 남조선 합동 군사연습은 군사 분야 합의서에 대한 난폭한 위반이며 도전”(김성 유엔 주재 북한대사)이라는 북한의 비판을 생트집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F-35 도입은 박근혜 정부 때 이뤄진 계약이어서 어쩔 수 없고, 국방비 증액도 전시작전권 전환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정부는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됐건 군사적 긴장해소와 신뢰구축을 거쳐 단계적 군축으로 나아가자는 합의의 취지와 어긋나는 건 분명하다. 군사적 신뢰구축과 전작권 전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는 두 마리 토끼. 전작권 전환을 임기 중 달성하려 했다면 남북군사합의를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1990년대 이후 남북 간에는 적지 않은 합의들이 도출됐지만 이행된 것은 드물다. ·미관계의 부침에 따른 북한의 태도 변화, 5년마다 정권이 바뀌는 한국의 권력구조 등이 장애물일 것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검토해야 할 사안들까지 일단 내놓고 보는 단기 성과주의가 대북정책에서도 작동한 흔적이 엿보인다. 어찌됐건 지금대로라면 판문점선언, 9·19 군사합의도 부도수표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부도 위기에 놓인 합의를 살려내기 위한 실행계획을 짜는 것이다. 남북관계 복원, ·미 대화 중재는 그다음 일이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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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5. 14:48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식 

미국이 코로나19 이후의 국제 질서를 미·중 신냉전 구도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원맨쇼가 아니다. 미국 백악관과 국방부가 지난 21일 의회에 제출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보고서는 미·중 갈등이 미·소 냉전기 이상으로 장기화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1979년 미·중관계 정상화 이후 40년간 중국의 발전이 미국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났다는 대목에서 미·중관계를 송두리째 부정하고픈 미국 집권세력의 인식이 드러난다. 굴기하는 중국을 냉전시대 ()의 장막안으로 되몰아 봉인하겠다는 기세다. 미국의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중국봉쇄 기조는 큰 변화가 없을 것 같다.

 

미국은 반중(反中) 대열에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인도 등을 세우겠다고 한다. 가장 시달릴 나라는 당연히 미·중 세력권의 경계에 놓인 한국이다. 미국과 동맹이지만 경제에서 중국 의존도가 큰 한국은 미·중 충돌 때마다 양자택일을 강요당할 것이다. 한국이 참가한 일대일로 사업도 미국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경제에서 중국 비중을 낮춘다 한들 지리적으로 이웃한 중국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충돌이 임계치를 넘어서면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 외교정책의 주요 목표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및 평화체제 구축이다. 그런데 북핵문제의 해결은 미·중 패권경쟁하에서는 더 요원해질 것이다. 지난 3년간 문재인 정부가 북·미 비핵화 협상을 위해 진력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외교 목표에 북핵문제가 들어 있는 한 우리 운명을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워지는 셈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 문 대통령은 올 초 북·미 협상과 별개로 남북협력을 증진시키겠다고 했다. 북핵과 남북평화를 분리하겠다는 결단이다. 통일부는 5·24 조치의 실효(失效)를 확인했고, 북한 사람을 만날 때 신고하지 않아도 되도록 법을 바꾸기로 했다. 전향적 조치들이지만, 이 참에 남북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규정하는 작업도 필요해 보인다.

 

남북은 1991년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다. 이 규정은 남북이 결국 하나가 돼야 한다는 이상을 담았을 뿐, 상대방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남북 쌍방이 별개 국가라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는 과정이 생략된 것은 남북문제의 과잉 정치화를 유발했다.

