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19. 19:42

올해 읽은 세번째 책.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 1964년 작품이다. 올핸 되도록 소설과 역사서를 많이 읽어보려 한다고 주변에 이야길 했더니 한 선배가 추천하며 빌려준 책이다. 

 한국전쟁 직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황해도의 연안지방에 선생님으로 부임한 남지영이 전쟁이 터지면서 피난을 내려와 가족들과 겪는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좌익으로 활동하다 전쟁 때는 인민군, 이후 빨치산이 되는 하기훈의 이야기가 다른 축이다.한국전쟁의 참상을 다룬 책들은 여러권 봤지만 이 책은 에피소드가 넘쳐 당시 상황을 간접체험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주인공 기훈과 인민군 소년병이 인민군 야전병원에서 나누던 대화.

"아니오, 아니오. 어깨 아니구 팔 다쳤으면 비겁자 되거든요. 하긴 동무는 인민군 아니니께."
"......"
소년은 큰 비밀을 털어놓듯 사방을 한번 살피고 나서 
"왼팔 다친 사람 적탄에 맞은 것 아니야요. 지가 지 팔 쏜 거디요."
"지가 지 팔을 쏘아?"
"그냥 쏘믄 몸이 튀니께 뚜꺼운 걸 받쳐가디고 쏘거든요. 그런 사람 많디요. 아주 많디요. 특히 남조선의 의용군 동무에게 많디요. 그렇잖으믄 죽으니께. 낙동강은 그냥 죽으루 가는 거니께."


작자가 많은 취재를 바탕으로 책을 썼다는 느낌이 든다. 했다는 전쟁의 광기, 그 안에서도 간간이 피어나는 인정, 인민군에 참가한 지식계급의 갈등 등이 다뤄진다. 소설속에 자주 등장하는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는 그 속을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극악스러움과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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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0. 26. 20:58
ㆍ절대권력 움켜쥔 ‘1인 천하시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 추천으로 선출한다, 대통령은 국회 해산권과 법관 임면권을 갖는다,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제한을 철폐한다….


1972년 10월27일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유신헌법안의 주요 내용이다. 요즘 같아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권력 집중이다. 한 해 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대통령이 헌법을 고쳐 선거가 필요없는 총통이 되려 한다”고 한 경고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유신헌법안은 헌법의 효력까지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입법·사법·행정권을 장악한 대통령에게는 ‘영도적 국가 원수’라는 지위가 부여됐다.

유신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박정희는 열흘 전인 10월17일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는 내용의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박정희는 이 선언에 의거해 국회를 해산한 뒤 정당 및 정치 활동 중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사령부는 포고령을 내려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은 사전검열을 받도록 하며 대학은 당분간 휴교토록 했다. 반대 목소리를 사전에 봉쇄하는 정지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그후 전문과 12장 126조 및 11조의 부칙으로 된 유신헌법안이 실체를 드러냈다. 정부는 이 유신헌법의 성격을 ‘조국의 평화적 통일 지향, 민주주의 토착화, 실질적인 경제적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자유경제질서 확립, 자유와 평화 수호의 재확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었고, 국민 기본권 침해와 대통령 권한의 극대화를 가능케 한 헌법이라는 점은 명백했다.

비상 국무회의는 특별선언에 의해 해산된 국회의 권한을 대행해 헌법안을 의결 공고했고, 11월21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안은 90%가 넘는 찬성을 얻어 공포됐다. 이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15일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 27일 박정희가 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각급 학교에서는 유신헌법을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의 일환으로 포장하는 교육이 실시됐고, 초등학교에서는 유신을 찬양하는 노래가 음악교과서에 실리는, 지금 생각해보면 코미디 같은 일들이 횡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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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0. 19. 18:47
ㆍ우려속 빗장 풀어보니 ‘찻잔속 태풍’

