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22. 21:43

출처 https://www.xn-8wv97xz6xo7h.online/kanaashinou-00

오늘의 단어는 東北이다. 일본어로는 도호쿠. 어제 끝난 여름 고시엔에서 도호쿠 지역 아키타현의 가나아시농고(金足農高)가 준우승을 차지했다. 고시엔이 1915년 생긴 이래 아키타현 고교가 결승에 진출한 건 103년만이라고 한다. 오사카의 강호 토인고에게 13-2로 대패하면서 우승은 놓쳤지만 선수층도 빈약한 이 시골고교의 선전에 아키타현은 물론 도호쿠 지방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여 있다.

2011년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으로 도호쿠 전체가 쑥밭이 됐을 당시 도호쿠를 몇차례 취재하면서 짠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 이후 '도호쿠'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아릿한 느낌이 든다.

도호쿠 사람들은 '가만즈요이'(我慢強い), 즉 참을성이 많고 내색도 잘 안한다. 도호쿠 주민들은 묵묵히 수도권에 배후지 역할을 해왔다. 일본의 고도성장 시절에 중학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집단 취직열차를 타고 도쿄로 와서 일본 경제를 떠받쳐온 이들도 도호쿠 사람들이다. 노동력 공급 역할만 한게 아니라 수도권 주민들에게 전력을 공급하는 배후지 역할도 했다. 후쿠시마에 세워진 원전들은 도호쿠 주민을 위한게 아니라 도쿄 주민들이 쓸 전력을 대왔던 것이다. 수도권을 위해 봉사해온 도호쿠에 원전사고라는 대재앙이 닥치면서 이 지역 주민들은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이번 가나아시의 활약에 앞서 2013년 프로야구 재팬시리즈에서 센다이 연고의 라쿠텐이 우승했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대재난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도호쿠 주민들은 이날 하루만은 눈치 안보고 마음껏 울 수 있었다.

현장에 가지는 못했지만 TV를 지켜보면서 감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래는 우승 다음날 쓴 기사의 한 대목.

"전날 경기에서 공 160개를 던진 라쿠텐의 에이스 다나카 마사히로(田中將大·25)가 피로를 무릅쓰고 또다시 마운드에 오르자 감격한 2만8000여명의 관중은 일제히 일어나 그의 주제가인 가요 ‘하나 더’를 합창했다. TV 화면에 비친 관중의 얼굴은 빗물과 눈물이 뒤섞여 번들거렸고, 빗줄기가 굵어지는 늦은 가을밤임에도 경기장은 열기에 휩싸였다."


Posted by 서의동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5. 7. 4. 17:53
일본의 드라마 <심야식당>이 인기를 끌면서 영화화되고 국내에서도 개봉됐다. SBS에서도 일본 심야식당의 컨셉을 그대로 빌려 드라마를 시작했다. 심야식당은 신주쿠 뒷골목을 배경으로 했는데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맨 처음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거리가 신주쿠다.

1.동네마다 한두곳은 있는 '동네 사랑방' 

일본엔 동네마다 이런 술집겸 식당이 한두곳씩 있다. 영화처럼 새벽까지 하는 심야식당은 아니지만, 내가 살았던 도쿄 오타구 우리동네(미나미쿠가하라)에도 저녁 6시부터 11시까지 하는 비슷한 가게가 있었다. 가게 이름은 '시로(城)' . 10평도 채 안돼 보이는 허름한 동네술집이다. 술집 내부도 수십년은 된 듯한 포스타가 벽에 걸려 있고, 화장실은 주저앉아 볼일을 봐야하는 옛날 식이다. 그런데 이런 허름함이 손님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입구는 미닫이 식이고, 노렌(상호가 그려진 천으로 가게 입구에 걸어놓는 것)이 걸려 있다. 10시반쯤 되면 노렌을 걷는데, 그러면 장사가 끝나간다는 표시다. 

주인(마스타라고 부른다)은 오키나와 출신의 60대 아저씨고, 홀서빙하는 아주머니도 60대(이름은 스기짱). 영화와 달리 테이블이 4개 쯤 있고, 주방을 둘러싸고 대략 7~8명쯤 앉을 수 있는 카운터가 있다. 일행이 많거나 하면 모르지만 대개 단골들은 대개 카운터에 앉아 마스타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과 안주를 먹는다. 주로 동네 주민들이 많지만 전철역 한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 사는 이들도 일부러 이곳에 와서 먹는 이들도 있다. 


일본에 놀러온 친구와 이 술집에서 한잔.


단골들은 주로 혼자왔다가 옆자리 손님들과 떠들고 함께 술을 마신다. 메뉴는 주로 야키도리, 말고기회, 감자샐러드, '고야참푸루'(오키나와 요리), 비엔나 소시지 구이, 니꼬미로 불리는 고기스튜 같은 걸 안주로 판다. 술은 주로 생맥주와 소주, 사케이지만 마스타가 보기에 술이 약간 취했다 싶은 손님들에게는 더 술을 팔지 않고 다독여 돌려보낸다. 카운터도 비좁고, 테이블도 4개 정도 밖에 안된다. 자리가  다 차지 않았더라도 분위기 유지를 위해 낯선 손님들이 우루루 몰려오거나 하면 아예 받지 않는다

2. 술집에서 단골되기 

나도 이 동네에 체류한지 1년반쯤 지나서 이 술집에 다니게 됐다. 처음엔 동네 주민들 대화에 끼기 힘들었다. 대체로 사람들이 이곳에서 단골이 되는 과정을 잠깐 소개하면, 혼자 와서 술을 마시다 옆자리에 누가 오면 대개 간단하게 목례를 한다. 그러다 카운터 단골들이 뭔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슬쩍 끼어들어 말을 조금 섞는다. 그러면서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 자기 소개를 한다. 통성명은 그 과정에서 적당한 기회에 한다. 손님들간의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역할은 마스타가 한다. 서로 모르는 손님들이 마스타를 매개로 알게 되는 경우가 주로 많다. 그래서 마스타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홀서빙을 하는 아주머니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처음에 갔을 땐 말을 섞기 힘들어서 카운터 구석에서 술만 마시다 돌아갔다. 내가 외국인이란 사실을 설명하는게 매우 귀찮기도 했지만 우선 손님들 이야기를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골인 60대 남자들의 일본어는 잘 알아듣기 힘든데다 술까지 들어가면 무슨 소린지 거의 못알아듣는다.

그러다 우연히 근처에 사는 한국인을 이 술집에서 만나게 됐다. 의료기기 사업을 하는 이 한국인은 이 술집에 거의 1주일에 한두번 오는 단골로 많은 손님들과도 안면을 익혀둔 사이다. 그날도 구석 카운터에서 뻘쭘하게 술을 마시며 손님들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가 약간 어색한 일본어 발음이 들려오길래 봤더니 한국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이 한국인 덕에 내가 한국인이란 사실이 발각(?)됐고, 술집에 정식 데뷰하게 됐다. (아마 마스타나 손님들은 이미 내가 외국인이란 건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을 떠나면서 인사하러 들렀다가 한컷. 뒷줄 가운데가 마스타, 앞의 여성이 홀 서빙을 맡는 스기짱. 오른쪽은 이집 단골인 동네의사 아저씨.

이후 점차 '조렌(常連)'으로 불리는 단골이 되면서 2~3주에 한번꼴로 들르게 됐다. 아는 술집이 생기니 편리한 것도 많았다. 우선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는 물론 생활정보도 많이 얻게 됐다. 예를 들어 자동차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아는 정비소를 소개받거나, 무릎이 관절염이 걸렸을 때 병원도 소개받았다. 일본 사회의 물정을 아는데도 도움이 꽤 됐다. 어디를 여행간다고 하면 그 동네의 어느 관광지가 유명하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동네 술집이었다.