 

이런 지적이 타당하다면 이제 ‘1민족 2국가 체제를 인정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남북이 동·서독처럼 상호체제 인정, 내정 불간섭, 불가침 등을 담은 기본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종전선언도 미·중을 기다릴 것 없이 남북이 먼저 하면 된다. 조약에 이어 서로를 적대시하는 제도와 규정들을 철폐하면 남북의 갈라서기는 마무리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고 공존하게 되면, 한국의 운신의 폭도 넓어진다. 남북 간 충돌위험이 감소하면 미국과 방위비 분담금 때문에 옥신각신할 일도, 값비싼 첨단무기를 과잉구매해야 하는 부담도 줄어든다. 북한을 유격대 국가라고 비판하지만, 한국도 과도한 군비 탓에 사회보장 지출을 늘리기 힘든 비정상국가가 아닌가. 북한 지도자의 부재에 온 나라가 뒤집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물론, ‘한 민족이 두 나라가 되는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 탓에 저항감이 클 것이다. 하지만 별개 국가로 갈라섬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정념의 거품이 걷힌다면 교류협력에 대한 부담감도 줄어들 것이다. 통일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사실상의 통일로 나아갈 길이 열릴 수 있다. ·미 협상도 당분간은 당사자들에게 맡겨두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한 달 뒤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된다. 남북은 1949년부터 38선 일대에서 수천명의 남북군인이 중화기를 동원한 작은 전쟁을 치르며 전면전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2차 세계대전 후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된 오스트리아가 통일독립을 달성한 것과 대조적인 과정이다. 국제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지만, 결국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남북 내부의 동학(動學)이었다. 이는 거꾸로 한반도 평화도 남북 내부의 동학에 의해 상당 부분 달성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 동학은 서로의 실체를 쿨하게 인정하는 데서 탄력이 생길 것이다. 70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도 남북의 갈라서기는 필요하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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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5. 14:42

출처 에큐매니안 닷컴 

지난주 벌어진 일 중에서 총선 결과보다도 더 눈길을 끈 것은 국회에 제출된 2차 추가경정예산 내역이다.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국방비에서 9000억원을 삭감하기로 한 것이다. F-35A 스텔스 전투기, 해상작전헬기 같은 미국산 첨단무기 구매 예산을 깎겠다는 발표에 구약성서의 한 구절을 떠올린 이도 있었을 것 같다. “칼을 쳐서 보습(쟁기의 날)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미가서 43)

 

부활절인 지난 12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19로 텅 빈 바티칸 광장에서 강론했다. “전쟁은 더 이상 안됩니다. 무기 생산과 거래를 중단해야 합니다. 지금은 총이 아니라 빵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이 메시지가 나흘 뒤 군사력 밀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한반도에서 실현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부가 무기 구매 예산을 줄이기로 한 결정에는 여러 가지 배경과 사정이 있을 것이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몽니를 부리는 미국을 향한 대응 성격도 있을 법하다. 국방부가 삭감 방침에 괜찮다고 하는 걸 보면 애초 국방예산에 거품이 끼어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21세기의 유일한 냉전지대 한반도에서 총을 빵과 바꾸는이적(異跡)이 일어난 것만으로도 가슴 뛸 일이다. 어차피 F-35A 전투기는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하는 데는 뛰어난 전쟁신()’이지만, 바이러스와 싸우는 데는 무용지물 아닌가.

 

바이러스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냈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국경이 봉쇄되고 사람들이 활동을 줄이면서 대기오염이 가스실 수준이라는 인도 뉴델리의 하늘 색깔이 쪽빛으로 바뀌었다. 과학자들은 27개국에서 봉쇄 초기 2주 동안 지표면의 이산화질소(NO2) 농도가 평균 29% 감소했고, 초미세먼지(PM2.5)9% 줄어들었다고 분석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인적이 끊긴 해안도로를 바다사자들이 점령했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운하에 물고기 떼가 회귀했다. 인간들이 빼앗은 그들의 땅을 잠시나마 바이러스가 되돌려준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환경파괴를 멈추지 않는 한 인류도 절멸의 위기를 맞을 수 있음을 묵시(默示)한다. 삼림파괴로 숙주들과 인간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 바이러스 창궐 배경임은 알려진 대로다. 삼림파괴 추세가 지금대로라면 제2, 3의 팬데믹이 주기를 앞당겨 인류를 덮칠 것이다. 환경파괴에 따른 기후위기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치닫고 있음은 부연할 것도 없다.

