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 너무도 다른 학창시절

서의동 2014. 5. 28. 15:46

지난해 일본아카데미상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요코하마영화제, 마이니치영화콩쿨 등에서 각종상을 휩쓴 영화 <기리시마, 부카츠 그만둔대(桐島, 部活やめるってよ)>는 일본 지방 고교의 부카츠(部活·클럽활동)를 소재로 한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다. 배구부 주장에 학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기리시마가 배구부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소식을 계기로 학생들 사이의 미묘한 인간관계가 표면화되는 과정을 묘사했다.


영화에는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면 어김없이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배구·배드민턴 연습을 하며 땀을 쏟거나 관현악부에서 연습에 열중하는 장면들이 비친다. 대회를 앞두고 기리시마가 빠지면서 위기에 처한 배구부원들은 한층 더 연습에 몰입한다. 영화부원들은 학교건물 옥상이나 건물 뒤 공터에서 열심히 8㎜ 카메라를 돌린다. 


동아리 대신 입시학원 다니는 '귀가조'는 소수


학급내에서는 다소 겉도는 한 여학생이 수업이 끝나면 수십명의 관현악부를 지휘하는 권위있는 대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고 입시학원으로 직행하는 ‘귀가조’도 없지 않지만 소수에 속한다.


영화 <기리시마 부카츠 그만둔대>

 

<기리시마>를 보고 나서 주변의 일본인들에게 ‘학교다닐 때 어떤 부카츠 활동을 했는지’를 물어보는 게 버릇이 돼 버렸다. 지난해 도쿄의 중위권 사립대학에 진학한 한 재일동포의 딸은 고교시절 리듬체조 동호회를 했다고 한다. 대회에 입상할 정도의 실력도 아니고, 학교에서 정식 클럽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지만 입시준비가 한창인 고3 때에도 거르지 않고 연습을 계속했다. 


진학생도 예외없는 방과후 활동 


사립명문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졸업한 일간지 기자는 고교시절 록밴드를 결성해 기타와 보컬을 담당했다. 시민회관에서 록밴드 공연까지 했다는 그는 쉰이 넘은 나이에도 당시의 추억을 자랑스럽게 회고한다. 

도쿄 오타(大田)구에 있는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JR역인 카마타(蒲田)역 구내에는 주말이면 체육복 유니폼 차림의 중고생들이 곳곳에 모여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주말도 반납한 채 부카츠 연습을 하기 위해 모였지만 즐겁게 떠드는 얼굴들을 보면 절로 흐뭇해진다. 집 부근 타마가와(多摩川) 둔치에는 수십개의 야구·축구 그라운드가 설치돼 있어 주말이면 이곳에서 유니폼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 쓰며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응원차 나온 가족들로 늘 축제 분위기다. 

일본에서는 명문대학 진학을 꿈꾸는 학생들도 부카츠를 거르지 않는다. 30년 연속 도쿄대 합격자 1위인 도쿄의 가이세이(開成)중고교에는 50개의 공식클럽과 15개의 동호회가 활동하고 있다. 이 학교 홈페이지에 실린 운동부 클럽에는 축구, 농구, 배구, 검도, 유도 등 기본 스포츠는 물론 궁도, 게이트볼, 연식테니스, 핸드볼, 펜싱, 보트(조정), 럭비, 육상 등 다양한 종목이 망라돼 있다. 학술부에는 관현악, 사진, 서예, 바둑, 연극은 물론 마술, 퀴즈연구, 철도연구부 등 ‘오타쿠’적인 클럽도 즐비하다.

 

도쿄대 교수를 지낸 뒤 2011년 부임한 야나기자와 유키오(柳澤幸雄) 교장은 한 인터뷰에서 “본교는 지력(知力) 만이 아니라 학생들이 사회성과 윤리성을 높이도록 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를 배양하기 위해 부카츠 활동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가이세이 중·고교에 입학한 중학교 1년생 301명중 96%인 288명이 클럽·동호회에 참가한다. 운동회와 문화제, 수학여행 등을 준비하는 각종 위원회 활동까지 포함하면 연인원 620명, 즉 1인당 2개 이상의 과외활동에 참가하는 셈이다.


선배와의 인적교류도 부카츠의 한 부분


이 학교에 입학한 중학교 1년생들은 입학후 2주뒤에 열리는 쓰쿠바대 부속고교와의 보트경기 대항전에 참가하기 위해 고3 선배들로부터 응원가를 배운다. 5월의 둘째 일요일에 열리는 운동회에서 학생들은 기마전에 참가하는 데 이 지도도 고교선배들이 담당한다. 5월말 중간고사 마지막날이 되면 클럽 설명회가 열려 어떤 동아리에 들어갈지를 결정한다. 보트경기와 운동회 과정에서 선배들과의 접촉을 경험한 학생들중에서는 “저 선배가 지도하는 클럽에 들어가고 싶다”고 미리 결정해둔 이들도 적지 않다. 부카츠 참가율이 높은 데는 이처럼 선배와의 인적교류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이세이 학생들의 부카츠 활동은 대체로 고교 3학년 5월 운동회때까지 이어진다. 중고교 5년여간 갈고 닦은 기량을 고교 마지막해 운동회에서 ‘완전 연소’시킨 다음에야 수험생 모드로 돌입한다. 이처럼 강약조절을 함으로써 입시준비의 집중도도 높아진다고 학교측은 설명한다. 부카츠를 통해 의기투합한 친구들이 자체적으로 입시준비 동아리를 만들어 서로 도우면서 공부하는 환경도 조성된다.