3. 동네술집의 핵심적 존재는 '마스타' 

단골들은 대부분 60~70대 아저씨들이 많지만 가끔씩 30~40대 여성들도 찾아온다. 직업도 다양해서 의사, 도편수, 샐러리맨, 중소기업 사장도 있다. 내가 한국인이고 신문사 특파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일관계를 물어보는 아저씨들도 꽤 있었다. 

한국과 거래하는 70대 중소기업 사장과는 따로 저녁을 얻어먹기도 했다. 오키나와 출신인 마스타와 오키나와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알다시피 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이 됐는데 그전까지는 미군정이라 일본에 가려면 여권이 있어야 했다거나 미군이 오키나와의 초등학교에 굉장히 여러가지 지원을 잘해줘 고마움을 느낀다거나 하는, 우리가 잘 모르는 오키나와 사정도 들을 수 있었다. 3년간의 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이 술집에 들러 작별인사를 하고 왔는데 일본에 나중에 가면 반드시 들러 술한잔 하고 싶은 곳이다. 

귀국하면서 한국에도 이런 동네술집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런 곳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차이는 마스타가 있느냐 없느냐인 것 같다. 마스타란 술집의 주인이자, 요리사이자 분위기 메이커이다. 나이 지긋한 마스타들은 그 동네에 거주하면서 동네사정을 환히 꿰고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같이 술도 한잔한다. 사장 따로 종업원 따로라는 식이면 이런 분위기는 성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술집을 대표하는 '얼굴'이 버티고 있느냐 없느냐가 동네술집의 핵심적인 요건이다.


Posted by 서의동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s://sweettown.tistory.com BlogIcon 8-612 2015.07.04 2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국 작은 마을의 펍의 분위기에 대해 들은적이 있는데요, 그것과 조금 비슷한 분위기인거 같아요.

  2. BlogIcon 유지수 2015.07.11 1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기사 잘 봤습니다
    저런 조그만한 술집하는게 꿈인데
    세상사는 이야기하고 참 좋을거같아요

2014. 6. 6. 16:56


2011년 3월11일은 경향신문 도쿄특파원으로 부임해 정식 근무한지 엿새째 되던 날이다. 그 전날 처제부부가 2박3일 일정으로 도쿄에 놀러와 있었고, 밤에는 아내와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가 단신부임으로 있는 나를 위문하기 위해 서울에서 2박3일의 일정으로 올 예정이었다. 3년간의 특파원 근무 준비를 위해 2월 중순부터 일본에 와있었으니 한달 좀 못되게 이국땅에서 홀로 지내다 모처럼 가족과의 상봉을 앞둔 기분좋은 금요일이었다. 

 

도쿄시내 중심부인 오테마치역 부근


이틀전의 심상치 않은 '전조'


오후 2시46분. 석간신문을 사기 위해 도쿄 중심부인 지요다(千代田)구 오테마치(大手町) 산케이빌딩에 있는 경향신문 도쿄지국의 사무실을 나와 오테마치역 지하도로 발길을 옮기던 길이었다. 2~3m 앞 천장에 있는 신호표지판이 조금 흔들린다 싶었다. 


순간 머리속에 지진으로 신주쿠 도청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는 이틀전 기사가 떠올랐다. 기사에서 읽은 ‘장주기지진동(長周期地震動)’이란 생소한 용어도 기억났다. 장주기지진동이란 지진의 주기가 길고 천천히 흔들림에 따라 진원에서 150~200킬로 정도의 먼 지역으로도 진동이 퇴적층을 타고 전파되는 것을 말한다. 특히 고층건물일 경우 지반과의 공진효과로 상층부가 길게는 몇분이상 지속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최초의 흔들림에 가벼운 긴장을 느끼면서도 ‘이러다 곧 그치겠지’하는 생각은 2~3초도 지나지 않아 공포로 바뀌었다. 지하도 바닥이 서있기 조차 어려울 정도로 흔들렸던 것이다. 길가던 여성들이 기둥을 붙잡은 채 “어떡하지(どうしよう)?”라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행인들도 발걸음을 멈춘 채 벽을 붙잡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흔들림이 3초를 넘어서자 공포 엄습 


일본은 지진이 잦은 나라여서 진도 3도 가량의 지진은 자주 일어나고, 대체로 1~2초 가량 흔들리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흔들림이 3초 이상 넘어가면 공포가 커진다. 1995년 간사이 지방을 강타했던 한신대지진은 불과 12초간 흔들렸지만 6000여명이 숨지는 대참사를 몰고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날은 6분 가량 흔들렸다. 

 

지하도에서 본 일본인들은 침착함을 잃지 않는 평소 모습과 달랐다. 지하철 마루노우치(丸の内)선, 지요다선, 한조몬(半蔵門)선, 미타(三田)선 등이 정차하는 오테마치(大手町)역 지하도에서 긴급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지금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모든 역무원은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타고 있는지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지하도는 안전하니 승객들은 침착하게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니폼을 입은 역무원들이 비상점검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지하도의 행인들은 한 상점에서 켜놓은 TV 앞에 몰렸다.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통화를 시도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나도 휴대전화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불통이었다.운행을 멈춘 에스컬레이터 계단으로 뛰어올라 황급히 건물바깥으로 빠져나가 보니 사무실에서 빠져나온 수십명의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성거렸다. 


그 침착하던 일본인들이... 


거리 전체가 금연지역인 지요다구이고, 규칙을 잘 지키는 일본인들이지만 때가 때인 만큼 일부는 담배를 꺼내 물기도 했다. 산케이빌딩의 인접 건물에는 전원이 건물 밖으로 대피해 건물 앞 광장에 모여 있었다. 흰색 안전모를 쓴 채 메가폰을 든 한 건물관리인은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것보다 건물 안에 있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며 만류했으나 당황한 시민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사무실이 있는 9층까지 비상계단을 통해 올라갔다. 벽 여기저기에 페인트가 벗겨진 게 눈에 띄었고 곳곳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당수 회사원들이 짐을 싸들고 사무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비상계단으로 몰렸다. “도쿄 도심에서 좀체 겪어본 적 없는 지진”이라는 말들이 들려왔다. 


사무실에 돌아와보니 책상서랍이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사무실이 지속적으로 ‘삐걱 삐걱’ 소리를 내며 마치 배처럼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1시간 이상 반복됐다. ‘장주기지진동이란 게 이런 건가’라는 실감이 들었다. 조금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시 흔들리자 ‘사무실에 있어야 할지, 밖으로 뛰쳐나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결국 그날 9층 사무실을 비상계단으로만 네번 왕복했다. 휴대전화에 있는 보행계는 그날 하루만 1만6000보를 걸은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공중전화 거는데 40분 


본사 보고를 위해 수화기를 들고 국제전화를 걸었지만 “지금 전화가 폭주하고 있어 연결이 어렵다”는 자동응답만 들렸다. 인터넷은 그나마 연결이 돼 있어 메신저로 회사에 상황을 보고했다. TV에서는 안전모를 쓴 아나운서들이 긴급한 표정으로 피해상황을 내보냈다. 


“여러분 절대로 혼자 있지 말고, 물건이 올려져 있는 곳에는 접근하지 마세요. 가스렌지와 전기기구를 확인하시고, 깨진 유리창이 있을지 모르니 집에서도 신발을 신고 계세요. 콘센트에 플러그가 꽂혀 있는지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바닷가에는 절대 접근하지 마세요….” 