소녀시대’ ‘애프터 스쿨’ 등 여성 아이돌 그룹의 공연에 ‘삼촌팬’들이 몰리는 현상은 몇해 전이라면 모를까 요즘은 화
젯거리 축에도 끼지 못한다. 이들 중에서는 청계천이나 명동상가에서 은밀히 유통되는 일본 음반이나 비디오를 숨죽이며 탐닉하다 ‘해금(解禁)’을 맞이한 일본문화 개방 1세대들이 적지 않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는 ‘스피드’에 이어 ‘모닝구 무스메’ 등 여성 아이돌 그룹이 붐을 일으켰다. 지금의 ‘삼촌팬’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문화흡수력이 높았던 10, 20대 때 일본 여성 아이돌 그룹의 활약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 무렵 정부가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나서면서 이들은 공개적으로 일본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됐고, 최근 들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국내의 여성 아이돌 그룹에서 어릴 적 향수를 느끼며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 세대에 대한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은 비교적 뿌리가 깊어 80년대부터 나이트 클럽에서 일본의 발라드나 댄스뮤직을 접했고, 음악감상회 등을 통해 일본의 ‘엑스재팬’과 ‘안전지대’의 뮤직비디오에 심취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일본문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로 하고, 98년 10월20일 1차 개방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50년간 다양한 방식으로 국내에 스며든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해 더이상 ‘빗장’을 걸어봐야 실익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김대중 정부 들어 조성된 한·일 간의 화해협력 무드의 영향도 있었다. 신낙균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일본문화를 즉시 개방부문과 즉시 개방 이후 부문으로 나눠 우선 영화 및 비디오, 만화부문을 개방한다”고 밝혔다.

일본문화 개방 첫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하나비>가 최초로 국내 극장에 걸렸고, 이어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카게무샤>가 개봉됐으나 예상밖으로 고전했다. 그러나 99년 9월 2차 개방 이후 개봉된 <러브레터>가 전국에서 120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우며 안착했다.

대중음악 시장은 가장 민감한 분야였고, 일본음악이 국내 음악시장의 판도를 바꿀 것이라는 우려도 많았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영향은 없는 편이다. 하지만 마니아층은 탄탄하게 형성돼 있다. 2006년 11월 열렸던 일본의 5인조 남성 아이돌그룹 ‘아라시’의 첫 내한 콘서트의 경우 8만8000원짜리 공연 티켓이 예매 1시간 만에 동이 났고, 지난해 6월 올림픽 공원에서 열린 ‘모닝구 무스메’ 콘서트에는 삼촌팬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며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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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ttalgi21.khan.kr BlogIcon 딸기21 2009.10.22 14: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이 주소를 경향닷컴에 알려주었소.
    http://www.khan.co.kr/blog/blog_index.html 여기에 링크되어 있소.

2009. 10. 12. 18:34
ㆍ108시간만에 막내린 야만적 피랍극

서독의 적군파(Red Army Faction)인 ‘바더-마인호프’ 그룹의 실체를 다룬 울리 에델 감독의 영화 <바더 마인호프 콤
플렉스>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돌 하나를 던지는 행위는 범죄가 되지만 1000개의 돌을 던지면 정치적인 행위가 됩니다. 차 한 대를 불태우면 범죄가 되지만 1000대를 불태우면 정치적인 행위가 됩니다.”

서독 적군파는 1968년 마르크스주의 세계혁명을 꿈꾸던 학생과 지식인 그룹에 의해 결성된 테러단체다. 베트남전 반대시위가 한창이던 67년 베를린 자유대학 학생 벤노 오네스오르그가 경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것을 계기로 학생운동의 핵심세력인 안드레아스 바더와 진보 언론인 울리케 마인호프가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요르단에서 테러리즘 교육을 받은 뒤 귀국해 은행들을 털며 테러자금을 조달했다.

서독 적군파는 구소련제 RPG-7(휴대용 대전차 유탄발사기) 등 당시로선 최첨단 무기와 사제폭탄으로 무장한 채 베를린 고등법원 판사 드렝크만 납치 총살, 스톡홀름 독일영사관 방화사건, 독일 연방검사장 지크프리트 부박 살해 등의 테러활동으로 독일 사회를 뒤흔들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라는 ‘비판의 무기’를 ‘무기에 의한 비판’으로 대체한 셈이다. 91년 4월 동독 산업시설 민영화를 책임지고 있던 데틀레프 카르스텐 로베더를 암살한 마지막 테러를 포함해 34명이 살해됐다. 희생자는 대부분 서독의 정계 및 재계 지도자였다.

