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1
1994년 11월1일 열린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집권여당인 민자당의 노재봉 의원은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이 ‘환상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이는 북한이 우리를 제치고 미국과 직접 담판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의 화근을 초래했다”고 했다.
노 의원의 발언은 북·미가 3단계 고위급회담에서 기본합의에 서명한 지 열흘 뒤 나왔다. 미국이 북한의 핵동결 대가로 경수로 발전소 2기를 지어주고 수교를 포함한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자 한국 보수세력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노 의원의 발언은 “지난 50년간 나라를 좌우했던 극우·반공·냉전·독재체제의 타락한 기득권 집단들과 개인들의 울분”(리영희 당시 한양대 교수)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어쨌거나 당시 등장한 사자성어 ‘통미봉남’은 상황에 따라 ‘통남봉미(通南封美)’ ‘봉남봉미(封南封美)’ 등으로 변주되면서 한반도 정세를 설명하는 시사용어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지난 19일(현지시간)부터 스웨덴 외교부 주최 국제 콘퍼런스에 참석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간의 실무협상에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동석한 상황은 ‘통미통남(通美通南)’이 될 것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21일 “제네바 북·미 회담은 ‘통미봉남’ 시대로, 당시 북한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을 왕복하며 회담했는데 우리는 담벼락(회담장 부근)에서 기다리다가 미국 대표들한테 브리핑 받아 본부에 보고하는 서글픈 시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북한, 미국 공히 한국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된 것은 문재인 정부의 ‘중재 외교’가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북·미 협상이 급류를 탈 기미를 보이자 ‘재팬 패싱’을 걱정한 일본 6자 회담 수석대표가 급거 스웨덴으로 날아갔다. 일본 외무성은 가나스기 겐지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비건 미국 대표를 만나기 위해 스웨덴을 방문한다고 밝혔지만, 콘퍼런스의 정식 초청대상이 아니어서 ‘담벼락에서 대기하는’ 처지가 될 것 같다. 이런 ‘통미통남봉일(通美通南封日)’ 상황이 왜 초래됐는지는 일본 정부가 더 잘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