안전모를 쓴 방송국의 여성 아나운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피요령을 안내했다. 도쿄 시내구경을 나섰던 처제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와 “어떡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휴대폰이 불통이 되자 사람들이 공중전화에 몰리는 바람에 40분을 기다렸다고 한다. 방법이 없어 “전철 다니는 곳을 확인해보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장 속에 서둘러 기사를 보낸 뒤 평소 알고 지내던 산케이신문 문화부 기자 기타 요시히로(53)를 만났다. 일본인들의 표정을 인터뷰 기사로 쓸 참이었다. 기타는 집이 사무실에서 30㎞쯤 떨어진 지바현 후나바시에 거주하는데, “전철이 끊겨 오늘 집에 가긴 틀렸다. 사무실에서 하룻밤을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저녁을 건물에 비축돼 있는 비상식량인 건빵으로 해결했다. 


일본의 기업과 관공서는 지진에 대비해 비상식량을 비축해두고 있다. 거리에 있는 안내지도에도 어느 건물안에 비상식량이 있는지 표지가 돼 있다. 자연재해가 반복돼온 일본다운 대비책인 셈이다. TV에서는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관방장관의 “무리해서 귀가하지 말고 회사 등 안전한 곳에 머물러 있으라”는 당부가 흘러나왔다. 


지하철은 심야에 운행재개 


그날 JR철도는 운행이 전면중단됐으나 자정을 넘어서면서 지하철은 일부 구간부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소 JR을 이용해 50분 정도 걸리던 통근거리가 지하철로 우회하는 바람에 두시간이나 걸렸다. 12일 오전 0시30분. 우선 오테마치에서 지하철 한조몬선을 타고 9번째 역인 산겐자야(三軒茶屋)에 도착한 뒤 도큐덴엔도시(東急田園都市)선으로 갈아타고, 4번째 역인 후타고타마가와(二子玉川)역에서 내렸다. 


다시 도큐오이마치(東急大井町)선으로 갈아타고 9번째 역 하타노다이(旗の台)에 멈춘 뒤 다시 도큐이케가미(東急池上)선을 타고 6번째역인 구가하라(久が原)에 도착했다. 무려 28개역을 거치면서 도쿄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모양인 데다 지하철은 운행점검을 위해 저속운행을 했다. 집 근처 역인 구가하라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2시20분.

 

우리집 근처인 구가하라역에 전철이 들어오고 있다.



가족은 공항로비에서 밤지새 


집에 돌아와 보니 책장에서 책이 쏟아져나와 있을 TV가 쓰러지거나 그릇이 깨지는 등의 손상은 없어 다행이었다. 전날 도쿄에 놀러왔던 처제 부부는 1시간 쯤 먼저 귀가해 있었다. 신주쿠의 카페에 있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뛰쳐나가길래 따라나가 우왕좌왕하다가 역구내에 쭈그리고 앉아있거나 철로를 따라 걷거나 하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다. 처제는 12시간 동안 슬리퍼로 다니느라 무릎이 상해 이후 등산을 할 수 없게 됐다. 

 

아내와 아이는 이날 밤 10시에 하네다(羽田)공항에 도착했는데, 새벽 2시까지 택시를 기다리다 포기하고, 공항직원들이 나눠주는 구호용 담요를 2개 받아서 로비에 깔고 잤다고 한다. 다음날 새벽 모노레일을 타고 하마마쓰초(浜松町)역까지 와서 JR게이힌도호쿠(京浜東北)선으로 갈아탔으나 전철이 시험운행하느라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평소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를 5시간여 걸려 12일 오전에 집에 왔다. 

  

Posted by 서의동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4. 5. 23. 14:33

“일본이 작은 나라가 되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가요.”


2012년 7월16일 도쿄시내 요요기(代代木) 공원에서 17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사요나라 원전’ 집회에서 당시 81세의 여류 작가 사와치 히사에(澤地久枝)는 “작은 국토이지만 일본에 태어나길 잘했다고 느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며 이렇게 호소했다. 사와치의 말은 일본에서 경향신문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지난 3년간 필자에게 가장 인상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원전사고가 난지 1년 뒤인 2012년 3월초 후쿠시마현에 취재갔을 때 찍은 사진. 일본공산당이 세워둔 탈핵 포스터.



“사요나라, 원전!”


2011년 3월11일 동일본대지진과 동시에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전 방사성물질 대량유출사고는 일본 사회에 격진을 몰고 왔고, 그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영향은 아직도 가늠하기 쉽지 않다. 3년이 지나면서 일본은 2020년 도쿄올림픽 준비에 한창이고, 일본 주류 언론에서도 원전문제는 거의 자취를 감출 정도로 외견상 후쿠시마의 악몽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하지만 원전사고를 유발한 ‘원전마피아’의 구조는 바뀌지 않았고, 사고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원전을 다시 돌리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


하지만 후쿠시마 ‘대사변’은 전후(戰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하에 원전을 전력원으로 사용해온 세계 각국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문제이며 사와치의 말은 현대 인류가 원전을 동원한 성장전략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한국도 외면할 문제가 아니다. 한편으로 필자가 도쿄특파원 업무를 시작한지 불과 닷새뒤 벌어진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3년간 한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실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종교문제화’한 방사능 피폭


지난 3월 하순, 평소 알고 지내던 출판사 직원 Y씨 등과 도쿄 가구라자카(神樂坂)의 한 일식집에서 송별점심을 했다. 3년간의 특파원 생활을 돌아보다 한달전 다녀온 후쿠시마(福島) 출장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갔다. 필자의 취재경험을 열심히 듣고 난 Y씨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 얘기 오랫만이네요. 일본에선 방사능 문제는 종교 문제와 비슷해서 함부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요”라고 대꾸했다.


무슨 뜻일까? “왜 좌중에 특정 종교의 신자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종교에 대한 험담을 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가끔 있잖아요? 방사능 이야기도 좌중에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발생한 피폭량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 있을지 모르니 말을 꺼내기가 꺼려지는 거죠. 그러다보니 자연히 방사능 이야기는 화제에 오르지 않게 돼요.”


Y씨는 5살난 사내아이를 둔 아이엄마여서 원전사고 직후에는 방사능에 꽤 민감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피폭에 대한 우려는 퇴색한 듯 보였다. 필자같은 외국인, 그것도 뉴스를 다루는 저널리스트와 만나는 과정에서 가끔씩 자극을 받는 정도가 고작인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서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일본 사회속에서 ‘합리적인 의문’이 싹틀 여지가 없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후쿠시마를 떠난 ‘자주(自主) 피난민’


하지만 방사능에 대한 인식은 도쿄에서 200㎞가량 떨어진 후쿠시마로 가면 확연히 달라진다. 지난 2월 하순 동일본대지진·후쿠시마원전사고 3년 취재를 위해 전직 고교교사 다케다 도루(武田徹·73)씨 일행과 후쿠시마 역에서 만나 현 일대를 동행하며 현지사정을 취재했다. 


다케다씨는 사고 당시 후쿠시마를 떠나 인접현인 야마가타(山形)현 요네자와(米澤)시에서 3년째 피난생활을 하고 있다. 일본인중에서는 드물게 열정적이고, 정의감이 투철한 다케다씨는 “올림픽마저 유치됐으니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를 필사적으로 지우려 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일명 ‘자주(自主) 피난민’이다. 일본 정부가 피난지역으로 지정한 원전주변 지역이 아닌, 원전에서 60㎞가량 떨어진 후쿠시마시에서 거주하다 사고를 맞아 피난한 것이다. 그런 만큼 3년이 지난 현재 반경 20㎞부근 지역까지 주민귀환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는 그의 심정은 착잡하다. 후쿠시마시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자주피난자들을 ‘유난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하지만 후쿠시마 현에 거주하는 어린이와 여성들은 모두 일단 피난시켜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여전히 확고부동하다. 결혼해 후쿠시마에 살던 다케다의 딸은 사고직후 남편을 남겨두고 피난했다가 가끔씩 후쿠시마를 다녀가는 정도인데도 소변검사에서 방사성 세슘이 검출됐다.