서독 정부와 적군파 간의 ‘항쟁’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처절했다. 77년 10월13일 스페인의 휴양지 마요르카를 출발한 서독행 루프트한자 여객기가 4명의 적군파가 고용한 테러리스트에 의해 납치됐다. 이들은 기장을 살해하고 기수를 소말리아의 모가디슈로 돌린 뒤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가 108시간 만인 10월17일 서독 특공대에 의해 진압됐다. 특공대원들은 4개의 여객기 출입구를 동시에 폭파한 뒤 침투해 먼저 3명을 사살했고, 화장실에 숨어있던 여성 테러리스트를 마지막으로 사살했다. 승객과 승무원 86명은 무사히 구출됐다.

다음날 적군파의 우두머리인 안드레아스 바더는 수감돼 있던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적군파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납치한 서독경영자협회 회장 슐레이만을 총살했다. 계속되는 테러에 대중이 등을 돌리면서 적군파는 급격히 쇠퇴해 갔다. 1년 후인 92년 4월14일 적군파는 인명살상과 테러투쟁의 포기를 선언했고, 98년에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해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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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0. 6. 10:19
ㆍ‘배우의 목소리’ 스크린에 담다

“잠깐, 잠깐만. 아직 넌 아무것도 못들었다니까.(Wait a minute.Wait a minute.You ain't heard nothin' yet)”

1927년 10월6일 개봉된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싱어>의 주인공 알 존슨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객석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비록 이 영화에서 배우가 말을 하는 장면은 두 대목에 불과했고, 나머지 장면은 다른 무성영화처럼 자막으로 처리됐지만 <재즈싱어>는 토키(Talkies) 즉, 유성영화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이 됐다.

<재즈싱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5대째 내려온 가업인 칸토르(유대교의 예배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를 물려받을 예정인 유대인 소년 재키 라비노비츠는 재즈 가수를 꿈꾸며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가출한다. 재키는 13세 때부터 업소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가수의 꿈을 키워나간다. ‘잭 로빈’으로 이름을 바꾼 재키는 뉴욕에서 브로드웨이의 큰 공연의 주연을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첫 공연 전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해 아버지 대신 유대교 예배에서 노래를 부르며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다. 로빈의 노래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첫 공연을 펑크냈지만 브로드웨이의 인기가수로 성공하게 된다.

<재즈싱어>가 탄생할 당시 영화산업은 위기에 몰려 있었다. 변사의 해설이나 생음악 연주 등으로 무성(無聲)의 한계를 보완하던 영화는 라디오의 등장으로 대중들로부터 조금씩 외면당하고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영화사들은 화면에 소리를 입히기 위한 기술개발에 전력을 기울였고, 영사기에 축음기를 연결시킨 바이타폰이 등장하면서 유성영화의 기술적 토대가 마련됐다. <재즈싱어>에 앞서 1926년 바이타폰을 사용한 <돈 주앙>이 제작됐지만 칼 부딪치는 음향효과에 그쳤을 뿐 배우들의 목소리까지는 담아내지 못했다.

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 픽처스사는 <재즈싱어>로 35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단숨에 메이저 영화사로 떠올랐고, 침체됐던 영화계는 활력을 되찾았다. 무성영화 시절 경우에 따라 오케스트라를 불러야 하는 등 ‘음성생산’ 부담이 만만치 않던 극장주들도 유성영화의 등장을 크게 반겼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넘어가던 시절의 할리우드 분위기는 1952년에 개봉된 진 켈리 주연의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잘 드러난다. 일부 영화예술가들은 예술성이 음성에 의해 파괴된다며 반대하기도 했지만 1930년대 이후 토키영화가 보편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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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늴리리야 2009.10.06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착한 늴리리뽕. 담주의 정보를 알려드리리다.