 

전쟁은 환경에 대한 극단적인 테러다. 전쟁은 땅을 오염시키고 삼림을 파괴하고, 바다를 더럽힐 뿐 아니라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만들어낸다. 베트남전쟁에서 살포된 고엽제가 베트남 농토의 40%를 황무지로 만들었고, 밀림의 절반가량을 파괴했다. 코소보에서는 화학공장지대 폭격으로 유출된 기름과 암모니아가 강을 뒤덮었다. 콩고에서는 수천마리의 코끼리가 내전에 희생됐다. 이런 전쟁을 위해 세계가 지출하는 군사비는 30년 전의 2배로 늘었다.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 미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는 22일 현재 44805명에 달한다. 바이러스 창궐 두 달간의 희생자가 한국전쟁 3년간 미군 전사자 수(33686)를 넘어섰다. 국방비는 지속적으로 늘리면서도 보건의료와 복지 투자는 외면해온 미국이 자초한 현실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이런 가치 전도의 세상을 리셋(reset)’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세우지 않는다면 애프터 코로나는 인류 멸절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이 혼돈의 시기에 한국은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민주적인 방식으로 감염병 통제에 성공했다. 선거도 차질 없이 치러내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한국이 애프터 코로나시대의 질서와 규범을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할 자격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은 한반도와 세계적 차원에서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평화는 자연과 인간을 동시에 지키는 일이다. 우선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만드는 일, 즉 군비를 줄여 보건의료와 복지 부문에 돌리는 흐름을 한국이 선도해 갈 것을 희망한다. 한국은 방위력 개선비와 전력유지비 등에서 매년 5조원 이상을 절감할 여력이 있다(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고 한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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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5. 14:37

출처 연합뉴스 

한국은 개방형 통상국가다. 남북 분단과 전쟁이 없었다면 다른 형태의 발전 전략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1960년대 수출입국(立國)으로 방향을 정한 이후 수십년의 세월을 거치며 좋건 싫건 틀이 굳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주요국들과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과격한 형태의 경제협정을 체결하면서 시스템을 한껏 열어젖혔다.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세계화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올라탄 것이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이 고착화되고 보호무역주의가 대두하면서 이 전략에 물음표가 붙고 있다.

 

이런 한국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몇 겹의 충격을 받아야 하는 것은 개방형 통상국가로서 갖는 숙명이다. 통상국가는 물자와 사람이 자유롭게 오가야 기회가 생기지만, 접촉에 의해 확산되는 감염병은 이를 차단한다. 전 지구적으로 구축된 연결 회로를 타고 번지는 감염병은 한국엔 치명적인 도전이다.

 

감염병이 발생하면 대개의 정부는 입국제한이라는 수단부터 동원하게 마련이다. 시민들의 공포 확산을 막고 정권이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손쉬운 선택이지만, 감염병 확산을 일시 지연시킬 뿐 궁극적 대책이 될 수는 없다. 더구나 내수기반이 빈약하고 감염병 이후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개방형 통상국가에서 이런 선택을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가 개방성과 투명성을 유지하면서 감염병 확산을 막아야 하는 험로를 택한 것은 불가피했다. 발원지인 중국발 입국제한논란부터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지만 보수언론과 야당의 집요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개방원칙을 유지한 채 대대적 조기 검사·진료, 동선 추적 등 적극적 방역으로 불길을 잡아가고 있다. 코로나19의 본격 확산 두 달 만에 한국의 방역은 세계 각국이 상찬하는 롤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드라이브 스루선별진료 같은 궁즉통(窮則通)의 지혜도 세계로 확산됐다. 지난 15일 캐나다의 제안으로 열린 6개국 외교장관 전화협의는 한국식 방역모델을 전파하는 자리가 됐다.

