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만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종전선언에 곧 서명하겠노라고 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로 보인다. 북한 외무성이 지난 7월 성명에서 밝혔고, 미국 언론도 확인해 보도했다. 이 말썽 많은 종전선언의 표류 경위는 북·미 협상 2라운드의 향방을 가늠해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짚어봐야 한다.
올 들어 북한은 미국에 몇 가지 선물을 조건 없이 건넸다.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억류 미국인 3명 송환, 핵·미사일 시험발사 중단 같은 것들이다. 비슷한 무게의 조치들을 기계적으로 주고받는, 복잡다단한 상호주의가 신뢰 구축은커녕 불신만 키웠던 실패의 경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지난 25년간 북·미 협상은 으슥한 공터에서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상대 패거리들을 노려보면서 마약과 돈가방을 주고받는 마피아식 거래와 다를 게 없었다.
하여 북한은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와의 협상에서 먼저 선물을 주는 것으로 초기 신뢰를 사는 ‘비(非)등가성 거래’를 시도했다. 그건 연애 초기에 흔한 방식으로, 빠르게 상대의 호감과 신뢰를 얻는 길이자 상대의 상응조치를 유도하는 행위다. 트럼프가 회담장에서 종전선언 서명 약속을 한 것은 이 새로운 접근법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담긴 ‘상호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한반도 비핵화를 증진할 수 있다’는 문장이 말해준다.
당시 트럼프는 북한의 선제적 조치를 평가하고 비핵화 의지를 정말로 신뢰한 듯하다. 오전 9시 회담을 시작해 오후 2시가 안돼 공동성명 서명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을 보면 이렇다 할 의견대립도 없어 보인다. 북한 외무성이 7월7일 발표한 담화에도 “짧은 시간에 귀중한 합의가 이룩된 것도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조·미관계와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자고 했기 때문”이라고 돼 있다. 더구나 종전선언은 북한 외무성의 표현을 빌리면 “트럼프 대통령이 더 열의를 보였던 문제”였다.
보수적인 북한 전문가들은 그간의 북·미 합의와 스타일이 전혀 다른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경악했다. 비핵화를 아래에, 관계 정상화를 맨 위에 세운 합의는 ‘콜럼버스의 달걀’만큼 창의적이었지만, 이들에겐 ‘악마와의 서약’처럼 비쳤을 것이다. 곧 반동(反動)이 시작됐고 서로 믿기 위해(신뢰 구축) 만든 합의를 상대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불신하는 기묘한 논리에 트럼프 마저 포위되면서 종전선언은 넉 달째 표류 중이다.
북한의 협상전술은 이탈리아 소시지 ‘살라미’로 비유된다. 살라미를 얇게 자르듯 핵포기를 세분화해 하나씩 주면서 그때마다 보상을 챙긴다는 뜻인데, 올해만 놓고 보면 틀린 표현이다. 북한은 살라미를 몇 점 썰어 내놓기라도 했지만, 미국은 칼을 들 생각조차 않고 있다. 한·미 연합훈련은 중단한 상태이니 포장만 끄른 정도일까. 그런데도 이 불균형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은 평양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북한의 살라미 전술에 놀아났다”고 했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
선물은 언제 어떤 태도로 주느냐가 내용물 이상으로 중요한 법이다. 흔쾌히 서명했더라면 비핵화의 강력한 촉진제가 됐을 종전선언은 4개월을 묵히면서 빛이 바래고 있다. 미국이 움직이지 않는 동안 김정은 위원장은 보수세력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육성’으로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 북한은 ‘미국이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다’고도 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오는 7일 방북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난다. 북·미 협상 2라운드는 ‘호혜적 상호주의’로 진행되길 기대한다. 마피아 같은 ‘적대적 상호주의’나 일방적인 양보만을 강요하는 협상이 돼선 불신만 커질 뿐이다. 북한의 비핵화 관련 조치들에 제대로 값을 매겨 그에 걸맞은 ‘상응조치’를 미국은 해야 한다. 제재 완화가 상응조치에 포함되면 핵을 버리고 경제를 얻으려는 북한에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백두에서 한라까지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 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확약했습니다.” 능라도 경기장에 모인 평양시민들은 문재인 대통령 연설의 이 대목에서 잠시 멈칫했다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 멈칫거림은 아마도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 같은 것 아니었을까. 핵을 놓고 경제를 선택하려는 김정은 위원장에게도 그런 순간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에 대한 신뢰를 심고, 그가 결단할 시간을 주는 것이 폼페이오의 임무다. (경향신문 2018년 10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