    10월 13일 (화)
    1924년, 한국신문사상 최초의 네컷 연재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 등장
    1977년, 서독 적군파, 루프트한자의 보잉 737이 공중납치 됨
    1969년, 인왕산 스카이웨이 개통
    54년, 네로 로마황제 즉위

    10월 14일 (수)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로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가 뿌리를 내리게 됨
    1966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석가탑에서 발견 됨
    1990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사망
    1975년, 영동, 동해고속도로 개통
    1947년, 미국 벨X 1호, 세계 최초 초음속비행 성공


    뭔가 많다 +_+

    • 늴리리야 2009.10.06 1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헉.
      형부가 수욜인 걸로 착각.. 월욜이셨군앙 ㅡ.ㅜ

      10월 12일 (월요일)
      1897년, 고종 황제 즉위
      1962년, 북한과 중국, 조-중변계조약 체결
      1992년, 국산1호 잠수함 이천함 진수
      1985년, 한국 최초의 시험관아기 탄생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
      1492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2. Favicon of https://soidong.khan.kr BlogIcon 서의동 2009.10.06 14: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욜이 아니라 화욜임.

  3. Favicon of https://soidong.khan.kr BlogIcon 서의동 2009.10.06 14: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적군파 비행기 납치가 재밌을 듯.ㅋㅋ

2009. 9. 28. 18:23
ㆍ첫 물자교류… 남북 해빙 ‘물꼬’

1984년 8월31일부터 4일간 서울·경기·충청 일원에 내린 집중호우로 서울지역이 최악의 홍수사태를 겪었다. 한강이 위

험수위인 10.5m를 넘어서면서 한강대교 등 4개의 차량통행이 전면통제됐고, 161개 지역 2만2500가구에서 9만38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저지대인 강동구 풍납동과 성내동 등은 주택들이 물에 잠기며 ‘수중고도’가 돼 버렸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려지는 대형 수재였다. 전국적으로는 사망및 실종 189명, 이재민 35만1000명, 부상 153명에 피해액은 1333억원에 달했다.

남한의 수해소식을 전해들은 북한은 9월8일 방송을 통해 수해지역 이재민들에게 쌀 5만석,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등을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남측은 이 제의를 수용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했다. ‘정치공세’에 이용될 것이라는 우려가 내부에서 적지 않았다. 국제 적십자사의 구호물자 제공제의조차 사양한 터였고, 한해 전인 83년 10월9일 버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테러의 앙금도 가라앉지 않았던 시점이다.

하지만 정부는 대남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로서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개최를 앞두고, 한반도의 평화분위기 조성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한적십자사는 북한의 제의가 온 지 6일 만인 9월14일 수락성명을 발표했고, 이어 18일 대한적십자사 이영덕 부총재와 북한적십자사 한웅식 부위원장 등이 판문점에서 실무접촉을 가졌다. 북측은 처음에 자동차와 배편으로 서울·속초·부산에 구호물자를 수송하고 북한기자들이 수해지역을 직접 방문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결국 판문점과 인천·북평(동해)항으로 최종 타결됐다. 이에 따라 9월29일부터 10월4일까지 육·해로를 통해 북한 적십자의 수해물자가 전달됐고, 남측은 담요, 카세트 라디오·손목시계·양복지 등 18개 품목이 든 선물가방 848개를 북한 대표들에게 답례품으로 증정했다.

북한쌀은 수해지역 주민들에게 33㎏에서 66㎏까지 분배됐다. 쌀이 좋지 않다고 떡을 해먹는 이들도 있었지만 북녘 쌀로 제사를 지내겠다는 실향민들도 있는 등 반응은 다양했다. 북한물자가 인도되던 마지막 날 일간지들은 ‘위장술책 속게 되면 남북대화 공전한다’는 대공표어를 싣기도 했다.