 

하지만 돌파해야 할 난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실물경제는 수요·공급 양쪽에서 침체로 향하고 있다. 증시가 대폭락을 거듭하면서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의 복합위기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은 금융시장의 높은 개방성 탓에 대외 충격이 발생하면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리스크를 져야 한다. 외국 자본에는 현금인출기(ATM)나 다름없다. 독일과 프랑스가 국경통제에 나서는 등 각국이 참호를 파고 감염병과의 진지전에 들어갔다. 내수기반이 있는 나라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기동전을 생명으로 하는 통상국가 한국엔 지극히 불리하다. 코로나19를 한국이 먼저 이겨낸다고 해도 각국 간 시차를 감안하면 세계 경제의 회복에는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이다. 세계 경제가 U자형 회복을 하려면 3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엄혹한 세월을 견디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가까스로 코로나19가 물러가도 감염병은 주기적으로 닥쳐올 것이다. 사스(2003), 신종플루(2009), 메르스(2015)6년 간격이었지만 코로나195년 만에 찾아왔다. 2015년 지카바이러스가 삼림파괴로 숙주인 이집트숲모기가 사람과 접촉하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창궐했듯이 세계적인 환경파괴 추세를 고려하면 주기가 더 짧아질 가능성이 크다. 감염병뿐일까? 다음 위기는 기후위기로 인한 식량재앙이 될 수도 있다. 가뭄과 홍수, 슈퍼태풍, 산불과 폭염 등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재앙이 임계점을 넘어설 경우 농산물 수확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10년 러시아의 가뭄에 따른 밀 생산량 급감은 이듬해 중동의 민주화 시위라는 정치격변까지 몰고온 바 있다. 한국은 제조업 상품 수출을 위해 농업을 희생시킨 결과 곡물자급률이 23%에 불과하다. 이런저런 글로벌 충격이 닥칠 때마다 한국은 제1선에 서서 그 충격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코로나19의 태풍이 지나간 뒤 세상 풍경은 꽤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에 한국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성찰하고 반문해야 할 시기도 올 것이다. 세계화의 ()의 효과가 커져가는데도 개방형 통상국가라는 국가전략은 여전히 정답인가. 눈물을 머금고 세계화의 풍상(風霜)에 맞서 전력질주해야 하는 숙명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 내수를 키우고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쪽으로 경제시스템을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답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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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5. 14:33

일본인들은 ‘미즈기와(水際·물가) 대책’으로 불리는 일본 정부의 대응방침에 안심했을 것이다. 해안을 경계로 방어선을 쳐 코로나19의 상륙을 막겠다는 ‘쇄국(鎖國)작전’은 섬나라에 익숙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예전부터 이런 식으로 나라의 안전을 지키고 평화를 누려왔다. 그러나 이런 대처법은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예측불허의 리스크가 커지는 글로벌 시대엔 잘 먹히지 않는다. 더구나 경직된 거버넌스(통치구조)와 결합할 경우 ‘기능부전’에 빠지기 십상이다.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인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 대한 미즈기와 작전은 일본형 시스템의 난맥상을 여실히 드러냈다.
 

