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읽고 있다. 1부만 끝내고 아직 2부는 시작하지 않았는데, 1부는 1945년 이전사부터 시작해 1946년말까지를 다룬다. 방대한 자료 조사에 근거한 그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접근들을 메모해둔다.
1. 커밍스는 한국의 토지소유 관계와 한국전쟁과의 관련성을 깊이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시기에 이르는 전사(前史)에 대한 개괄도 적지 않은 분량으로 다루면서 급진적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한국의 토지문제(지주-소작관계)는 희망이 없다고 봤다. 토지문제를 한국이 안고 있던 기본모순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2. 일본의 1930년대 산업정책으로 토지를 이탈해 만주와 일본으로 수백만이 이동했다가 해방을 맞아 대거 귀환했던 것, 그들이 꾹꾹 눌러놓은 에너지의 폭발력에 주목했다. 일제말의 강제동원을 포함하면 그 단기간에 일제 치하의 한국보다 더 많은 인구이동과 혼란이 일어난 사회가 없을 정도였다. "짧은 기간에 해외에 있었던 한국인들은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재산을 잃었으며 깊은 불만을 품고 돌아왔다. 그들은 토지를 분배하고 한국인을 외국으로 이주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옛 식민 관료를 쫓아내라고 요구하는 집단의 준비된 신입회원이 됐다."(112쪽)
3. 해방공간에서 지방의 자율성과 역동성에 주목했다. 해방되던 8월부터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단체들의 대중조직들이 각 지방에서 설립됐다. "1945년 8~9월 노동자 농민조합이 자발적이고 분권적인 방식으로 급속히 성장한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조합이 성장한 배후에 어떤 중앙조직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중략) 11월~12월 지도자들은 서울에서 최종적으로 전국적 대중조직과 중앙사무소를 설립한 뒤 전체 과정을 추인 받았다."(134쪽)
4. 앞과 관련된 내용인데, 커밍스는 좌우를 구분하지 않고 중앙정치에 비판적이었다. "인공 지도자들은 오래 유지되는 조직을 건설하는데 미숙했고 지방에 깊이 뿌리내린 정치운동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도시지역,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다른 정파나 정당과 제휴하려고 시도했다. 기이한 역설은 그들이 서울의 피로한 정치에 빠진 결과, 지방에서 발생한 운동을 스스로 약화시켰다는 것이다."(148쪽)
5. 미군의 점령 초기 일본의 적극적인 가스라이팅 공작이 미군에 먹혀들었다는 점에 커밍스는 매우 주목했다. "1945년 8~9월 미 점령군에게 한국인은 적국에 준하는 국민으로, 일본인은 우방국의 국민으로 바뀌었는데 소련을 동맹국으로 본 전시의 평가가 변화하면서 미국의 한국 인식은 물론 점령과 통제의 필요성에 직접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중략) 진정한 역설은 일본에 실시하려던 군정이 한국에서 시행됐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한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군정이 실제로 수립된 유일한 나라"가 됐다"(192~193쪽)
6. 하지를 비롯한 미군의 친일행적에 대한 소상한 비판이 이어진다. ①하지는 9월9일 항복의식을 치른 뒤 총독부 모든 일본인과 한국인이 업무를 계속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② 아베 노부유키 총독의 심복인 오다 야스마가 미군의 주요 정보원 노릇을 하며 가스라이팅을 했다. 일본인 관료들은 1945년 8~10월 350건의 보고서를 영어로 작성해 군정청에 제출했다." (204~206쪽) "일본인 고문은 고위직에 한국인들을 추천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중략) 그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전에 총독부 관료였거나 한민당 당원이었다."(221쪽)
7. 군정 인사정책의 가장 큰 문제를 식민지 관료기구를 1948년까지 온존시켰으며 경찰은 확대했다는 점이라고 브루스는 지적했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정책과 차이를 생각해보자. 일본에서 미국은 국가를 약화시켰는데, 그것은 일본이 민주화되는 데 장애요소를 적절히 치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체제가 강화됐다." (221쪽)
8. 미군정은 조병옥의 건의로 정치범을 잡는데 사용된 일제 법률을 도로 살려냈고, 점령군의 권한을 최대한 가동했다. 1908년 육군 형법, 1910년 집회취체령, 1936년 불온문서 임시취체법, 1907년 보안법 2호 같은 것들이었다. 군정은 출판물(편지포함) 검열과 모든 정당의 등록을 요구하는 등 군정권한을 마음껏 휘둘렀다. (228~229쪽) 역설적인 것은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는 동안 "지방자치 조직의 통제에서 벗어난 전국적 경찰조직을 가진 옛 제도는 독재적 억압의 도구로 너무 쉽게 사용됐다는 타당한 판단"에 따라 개혁을 추진해 경찰력을 폐지했다는 것이다.
9. 북한에서 피신하거나 해직된 일제강점기 경찰 간부의 다수는 남한으로 와서 군정청 경부무에 합류했다.(236쪽) 경찰의 조직적 기술적 능력이 남한 좌익세력을 종식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을 볼 때 경찰의 축출과 변화를 거부한 하지의 결정은 옳았다. (238쪽)
10. (나중에 제동이 걸리긴 했지만) 하지의 미군정은 북한 보다 이르게 군대 창설을 추진했다. "군대를 창설하려는 소련의 움직임을 가장 이르게 보고한 미국 G-2 보고서는 미국이 먼저 행동에 착수하고 거의 6개월 뒤에 나왔다."(240쪽)
11. 미국은 일본에서 고위군인들을 전범으로 처리한 반면 한국의 친일 장교들은 국방경비대의 지휘권을 받게 했다. 미군은 광복군 인사들이 귀국하면 국방경비대에 참여할 것으로 내다봤으나 이범석 같은 극우조차 꺼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국방경비대와 나중의 한국군은 일본군 출신 장교의 전유물이 됐다. (244~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