북한 적십자사의 수해물자 지원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간 물자교류로 기록됐고, 얼어붙은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는 구실을 했다. 물자가 인도된 지 8일 만인 10월12일 남측은 신병현 당시 부총리가 남북경제회담 개최를 제의하며 화답했다. 이듬해인 85년에는 73년이후 중단됐던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12년 만에 재개됐으며 9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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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늴리리야 2009.09.29 0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요 기사 봐쏘요 +_+
    역사 속의 오늘, 이 책 드리믄 좀 도움이 되실랑가...
    이 책 열어보니 내일 9월 30일은 제임스 딘이 사망을 했고
    우리 나라에서는 서울올림픽을 유치했다고 나오네요.
    1990년 내일은 한국과 소련이 85년만에 수교를 했고,
    1961년 내일은 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족을 했고,
    1929년 내일은 영국 BBC방송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시험방송을 했대요.
    헥헥...;;;

    • Favicon of https://ttalgi21.khan.kr BlogIcon 딸기21 2009.09.29 1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9월30일꺼는 내가 쓰는 건데... 서울올림픽 유치는 너무 많이 알려진 것이고, 한-소 수교나 OECD 발족이나, 둘 다 괜찮네. 하지만 좀 재미있는 게 있음 더 좋을텐데...

    • Favicon of https://ttalgi21.khan.kr BlogIcon 딸기21 2009.09.29 14: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임스 딘이 죽은 날이네...
      점보기가 첫선을 보인 날이고...

    • 늴리리야 2009.09.29 16: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임스딘이 죽었따고 위에 말했잖앗 -.-+

      또 어느 날 알려주까? ㅋㅋㅋ

    • Favicon of https://ttalgi21.khan.kr BlogIcon 딸기21 2009.09.29 17: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응, 매주 수요일에 대해 알려줘. ㅋ

    • 늴리리야 2009.09.30 0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10월 7일 수요일 꺼를 알려드립지욧.

      흑인 최초로 마리안 앤더슨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입단을 하였고요
      김형욱이 파리에서 실종되었고요
      1989년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방한하셨고요
      1849년에 에드거 앨런 포가 죽었고요
      1571년에 레판토 해전이 일어났답니다.

      음.. 역시나 썩 재밌는 것은 아닌 듯;;;

    • 딸기 2009.09.30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궁. 별로다.
      김형욱처럼 유명하고 최근 책까지 나온 케이스는 피해가야 하고, 교황 방한은... ㅋㅋ 그때 성당 열심히 다니면서 나는 교황 미사에까지 갔었지. 기억이 생생...
      레판토 해전... 18세기 이전은 초큼 곤난해...
      더 찾아보아라.

  2. 아지 2009.09.29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매주 화요일거~

    • 늴리리야 2009.09.30 0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엥- ㅋㅋㅋ

      10월 6일 (화요일)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가 개봉을 했고요
      1950년 나비학자인 석주명이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요
      1981년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피살되었고요
      1976년 중국 4인방(누구래요?) 체포되었고요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대요.

      음.. 써놓고 보니 별로 재밌지는 않네요. -_-;

    • 딸기 2009.09.30 15: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 석주명 박사는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
      사다트 피살은 너무 중요한 사건이고,
      4차 중동전쟁은 별 의미 없고,
      재즈 싱어 개봉 재밌네.

2009. 9. 21. 18:22
ㆍ일제 침공 맞선 불안한 좌우연합

시안사변(西安事變)은 1936년 12월12일 동북군 사령관인 장쉐량(張學良)이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산시성 시
안을 찾은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를 화칭츠(華淸池)에 가둬둔 채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에 나설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동북 5개성을 통치하던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이 1인자 장제스를 무력 감금한 이 사건은 세계를 경악시켰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사되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국민당은 27년 제1차 국공합작 결렬 이후 공산당의 소비에트 지역을 공격했고, 궤멸위기에 빠진 공산당의 홍군은 근거지를 서남부에서 중국 북서부 옌안(延安)으로 옮기는 대장정에 나서야 했다. 한편 일본군이 동북 3성을 침략하자 중국에는 항일여론이 들끓었고, 공산당은 국민당에 내전 중지와 항일을 위한 제휴를 제안했다.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지만 장쉐량이 이에 동의해 시안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어 일본군이 37년 7월7일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을 일으키며 중국 내륙 침략을 본격화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37년 9월22일을 기해 제2차 국공합작에 들어갔다.