“사고 직후부터 후쿠시마 주민 전체 상대로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실시할 것을 요구해왔지만, 민주당도 자민당도 외면했다. 검사를 한다면 아마 후쿠시마 주민전체에서 세슘이 검출될지도 모른다. 그 감당을 하기 싫은 것이다. 3년이 돼도록 주민들 건강수첩도 안만들고 있다.”


피폭 경고는 비주류의 목소리로 치부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지 3년이 지난 현재 일본인들의 방사능 피폭문제에 대한 태도는 이처럼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Y씨의 말처럼 방사능 피폭은 과학적 판단보다는 ‘신념’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원전주변 지역은 위험하지만 적어도 도쿄 정도는 안전하다는 인식이 대세인 반면, 지난 1월 한국에서 강연을 가진 바 있는 고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 교토대 원자력연구소 조교 같은 이들은‘저선량 피폭’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도쿄 정도의 방사선량이라도 피폭되면 유전자에 상처를 내 발암위험을 높인다는 그의 지적은 일본 주류언론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고이데류의 주장은 일본 사회에서 ‘비주류’의 목소리 정도로 취급될 뿐이다.



분명한 것은 도쿄와 수도권의 안락한 삶을 위해 ‘폭탄’을 끌어안은 채 수십년을 견뎌온 후쿠시마 주민들의 삶이 해체됐다는 점이다. 이곳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거나, 피폭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떠날 여건이 안되는 주민들은 ‘원자력 실험실’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방사능과 평생 싸워야 한다. 


만약 한국에서 후쿠시마 급의 원전사고가 발생한다면, 한국 정부의 대응은 일본 정부보다 더 무책임할지 모른다.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 사태를 보면 이런 예상은 지나치지 않다. 원자력이란 존재는 국가가 국민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는 고이데의 말을 분명히 새겨둬야 할 것이다.

 

취재대상이면서 실존문제였던 ‘방사능’


3·11동일본대지진 닷새전부터 특파원 임기를 시작해 3년여 동안 원전문제를 지켜봐온 필자에게 방사능 피폭은 취재대상이자 ‘실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대지진 사흘뒤인 3월14일, 도쿄에서 빌린 렌터카를 몰고 20시간 걸려 쓰나미피해지역인 미야기(宮城)현으로 취재를 떠날 때만 해도 방사능 문제의 심각성은 깨닫지 못했다. 이미 이틀전인 3월12일부터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가 폭발하며 방사성물질의 유출이 본격화되던 시점이었는데도 실내가 더워 창문을 열어젖힌 채 운전했고, 도중에 후쿠시마시의 호텔에서 하룻밤 묵기까지 했다. 


더구나 당시 출장목적은 쓰나미 피해의 참상을 보도하는데 있었던 만큼 원전상황은 관심사밖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의 대변인인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관방장관의 “방사능 유출로 즉시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에 별 의심을 하지 않을 정도로 원전과 방사능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기도 했거니와 일본 정부를 어느 정도는 신뢰했기 때문이다. 4일간 취재를 마치고 도쿄로 귀환(렌터카를 현지 지점에 반납하고 비행기로 돌아왔다)한 뒤 원전사고가 주된 취재 대상이 된 이후 3년간 원전과 방사능은 언제나 머리구석 한켠을 떠나지 않은채 머물러 있었다.


돌아와서 본 도쿄의 상황은 흉흉했다. 특히 3월23일 도쿄시민들의 식수원인 카츠시카(葛飾)구 정수장에서 리터당 210베크렐(㏃)의 방사성 요오드가 검출되자 시민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생수 사재기’를 우려해 당시 식료매장들은 가족당 생수 1병으로 판매를 제한하기도 했다. 


식품 공포 현실화


지인인 주부 고바야시 다카코(小林貴子·42)씨는 당시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매일 자전거로 동네 편의점과 슈퍼마켓을 돌며 생수를 사모으는게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고 말했다. “2리터들이 생수를 3~4병 사모아도 남편과 초등학교 3학년 아들, 다섯살과 세살 난 딸 둘까지 다섯 식구에겐 충분치 않아 생수와 수돗물을 반씩 섞어 미소시루(일본 된장국)를 끓인다. 쌀씻을 때는 수돗물, 차와 국은 생수를 쓴다. 수퍼에 가면 포장을 살펴 규슈(九州)나 니가타산 생선을 고른다.”


이후 3년 동안 필자는 수돗물을 피하고 생수를 사먹고 장을 볼 때도 원산지를 꼼꼼하게 챙기게 됐다. 단신부임으로 와 있느라 마음의 부담이 비교적 덜했다고는 하지만 ‘신경과민’ 상태는 지속됐다. 원전문제를 들여다보다 원산지와 관련한 중요한 사실도 알게 됐다. 쌀의 원산지 표시의 경우 산지명을 표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각기 다른 산지의 쌀을 섞을 경우 ‘국산’으로만 표시해도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아침마다 사먹는 편의점의 오니기리(삼각김밥)는? 부랴부랴 다음날 아침 편의점에서 오니기리를 사 뒷면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국산’이었다. 


물론 원전사고 이후 아직 햅쌀이 나올 시점이 아니었기 때문에 과민반응이긴 했다. 하지만 그해 7월 방사성 세슘에 오염된 볏짚사료로 키운 소가 학교급식과 열차 도시락 재료로 사용된 사실이 드러나 일본 사회에 충격을 줬던 것을 감안하면 전혀 ‘기우’는 아니었던 셈이다. 실로 우려는 점차 현실화되면서 그해 11월에는 후쿠시마 농가의 햅쌀에서 기준치를 넘는 방사성 세슘이 검출됐고, 12월에는 일본 최대 식품회사인 메이지(明治)의 분유 ‘메이지 스텝’에서도 세슘이 검출돼 일본 사회에 방사능 공포가 확산됐다.


홋카이도에서 시고쿠까지 방사능 확산


도쿄시내에서도 곳곳이 방사선량이 정부가 정한 연간 기준치(1밀리시버트(mSv), 1시간당 0.23마이크로시버트(μSv))를 넘는 ‘핫스팟(Hot-spot)’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10월에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반경 250㎞ 떨어진 요코하마(橫浜)시 고호쿠(港北)구의 아파트 옥상의 진흙 퇴적물에서 1㎏당 195㏃의 스트론튬 90과 6만㏃의 세슘이 검출됐다. 


그해 11월 나고야(名古屋)대 국제연구팀이 방사성 물질의 오염 확산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세슘이 일본 열도 북단의 홋카이도(北海道)부터 남부의 주고쿠(中國), 시고쿠(四國) 지역까지 퍼진 것으로 나타났다.