프린세스호에 대해 2주간 봉쇄조치를 내렸을 때 아베 신조 정부는 이 배가 거대한 ‘바이러스 배양접시’가 될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았다. 탑승자 3700명을 모두 하선시켜 전수조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아베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대책본부의 ‘매뉴얼’에는 빠졌다. 그렇게 한번 대책의 틀이 짜이다 보니 밀폐된 선내에서 감염이 급속히 번졌는데도 대응은 더뎠다. 초기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보니 대책의 틀을 바꾸지 않는 선에서 찔끔거리다 화를 키운 것이다. 일본 정부가 애초부터 나쁜 마음을 품었을 리는 없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사람의 안전’은 물가 저편에서 실종됐다. 크루즈선 환자는 ‘일본 내 감염자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얄팍한 생각도 일을 그르치게 했다. 아베 총리의 최대 관심사는 도쿄 올림픽이 영향받지 않도록 ‘일본 내 감염자 수’를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크루즈선 사태는 나라가 1000명이 넘는 자국민의 안전을 팽개치는 ‘기민(棄民)’사태로 확대됐다. 급기야 각국 정부가 비행기를 띄워 자국민 구출에 나서고, 올림픽을 5개월 앞둔 일본은 ‘방역 후진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그간 일본의 ‘미즈기와 대책’은 반드시 ‘기민’을 동반하곤 했다. 경제의 거품이 꺼진 뒤 2000년대 빈곤층이 급증하자 일본 정부는 생활보호 신청자가 급증하지 않도록 신청 단계에서 막았다. 노모의 치매를 돌보느라 파견사원 일을 그만둔 54세 남성이 생활보호를 받기 위해 2005년 7~8월 세차례나 교토시 복지사무소를 찾아갔으나 핀잔만 받았다. 막다른 처지에 몰린 남성이 노모를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비극을 불렀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1년도 채 안돼 일본 정부는 피폭 우려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을 귀환시키기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 후쿠시마현 전체를 방사선관리구역으로 지정하고 ‘무인지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은 묵살됐다. 거슬러 올라가면 1950년대 미나마타병 사태 때도 일본 정부는 줄곧 기업편을 들다가 10년이 지나서야 공장폐수가 원인임을 인정했다. 위기 때마다 정부는 방어선을 치고, 약자들을 그 너머에 내다 버렸던 것이다.
 

전후 경제성장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형 시스템과 매뉴얼은 정밀함에선 세계적 수준이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은 빈약했다. 1990년대 이후 글로벌 시대의 다양한 위험과 도전들을 감당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호황기의 풍요함에 가려진 시스템의 결함이 헤이세이(1989~2019년) 30년간 표면화되면서 일본은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물론 전환의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1980년대 말 여성 대표 도이 다카코가 국민적 인기를 얻었을 당시 사회당이 노동조합에 의존하던 체질에서 벗어나 젠더와 지역, 세대 등으로 영역을 넓혔더라면 일본 정치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탈원전’의 열망을 지렛대로, 일본을 안전·여성·생태의 가치를 중시하는 나라로 바꿔나갈 기회도 있었다. 이런 찬스들을 놓치면서 일본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감수성을 키우지 못한 채 ‘열화(劣化)’해갔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일본 내 여론조사에서 70%가 승객들을 하선시키지 말라고 응답했다는 점이다. 이번 사태를 승객의 ‘자기책임’으로 돌리는 풍조는 일본 정부의 ‘기민’적 태도가 사람들에 내면화됐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일본은 예전 우리가 알던 선진국에서 ‘위험사회’로 퇴행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한국 정부의 대응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6년 전 벌어진 세월호 참사가 그랬듯 ‘미즈기와’와 ‘기민’은 한국에서도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하루 2~3명꼴로 사람이 산재로 죽어가며, 외국인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 크루즈선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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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1. 21:12

패러글라이딩 도중 토네이도에 휩쓸려 북한 땅에 불시착한 여성 기업인 윤세리와 북한군 장교 리정혁이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한국 드라마의 ‘운동장’을 넓혀 놨다. “일단 못 보던 광경이 풍물지적 흥미를 유발”한다는 평(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대로 북한이라는 금단의 공간을 무대에 편입시킨 것이 우선 득점 포인트다. 북한군 장교, 그것도 군부서열 1위인 인민군 총정치국장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설정도 전무후무하다. 상대는 재벌 2세인 여성 CEO. 남녀 주인공이 남북 체제의 파워집단 출신이라는 배역설정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트집을 잡자면 주인공인 북한군 장교가  지나치게 멋진 것부터 용납 못하겠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불온’해 보이는 드라마가 불시착은커녕 시청률 1위의 고공비행을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북한이란 공간과 분단의 현실을 멜로 판타지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솜씨 있게 활용한 것이 시청자들의 호응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남북 간에 놓인 장벽이다. 그런데 두 남녀는 나중에 장벽을 훌훌 넘어가 버린다. 한국 지형상 일어날 리 없는 거대 토네이도가 여주인공을 북한 땅에 데려다 놓은 것부터 드라마는 철저하게 판타지의 문법을 따라간다. 이 드라마에 국보법 시비를 거는 것은 그러므로 넌센스다.
 