국민당은 공산당을 합법화시켰고, 38년에는 국민참정회에 공산당을 비롯한 제 당파와 각계인사들을 참여시켰다.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八路軍)과 국민혁명군 신편제4군(新四軍)으로 재편성됐다. 국공합작 기간 중에도 양측간 반목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 이후 합작이 결렬되며 제2차 국공내전으로 이어졌다.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시안사변과 장쉐량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8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지만, 문서는 한 장도 없고 모든 합의는 구두로만 이뤄졌다.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은 무력으로 사건 해결에 나서려던 국민당 정부 대신 시안으로 날아가 장쉐량, 공산당 특사로 급파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담판을 벌였다. 장쉐량은 2주일 만인 36년 12월25일 장제스를 풀어준 뒤 함께 난징(南京)으로 날아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장쉐량은 49년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옮겨진 뒤 90년 6월1일 생일 때까지 53년간 연금생활을 해야 했다. 수십년의 연금기간 중 그에게 힘이 돼 준 것은 젊은 시절부터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쑹메이링이었다. 장쉐량은 연금이 풀린 다음해인 91년 대만을 떠났고, 2001년 하와이에서 101세로 일생을 마쳤다. 구국의 일념으로 권력과 부귀를 포기하고 고난의 반세기를 견뎌야 했던 장쉐량의 생애는 대만과 본토 중국인들 모두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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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9. 14. 18:19
ㆍ창조론 뒤흔들 ‘진화의 증거’ 찾다

남미 에콰도르 해안으로부터 1000㎞쯤 서쪽으로 떨어진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에는 체중 400㎏에 달하는 갈라파
고스코끼리거북, 몸길이가 1.5m에 달하는 이구아나, 갈라파고스펭귄, 핀치 등 고유생물이 풍부하다. 옛 스페인어로 말 안장을 뜻하는 갈라파고스는 이곳 코끼리거북의 안장처럼 생긴 등딱지 모양에서 유래했다. 이 거북들은 지금이야 국제적 멸종위기로 보호받지만 19세기만 하더라도 마구 남획됐다.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이 승선한 해군 측량선 비글호의 선원들도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코끼리거북을 45마리나 잡아 항해 도중 먹어치웠다.

영국 출신의 박물학자인 찰스 다윈은 1835년 9월15일 갈라파고스 제도에 도착해 약 5주 동안 머물면서 작은 새들을 표본으로 가져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 새들 중 10여마리가 모두 핀치류라는 조류학자 존 굴드의 말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제각기 부리가 달라 같은 종류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이 새들을 어느 섬에서 잡았는지를 정확히 표시해 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새들이 모두 한 종류에 속하고, 섬마다 서로 다른 부리를 가진 새들이 살고 있다는 점에서 진화론의 논거를 발견해낸다.

신중하기 이를 데 없던 다윈은 갈라파고스 섬을 방문한 지 20여년이 지나서야 진화론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부유한 의사집안 출신이라 자신의 발견을 섣불리 인정받아 출세하려는 강박관념이 없었고, 당시 급진주의자들이 진화론을 사회변혁의 이론으로 활용하던 풍조에 휩쓸리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다윈은 갈라파고스 제도를 방문한 지 23년 만인 1859년 11월22일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를 출간했고, 초판 1250부가 당일 매진되며 당시 유럽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다. 생물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진화하거나 멸종한다는 다윈의 진화론은 완벽한 신이 자연계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온갖 생명체를 촘촘히 심어놓았고, 각자의 자리는 단단히 고정돼 있다는 설계론 혹은 창조론의 개념을 뿌리째 흔들어놨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탄생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처음엔 철학과 사회학·정치학·경제학 등 인문사회학에 영향력이 컸고, 정작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그리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발생학·의학·분자생물학 등 많은 자연과학이 진화론의 관점을 수용하면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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