히로세 다카시(廣瀨隆)의 <원자로시한폭탄>과 고이데 히로아키의 <원전의 거짓말>같은 책을 부지런히 탐독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들의 지적과 정부의 공식설명, 주류언론의 보도와의 격차가 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대체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건가’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방사능에 대한 감수성은 나이가 들수록 낮아지고 40대 중반 이후는 10대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는 대목을 읽은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점점 무뎌지는 방사능 경각심


솔직히 말해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도 필자의 방사능 피폭문제에 대한 인식은 확실치 않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저선량 피폭’을 경고하는 이들은 없지 않다. 지난해 10월 인터뷰를 위해 만난 게이오대학병원 의사 곤도 마코토(近藤誠)는 “방사능 피폭은 미량이라도 유전자에 상처를 내 발암위험을 증가시킨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일상에 젖으면서 필자의 방사능에 대한 경계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풀려갔다. 원전사고 1년후 후쿠시마를 취재할 땐 후쿠시마에 도착하자 마자 마스크를 사서 쓰고 다녔지만, 지난 2월 하순에는 마스크는 커녕 후쿠시마 시내 호텔에서 하루 묵으며 저녁식사까지 할 정도였다. 많이 낮아지긴 했지만 후쿠시마 지역의 상당수 지역의 방사선량은 아직도 일본 법률상 만 18세 미만 청소년들은 출입할 수 없는 ‘방사선관리구역’에 해당되는 수치다. 필자의 경험은 눈에 보이지도, 냄새도 맡을 수도 없는 방사능에 대처하가 그만큼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방사능 오염수 유출문제가 한국 사회에 수산물 파동을 몰고 오기도 했지만 정작 일본 사회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세계 각국의 핵실험으로 해양은 이미 상당정도 오염된 상태인 만큼 방사능 오염수 유출은 분명히 문제지만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전문가들도 있다. 오히려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결정 하루전 일본산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를 발표한 한국 정부의 조치를 ‘호들갑’이라고 항의하는 일본인들도 많았다. 


‘한국인들이 과민반응하는 걸가, 일본이 지나치게 무딘 건가, 아니면 일본인들도 걱정은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있는 걸까.’ 3년이 지난 지금도 방사능 피폭문제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일본에 태어났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일본인들과 잠깐 여행오는 외국인, 필자처럼 수년간 주재한 뒤 돌아가는 외국인간의 방사능에 대한 태도는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방사능 문제는 ‘실존’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사고수습에까지 부작용을 미치는 ‘원전민영화’ 체계


방사능 피폭에 대한 일본의 애매한 태도 이상으로 필자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원전사고에 대한 일본의 대응방식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주식회사 체제인 도쿄전력에게 사고수습을 맡겨놓고 뒷짐만 지고 있는 일본 정부의 태도가 사고수습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도쿄전력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공사를 회피하는 등 철저한 기업논리로 움직이면서 사고수습을 지연시킬 뿐 아니라 문제를 키우고 있다. ‘국책민영(國策民營)’이라는 기이한 ‘민영화 구조’하에서 원전이 건설되고 운영돼온 것이 두고두고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지만 이 구조를 바꾸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 관료, 도쿄전력및 원전건설업체들이 이익을 나눠먹는 ‘겐시료쿠 무라(原子力ムラ·한국에선 ‘원전 마피아’로 불림)’의 강고한 구조는 인류사적 재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심지어 일본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들이고도 별 효과가 없어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 비판받는 방사능 오염제거(제염) 사업은 대부분 대형 건설업체들이 수주한다. 원전을 지으며 배를 불린 대형 건설업체들이 제염작업도 도맡으면서 이중으로 돈을 버는 셈이다.


사후대책도 ‘뒤집기’하는 도쿄전력의 힘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 오염수가 불어나는 사태와 관련해 원자력 전문가들은 사고 초기부터 원전 건물 둘레에 차수벽을 설치해 고농도 방사능 오염수가 고여 있는 원전 건물에 지하수가 유입돼 섞이는 것을 방지하라고 지적해왔다. 


원전사고 2주 뒤인 2011년 3월26일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총리의 원전사고담당 보좌관에 취임한 마부치 스미오(馬淵澄夫) 민주당 중의원은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곧바로 오염수 대책에 착수, 두 달 뒤 차수벽 설치계획을 마련했다. 마부치 의원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6월11일 현장을 방문해 당시 요시다 마사오(吉田昌郞) 현장소장과 차수벽 설치구역까지 획정했다”고 말했다. 


이 계획은 6월14일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2주 뒤 주주총회를 앞둔 도쿄전력은 막대한 공사비로 주주들의 비판을 살 것을 우려해 뒤집기 공작에 들어갔다. 무토 사카에(武藤榮) 당시 부사장이 가이에다 반리(海江田万里) 당시 경제산업상을 만나 언론 발표를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공사비가 1000억엔대에 달하는 막대한 사업을 발표할 경우 시장으로부터 채무초과라는 평가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댔다. 


결국 언론 발표는 미뤄졌고, 대신 무토 부사장은 마부치 보좌관에게 “지체없이 추진하겠다”고 구두약속했다. 하지만 2주 뒤 도쿄전력의 주총이 열리던 6월28일 간 총리는 원전사고수습담당상을 신설해 별도의 인사를 임명했고, 차수벽 설치에 의욕을 보여온 마부치는 총리보좌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석연치 않은 인사에 도쿄전력이 간여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건 차수벽 계획은 유야무야됐다. 2년 전 즉시 공사에 착수했더라면 오염수 유출사태는 최소화됐을 것이지만 주주와 자본시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장기업의 경영논리가 사태를 최악으로 몰고간 것이다.


원전 노동자들은 현장의 ‘일회용품’


원전사고 현장에서 초심자들에 의한 실수로 사고수습을 지연시키는 것도 ‘사고수습 민영화’가 빚은 폐해다. 인류사적인 재앙인 원전사고를 수습한다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근로자들은 정작 현장에서는 일회용품으로 취급된다. 이 때문에 숙련된 근로자가 사라지고 있는데도 일본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 안전점검 요원들이 지난해 11월27일 후쿠시마현에 있는 후쿠시마 제1원전을 점검하고 있다. _ 국제원자력기구 제공·AFP연합뉴스


지난 2월말 만나 인터뷰한 후쿠시마 원전 해고근로자 고보(가명·30대중반)의 설명에 따르면 원전사고 현장은 원전운영사인 도쿄전력(발주기업)과 원청업체인 대기업, 그 아래 수많은 하청업체들이 다단계로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핀하네(ピンハネ)’로 불리는 ‘임금 가로채기’가 횡행한다. 하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으니 멀리 오키나와, 홋카이도로부터 노동자들이 몰려들고 있지만 방사선량이 시간당 수백밀리시버트(mSv)에 이르는 건물 내 잔해처리 작업 등에 동원됐다가 피폭돼 이르면 2주일 만에 해고된다. 



현재 원전노동자 지원단체에서 활동 중인 고보는 “사고현장은 일본의 불안정노동의 구조적 문제가 응축돼 있다. 다단계 하청구조하에서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다 버려지는 체제 속에선 온전한 사고수습을 기대하기 어렵다. 근로자들이 자주 교체되는 탓에 오염수 유출, 정화장치 작동중단 등 실수에 따른 사고가 빈발한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원전사고 수습을 국가적 과제로 인식한다면 도쿄전력이나 대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해 안정성을 높이고, 의료·생활보장 대책을 마련하는 등 노동환경을 대폭 개선하도록 관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가 반복되면서 사고수습 작업에 큰 차질이 빚어질 수 밖에 없다.”

 

아쉬움이 남는 시민사회의 대응


원전사고 이후 일본사회의 의식은 크게 변했다. 아베 정권은 원전재가동에 필사적이지만 여론조사를 하면 재가동 반대여론이 절반을 넘는다. 일본근대사 권위자인 도쿄대 미타니 히로시(三谷博) 교수의 말을 빌면 “일본인들은 원전사고를 계기로 원자력이 ‘독’임을 체감했다.” 원전사고 3년을 맞은 지난 3월9일 도쿄도심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 열린 집회에선 여전히 수천명의 시민들이 참가해 탈원전을 외쳤다. 