판타지임에도 북한이란 배경화면을 초정밀 재현한 것도 미덕이다. 아랫동네(남한) 상품들이 공공연히 거래되는 장마당, 집마당 한쪽을 파내고 만든 저장고 ‘김치움’, 장시간 정차 중인 열차에 ‘메뚜기 장사꾼’들이 몰려드는 장면, 출연자들의 자연스러운 북한 사투리는 탈북인도 군말하지 않을 만큼 리얼하다. <응답하라 1988>을 재현한 듯한 전방부대 사택마을의 공동생활에서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는 중년들도 있을 것이다. 드라마는 북한 미화라는 우려가 쏙 들어가게 균형도 잘 잡는다. ‘꽃제비’가 등장하고, 전기는 수시로 나간다. 가정집을 숙박 검열하며, 거리에서 김일성 휘장을 달았는지를 불시 검문한다.
 

물론 ‘우리 민족’에 대한 정념(情念)을 안고 보는 이들도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시청자들은 ‘말은 통하지만, 통행할 수는 없는 나라’가 어떻게 그려졌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기까지 하니 일거양득이다. 보수세력들이 아무리 북한의 위협을 공들여 강조해본들, 사람들은 북한을 이국(異國)취미를 만족시킬 ‘레어템’으로 소비할 준비가 돼 있다. 확실히 북한은 희소가치가 있는 ‘미개척 콘텐츠’이다.
 

<사랑의 불시착>의 흥행은 북한 관광에 대한 관심으로도 연결된다. 정부는 올 들어 북한 개별관광에 이례적으로 강한 추진의지를 보이고 있다. 통일부는 관광객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금강산·개성을 방문하는 개별관광, 중국 등 제3국을 경유한 관광 등을 검토 중이다. 어떤 방식이건, 일단 문이 열린다면 가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다. 사람들이 북한 개별관광에 흥미를 보이는 까닭은 <사랑의 불시착>이 인기를 얻는 이유와 동일하다. 그들이 ‘친북’이라서가 아니라, 북한이 식상하지 않은 관광지이기 때문이다.
 

보수진영은 북한 관광이 국제사회의 비핵화 전선을 흐트러뜨릴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고, 늘 그렇듯 미국도 견제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의 대북제재 대상도 아닌 관광조차 정부가 풀지 못한다면 한국이 대북정책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차렷 자세로 미국 말만 듣고 있다간 남북교류는 영영 어려울 수도 있다. 한국인들이 관광을 안 간다고 비핵화가 앞당겨질 정도로 북핵 문제가 쉬운 일도 아니다.
 

“한반도 통일을 평화적으로 이뤄내려면 남과 북의 접촉을 늘리는 방법밖에 없다.”(1월18일 태영호 블로그)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는 북한 관광 자유화를 지지한다면서 “평양시에 배낭을 멘 한국 관광객들이 줄지어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뿌듯해진다”고 했다. 반북인사로 분류되는 그 역시 북한 관광에 찬성한 것은 이채롭지만, 상식적이다. 접촉하지 않으면 바뀔 수 없고, 바뀌지 않으면 통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북통일까지는 몰라도 평화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고, 미국이 깔아놓은 길만 고집할 이유도 없다.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처럼, 윤세리가 북한 땅을 밟은 것은 토네이도라는 기상이변 때문이다. 그런 이변 없이는 이웃나라에 갈 수 없는 현실은 바뀌어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북한 여행을 시작해 보자.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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