항의집회는 때가 되면 꾸준히 열리지만 정부의 정책을 바꿀 정도에는 미치지 못한다. 더구나 2012년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중국과의 센카쿠(尖閣)열도 영유권 분쟁에 여론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탈원전’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그해 12월16일 일본 중의원(하원) 총선에서 탈원전 이슈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필자는 탈원전과 영토분쟁이 뒤섞이던 당시 상황이 뭔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탈원전 이슈가 표출된 뒤 반드시 영토문제가 불거지면서 여론의 관심을 덮어버리는 일이 되풀이 됐기 때문이다. 


우선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유신회 공동대표가 도쿄도지사 재임중인 2012년 4월16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자리에서 “민간인이 소유한 센카쿠를 도쿄도가 사들여 관리하겠다”며 중·일간 영토분쟁의 씨앗을 뿌린 시점이 묘하다. 대표적인 원전 찬성론자이기도 한 이시하라의 발언이 나오기 사흘전인 4월13일, 노다 총리는 각료회의를 열어 간사이(關西)전력의 오이(大飯)원전 2기를 재가동하기로 하고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주민설득에 나서기로 하던 직후이기 때문이다.


원전보다는 영토분쟁으로 관심 돌리려는 정치인들


그해 7월7일에는 노다 총리가 ‘센카쿠 국유화’ 방침을 꺼냈다. 이는 20만명(주최측 추산)에 달하는 시민들이 총리관저 일대에 운집해 ‘원전 재가동반대’를 외쳤던 6월29일로부터 8일 뒤다. 이시하라와 노다의 주고받기가 중국을 자극하면서 센카쿠를 둘러싼 중·일 갈등이 9월에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수국혁명’이라는 이름까지 붙을 정도로 뜨거웠던 ‘탈원전’ 운동은 기세가 한풀 꺾였고 언론들도 관심을 접었다. 


영토갈등이 한창이던 9월 미국은 일본 정부가 추진하려던 ‘2030년대 원전제로’ 방안에 제동을 걸었다. ‘탈원전’ 이슈가 영토문제로 희석된 상황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거대한 모종의 힘이 작용한 결과인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다만, 원전사고를 겪은 시민사회에서 ‘쇼에네(省エネ)’로 불리는 에너지 절약의식은 급격히 고양됐다. 미타니 교수는 대지진 이후 일본의 변화에 대해 “정전으로 모두들 고생했지만, 그 덕에 절전인식이 정착됐다”고 했다. 기업들에 비해 다소 에너지 낭비적이던 가계의 생활패턴이 크게 달라졌다는 평가다. 


저에너지로 향하는 사회, 원전이 남긴 성과


기업들은 저에너지 주택인 ‘스마트 하우스’ 개발과 연비를 크게 낮춘 자동차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전력부족 사태를 겪은 소비자들은 후세의 나은 삶을 위해 다소 돈이 들어도 에너지절약형 상품을 선택하는 ‘사회적 소비’를 실천했다. ‘나쁜’ 에너지 대신 태양광과 풍력, 지열 등 ‘좋은’ 에너지의 비중을 늘리려는 민간차원의 노력도 본격화하고 있다.


그 결과 일본은 지난 3년간 원전 20기분의 에너지 소비량을 줄였다. 도쿄신문이 사고 전인 2010년과 2012년의 8월 전력소비량을 비교한 결과 원전이 대부분 가동 중단되면서 원전 발전량이 90% 이상(240억㎾) 줄었고, 화력·수력을 포함한 발전총량은 120억㎾가 줄었다. 사고 전에 일본 전역에 40기 안팎의 원전이 가동 중이었음을 감안하면 단순 계산으로 원전 20기분의 발전량에 해당하는 절전이 이뤄진 셈이다. 


대지진 이후 3년간 이뤄진 절전 노력으로 일본은 원전 1기 안 돌리고도 혹한과 혹서를 거뜬히 넘기고 있다. 탈원전을 둘러싼 논란을 잠시 접고 본다면 일본의 ‘탈원전’은 미래의 꿈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실일지도 모른다.


※녹색평론 2014년 5~6월호에 쓴 글입니다 


Posted by 서의동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어린토끼 2014.05.26 18: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섭네요... 방사능도 무섭지만, 현실에 무뎌져가고, 회피한다는게 무서워요. 큰 일이 발생했을 때 괜찮을거라고 믿어버리는게 사람의 본능인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문화인 일본에서는 그게 더 심하겠네요. 하지만 방사능의 위험은 너무나 명확한 것... 원전사고 발생 직후부터 지금까지 사고수습을 지켜만보고 적극적 행동을 하지 않는 정부가 무능해보이네요. 초기 대응만 잘했어도 훨씬 나았겠죠. 참... 기술이 많이 발달하고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지만, 이렇게 재해가 발생했을 때 소위 윗사람들의 대응을 보면... 좋은 세상이란 아직 멀었나봐요~

    • Favicon of https://soidong.khan.kr BlogIcon 서의동 2014.05.30 15: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에 수많은 이권이 개입하는 구조인데다가 해당 자치단체는 그걸로 덕을 크게 보고...암튼 여러가지 얽히고 설킨 문제가 많은 듯 합니다.

  2. BlogIcon 김기숙 2014.06.20 1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차분하지만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일본의 상화을 보며 우리나라 원전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기자님 말씀처럼 세월호 참상을 보면 우리 정부의 무능에 분노하고 가슴아하했는데,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터지면 과연 지금 정부가 무엇을 할수 있을지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계속 좋은 기사 부탁드립니다^^

    • Favicon of https://soidong.khan.kr BlogIcon 서의동 2014.07.18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원전문제는 정말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그래도 국토가 우리보다 넓은 편이어서 그럭저럭 견디고 있지만, 한국은 상황이 또 다르지요.

  3. BlogIcon kaya 2014.10.08 0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기사 잘 봤습니다 만일 정말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면 큰일이었져 국토도 가뜩이나 적은데 분명 정부는 자신들이 먼저 떠나갔을거라고 생각할거에여 이번 세월호 사건덕에 정부와 국회에 신뢰가 아예 사라졌어여 맨날 싸우기만하고 밥그릇 뺏으려하는 정부는 이제 바꿔야해여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n_jihyeon BlogIcon 시크한토끼 2015.05.14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정말 잘 읽고갑니다. 현재 이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ㅜㅜ 네이버 블로그에서 어떤분이 3~4년간 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의 반응 및 기사와 기타 지진 괸련 자료를 번역해서 올려주셨던 게 생각나네요 ㅜㅜ 지금은 더이상 포스팅하지 않습니다만 이렇게 기사로 접하니 더더욱 걱정이 돼요 ㅜㅜ 요즘 환태평양 조산대나 네팔에서 지진이 문제라 걱정이 큽니다 ㅜㅜ 바로 어제 동일본에서 규모 6.8의 강진도 있었다하니... 미리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게 없어 안타깝습니다 ㅜㅜ

    • Favicon of https://soidong.khan.kr BlogIcon 서의동 2015.05.14 15: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지진이 많이 나서 걱정이긴 하네요. 후쿠시마 원전 복구현장도 지진에 무사해야 할 텐데 말이죠.

  5. 레몬 2015.05.31 0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검색하다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저도 모르게 시간을 잊고 정독했습니다. 정말로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일본에서 인생의 일부를 보냈고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참사가 있기 몇개월 전에 귀국하긴 했습니다만) 여러가지 면에서 일본과 떨어질 수 없는 처지에서 원전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한 채 애써 찜찜한 기분을 지우며 일본을 왕래했었는데, 그 찜찜함의 근원을 비로소 깨달은 기분입니다. 일본을 찾는 것을 그만 두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문제점에 봉착해있고 그 원인이 무엇이며 현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지를 아는 것 만으로도 뭔가 약간 위안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일본에 사는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원전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기는 참 저도 난감해서 알기가 쉽지 않았으니 말이죠. (그러고보니 저 위에 '종교문제화'에 관한 부분에서 무릎을 치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 조차도 왜 난감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셨네요.)

    시간이 나거든 링크된 관련 기사도 정독해보고 싶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타지에서 지낸다는게 녹록한 일이 아닌데, 계속 힘내주시기 바랍니다.

    • Favicon of https://soidong.khan.kr BlogIcon 서의동 2015.05.31 14: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3년여 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이미 귀국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한국에서 만나는 일본인들에게 방사능 문제를 거론하기가 꺼려집니다. 그들은 정말로 의식을 하지 않는 듯한 태도여서 말이죠.

2014. 4. 7. 16:53

ㆍ아사히신문 조사… 상호 혐오·역사인식 차이 증가세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간 갈등의 장기화로 이들 국민 사이에서 상호 혐오감이 커지고 있으며, 과거사·안보에 관한 인식차도 심화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중·일 3국 국민은 동아시아 안보 위협으로 한반도 정세보다 영토분쟁을 더 꼽을 정도로 서로를 위험시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아사히신문이 한·중·일 국민 4000여명을 대상으로 지난 2~3월 실시해 7일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각국에 대한 호불호를 묻는 질문에 한국 응답자는 67%가 ‘일본이 싫다’고 답했고, 4%만이 호감을 표시했다. 일본인도 ‘한국이 싫다’는 응답이 34%로, ‘좋다’는 응답(8%)의 4배가 넘었다.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조사에서 상대국이 싫다는 응답이 각각 74%, 51%로 반을 넘었다. 한국과 중국이 싫다는 일본인의 응답은 2005년 조사보다 각각 12%포인트, 23%포인트 늘어났다.

역사인식에서도 한국·중국인과 일본인 간에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중·일전쟁, 식민지배 등 과거사 문제에 한국인 97%, 중국인 88%가 매듭지어지지 않았다고 평가했지만, 일본인은 47%가 ‘끝난 일’이라고 응답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도 일본 정부가 피해자에게 정식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한국인 응답자가 95%에 이르렀지만, 일본에서는 정식으로 보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답변이 63%였다. 야스쿠니신사의 성격에 관해 한국인(73%)과 중국인(77%)은 군국주의의 상징이라고 평가했지만 일본인(64%)은 전사자를 추도하는 곳이라고 답했다.

이번 조사에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영토문제’를 꼽은 응답률은 한국인이 58%, 중국인이 36%, 일본인이 63%로, 한반도 정세를 택한 응답률(한국인 50%, 중국인 21%, 일본인 38%)을 웃돌았다.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 등 동아시아 영토갈등이 북한보다도 더 현실적인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Posted by 서의동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4. 4. 6. 22:30

ㆍ북, 추가 미사일 발사 통보

ㆍ일도 경계수위 하향 배려
ㆍ“이틀간 납치 문제 등 논의”

1년4개월여 만에 정부 간 교섭을 벌이고 있는 북한과 일본에 훈풍이 불고 있다. 북한이 중거리 미사일 발사 계획을 일본에 미리 알려주는가 하면 일본도 미사일 파괴명령을 비공개로 하고 경계수위를 대폭 낮추는 등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일 당국은 지난 5일부터 비공개 접촉 중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어 납치 문제 등 북·일 현안에 모종의 결과가 도출될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지난달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북·일 정부 간 협의 과정에서 ‘이달 17일까지 동해에서 해상포격과 미사일 발사 연습을 할 예정’이라고 일본에 비공식 통지했다고 마이니치신문이 지난 5일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북한은 어떤 미사일을 발사할지 결정되지 않았고, 외교당국이 군에 사정거리가 짧은 미사일로 한정할 것을 요구했다고 설명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북한은 또 지난달 26일 ‘노동’으로 추정되는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에 관해 ‘사정거리를 (늘리는 것을) 자제했다’며 일본을 배려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마이니치는 미사일 추가발사 계획이 이달 18일까지 실시되는 한·미 합동 독수리 훈련에 대한 반발이며, 일본에 비공식 통지한 것은 북·일 교섭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사히신문은 북한 미사일 재발사에 대비해 오노데라 이쓰노리(小野寺五典) 방위상이 지난 3일 자위대에 파괴조치 명령을 내리고 요격태세를 지시했으나 ‘국민의 불안을 부추기지 않고 북·일 외교관계를 배려한다’는 이유로 명령을 공표하지 않았다고 5일 보도했다. 

자위대는 해상요격형 미사일(SM3)을 탑재한 이지스함 기리시마를 훈련 명목으로 동해에 배치해 경계 중이지만, 지대공 미사일 패트리엇(PAC3)은 동원하지 않는 등 경계수위를 대폭 낮췄다. 

북·일 양측은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일본 언론은 양측이 6일 현재 접촉 중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교도통신은 지난 5일 비밀 회담이 금명간 중국에서 열릴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으며, 산케이신문은 북한의 요청으로 5~6일 제3국에서 긴급 회담이 열렸다고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회담에서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본부 건물의 매각 문제와 일본인 납치피해자 문제 등이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서의동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4. 4. 4. 22:30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일본 정부도 할 만큼 했다.’


4일 일본 정부가 각료회의에서 통과시킨 외교청서를 통해 일본은 한·일 간 최대 현안인 위안부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면서 일본 정부가 나름대로 노력해왔음을 강조했다. 특히 1990년대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해 위로금을 지급했고, 위안부 피해자에게 총리의 사과편지를 전달하는 등 실질적인 해결 노력을 꾀했다고 주장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측의 공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오던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반론’에 나선 셈이다.

아시아여성기금 등 실질적 노력... 강제연행 문제도 법적 해결 주장

일본 정부는 외교청서에서 “위안부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현실적인 구제를 도모한다는 관점에서, 국민과 정부가 협력해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했고, 의료·복지 지원 사업, ‘위로금’ 지급 등을 실시함과 동시에 역대 총리로부터 위안부 피해자 개개인에 대해 ‘사죄와 반성의 심정’을 전달하는 편지를 송부해왔다”고 밝혔다. 외교청서는 “일본으로서는 이 문제를 포함해 한·일 간 재산·청구권 문제는 법적으로 완전히 해결됐다는 입장”이라며 “일본은 성의를 갖고 노력해왔다”고 주장했다. 

외교청서는 이어 “그러나 한국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일본에 추가적인 대처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며 “일본으로서는 이 문제를 정치·외교문제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계속해서 일본의 입장과 지금까지의 진지한 노력에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교청서는 또 일제 강제연행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서도 “한일청구권·경제협력협정으로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일관된 입장에 의거해 앞으로도 적절히 대응해 나가겠다”고 지금까지의 일본 정부 입장을 재확인했다.

지난해 외교청서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위안부 문제,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 문제, 사할린 주재 한국인 지원, 한국 내 원폭 피폭자 문제에 대한 대응, 한국 내 한센병치료소(소록도 소재) 입소자에 대한 대응 등 다기에 걸친 분야에서 일본은 진지한 노력을 해왔다”며 간단히 언급하는 데 그친 것과 대조적이다. 

외교청서에서 드러난 일본 정부의 인식은 1990년대 아시아여성기금 등을 통해 위안부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 노력을 꾀했지만 한국 측이 이를 외면함으로써 사태가 꼬이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정부 고위당국자는 지난달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아시아여성기금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외교청서의 위안부 기술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요구해온 정부 차원의 사죄와 배상에 응할 의지가 없음을 재확인한 것이다. 한·일 간 현안을 다루기 위한 국장급 협의에서 한국의 뜻대로 위안부 문제가 논의되기 어려울 가능성도 아울러 시사한 셈이다.


Posted by 서의동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4. 4. 4. 16:45

ㆍ“일본의 고유 영토” 기술 4종 검정 통과… 외교청서도 ‘영유권 주장’

ㆍ정부 “터무니없는 역사왜곡 유감”… 일선 학교 독도 교육 강화키로

내년부터 일본 초등학교 5·6학년이 사용하는 모든 출판사의 사회교과서에 ‘일본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했다’는 내용이 실리게 된다. 현재 교과서에 비해 독도에 대한 일본 영유권을 서술한 교과서가 크게 늘어나고, 서술 강도도 더 세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 학생들의 ‘반한(反韓)감정’이 어릴 때부터 고착화되고, 한·일관계 개선은 더욱더 힘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4일 교과용 도서 검정조사심의회를 열어 이런 내용이 담긴 초등학교 5·6학년 사회교과서 4종을 전부 합격 처리했다. 2010년 검정을 통과해 현재 사용 중인 교과서 5종 가운데 독도를 일본 영토로 서술한 교과서는 1종뿐이며, 나머지는 지도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표시했으나 이번엔 ‘독도는 일본땅’이란 기술과 지도를 함께 실었다. 영토에 대한 일방적 주장을 강화한 반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2010년에 이어 검정통과 대상 교과서 모두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이번 검정 결과로 일본 초등학생들이 독도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도발적 주장을 배우게 돼 ‘반한감정’이 조기 고착화할 것으로 보인다.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상은 검정 결과와 관련해 “자국 영토를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또 이날 각료회의에서 통과시킨 외교청서를 통해 “독도는 역사적 사실로도 국제법상으로도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이 문제를 포함해 한·일 간 재산·청구권 문제는 법적으로 완전히 해결됐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불과 3주 전 국회에서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공언했다”면서 “일본 정부가 교과서 검정제도를 빙자해 독도 도발을 계속한다면 한·일관계 개선의 길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경고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또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외교청서를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에 대해 또다시 터무니없는 주장을 반복한 데에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억지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일본이 제국주의 침탈 역사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일관계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도 심각한 손상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교육부는 오는 6월까지 초·중·고 학교급별 독도 교재를 개발해 연간 10시간 내외의 독도 교육을 하기로 했다.



2010년 지도에 독도 영유권 표시 → 2014년 “불법점거 항의” 기술


ㆍ새 검정본도 위안부 기술 빠져…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포함
ㆍ출판사들 아베 정권 입맛 맞춰… ‘독도 탈환’ 세뇌 미래갈등 우려
ㆍ2002 한·일월드컵 개최도 삭제

“일본해에 위치한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어 일본 정부는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미쓰무라(光村) 출판사 사회교과서 올해 검정통과본)

2014년 일본 초등학교 사회교과서 검정결과의 특징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해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점에 있다. 아베 총리와 아베 내각에서 가장 우파로 분류되는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상이 집권 초기부터 교과서 검정제도의 개편에 힘을 쏟은 결과가 이번 검정결과로 나타난 셈이다. 자라나는 세대가 학교 수업시간에 ‘독도는 일본 땅으로 한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다’고 교육받으며 ‘반한(反韓)감정’에 사로잡히게 될 경우 한·일관계의 장래에 미칠 악영향은 가늠하기 어렵게 된다.

멋대로 ‘다케시마’ 고유영토 표기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가 4일 서울 미근동 재단 자료실에서 일본 교과서 회사 교육출판이 발행한 현행 초등학교 5학년 사회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영토 ‘竹島(다케시마)’로 표기된 것을 가리키고 있다. 홍도은 기자자


2010년 검정을 통과한 현행 5·6학년 사회교과서에도 ‘독도는 일본 땅’ 내용이 포함돼 있지만 4개 출판사의 교과서 5종 중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기술이 담긴 것은 니혼분쿄(日本文敎) 출판의 교과서 1개뿐이다. 나머지는 교과서에 수록된 참고용 지도상 독도 좌측에 국경선을 표기하고, 독도를 자국식 표현인 다케시마로 적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4개 출판사의 5·6학년 사회교과서는 모두 예외 없이 “다케시마는 일본의 고유 영토” “한국이 불법으로 점령(또는 점거)”이라는 표현을 담았다. 또 4개 교과서 중 교육출판의 교과서는 평화적 해결의 필요성을 언급했으나 나머지 3개 교과서는 이런 내용조차 없어 어린 학생들에게 힘으로라도 되찾아와야 한다는 오도된 인식을 심어줄 가능성도 크다. 특히 미쓰무라 도서는 현행 사회교과서에 실려 있는 ‘2002년 양국이 협력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축구 월드컵을 개최했다’는 구절을 빼고, 한국의 독도 점거에 일본이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는 내용을 넣었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의 역사 관련 기술 내용은 대체로 2010년 검정을 통과한 현행 교과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은 2010년 검정통과본과 마찬가지로 4개 교과서 모두 거론하지 않았으나, 재일조선인 6000여명이 일본 군대와 경찰, 민간인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간토대지진 관련 내용은 모두 기술됐다. 또 도쿄서적 6학년 교과서는 2010년과 유사하게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을 미화하는 기술을 넣었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내용은 제2차 아베 내각이 출범한 지 5개월째인 지난해 4월쯤 각 출판사들이 검정 신청한 내용을 문부성이 약 1년간 심사해 확정한 것이다. 대부분 출판사가 신청한 원안이 그대로 통과된 것으로 알려져 출판사들이 아베 정권의 의중을 읽고 ‘알아서 긴’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 도발은 앞으로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시모무라 문부상이 지난 1월 근현대사와 관련해 ‘정부의 통일된 견해’를 기술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교과서 검정 기준을 개정한 데 이어 같은 달, 중·고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교과서 제작의 기준이 되는 지침서)에 ‘독도는 일본 고유 영토’ 주장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15년 중학교 교과서와 2016년 고교 교과서의 검정과정에서 난징대학살 등 일본의 과거 잘못에 대한 기록은 대폭 축소되거나 삭제되는 한편 독도 영유권 주장이 한층 강화되면서 과거 잘못은 모른 채 주변국에 적의를 갖는 세대들이 양산될 가능성이 높다.

■ 일본의 교과서 검정제도- “집필자 사상, 검증 대상 아냐” 

한·중 반발에 개입 불가 고수 일본의 교과서 검정제도는 민간 전문가와 교과서 회사가 집필·편집한 원고 단계의 교과서 기술을 문부과학성이 심사하는 제도이다. 구체적으로는 문부성의 ‘교과서검정심의회’가 교과서 기술이 학습지도요령과 검정 기준에 의거해 객관적으로, 적절한 교육적 배려하에 쓰였는지를 심사해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교과서 회사는 이 과정에서 문부성의 ‘검정 의견’이 내려지면 이에 맞게 내용을 수정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학습지도요령의 범위 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교과서에 기술할 것인지는 집필자 또는 발행자의 판단에 맡기고 있으며, 집필자의 사상은 검정 대상이 아니라고 밝혀왔다. 일본은 특히 교과서 역사 기술을 둘러싸고 한국, 중국이 반발할 때마다 이러한 검정 제도의 ‘특성’을 내세워 정부가 교과서 기술 수정 등에 개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문부성은 지난 1월 근현대사를 기술할 때 정부 견해를 존중하도록 검정 기준을 개정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난징대학살 등 역사 관련 기술에 대한 정부 개입의 여지를 열어놓았다. 새 검정 기준은 올봄 신청을 받은 중학교 교과서 검정부터 적용되기 때문에 이번에 검증 결과가 발표된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이 기준이 적용되지 않았다.


Posted by 서의동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