 

학과수업과 부카츠를 병행하는 만큼 효율적인 시간관리 습성이 몸에 배는 것도 장점 중 하나다. 


“중학생때는 주로 선배들의 지도를 받는 입장이지만 고2~3년이 되면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돼 고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자연스럽게 리더십이 형성되는 것도 부카츠의 장점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대화하는 배려심과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길러지게 되지요.”(야나기자와 교장)


학창시절의 덕목인 '문무양도'

동네사람 아들중 올해 와세다대에 입학한 후지사와 료(19)는 중학·고교시절 6년간 부카츠로 검도를 했다. 고교시절에는 매주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연습을 하고, 방학때는 지방에서 1주일간 합숙훈련도 한다. 한해에 지구단위의 학교대항전과 소케이센(早慶戰·와세다-게이오간의 고교대항전)을 포함해 최소 5차례 이상 시합이 열린다. 꽤나 빡빡한 일정이지만 료는 물론 부모도 부카츠를 절대 지지한다.


료의 어머니는 “특히 운동부는 상하관계가 엄격하기 때문에 아이가 가끔 갈등하기도 했지만 그런 과정을 겪으며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물론 스포츠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일부 소수는 추천입학으로 진학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취미활동이다. 학교측도 부카츠를 열심히 한 학생에 대해서는 내신성적을 좋게 매기는 배려정도는 한다.


일본 어느 학교의 밴드부


꼭 부카츠가 아니라도 일본 학생들은 체육활동을 열심히한다. 그걸 '군국주의의 잔재'로 볼 필요는 없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 도다 이쿠코의 말이다. 


"일본에서는 소학교(초등학교) 시절부터 정규 수업시간에 강도높은 운동을 의무적으로 시킨다. 한주 4시간이나 되는 체육수업 때는 철봉이나 매트운동, 단거리 마라톤, 배구나 농구 등을 시킨다. 철봉이나 뜀틀은 실기시험도 치르기 때문에 잘 못하는 학생들은 늦도록 학교에 남아서 연습을 해야 한다.

게다가 체육수업 외에도 운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내가 다니던 소학교에서는 '숙제를 하지 않으면 운동장 다섯바퀴 돌기' 등의 체벌이 이뤄진다. 또 여름방학에도 라디오 체조를 해야 하고 학교에 가서는 수영 보충수업을 받지 않으면 안됐다. 더욱이 중고교 때는 체육대회 외에도 전교 마라톤대회나 계절마다 반대항 구기대회가 있어 바쁜 나날을 보냈다.

특히 한국과 다른 점은 방과후 클럽활동이 있다. 반수이상의 학생이 참가하고 있어 때로는 정규수업보다 의미가 클 때가 있다.
나는 중고교 6년간 농구부에 소속돼 있어 수업시간 전 1시간, 방과후 2시간씩 운동했고, 여름방학에는 거의 매일 농구연습을 했다. 물론 체육 전문학교를 다닌게 아니고 보통의 진학학교였는데도 말이다."  


부카츠를 소재로 한 영화 <워터보이즈>


내신성적을 잘 받기 위해 부카츠를 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대신 아무리 바빠도 세수나 양치질을 생략할 수 없는 필수적인 과정이며 학교 다니며 공부만 해서는 별 볼일 없는 인생이 된다는 인식이 정착돼 있다. 일본인들은 이를 문무양도(文武兩道)라는 사자성어로 설명한다. 학문과 무예를 치우침없이 닦아야 한다는 옛 성현의 지혜가 학교공부와 과외활동을 병진하는 개념으로 정착한 것이다.

사회 진출 후에도 취미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

부카츠는 고교시절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대학이나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취미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 물론 체육부에서 구타사건 등의 부작용도 없진 않지만 부카츠로 인해 일본인들의 중고교 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의 시공간'으로 남는다. 그런 이유로 일본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은 물론 대중가요에도 중고교 시절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꽤 많다.

2010년에 개봉된 <쇼도 걸즈(書道ガ-ルズ)>는 시코쿠(四國) 에히메(愛媛)현 소도시의 고교의 서예부원들이 마치오코시(町おこし·마을진흥)를 위해 서도 퍼포먼스 고시엔(甲子園)을 개최한다는 스토리다. 썩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일본 고교생들의 부카츠에 대한 열정을 엿보게 한다. 

한국에서 개봉된 <스윙걸즈>나 <워터보이즈>, <으라찻차 스모부>도 부카츠 활동을 소재로 했다. 90년대를 풍미했던 아이돌 가수 모리타카 치사토(森高千里)가 부른 <이 거리>는 고교를 졸업한 뒤 고향을 떠난 친구들과 나눴던 추억을 노래하는 데 학창시절의 추억과 지역커뮤니티에 대한 애정이 오버랩돼 있다.

가이세이 고교 교장이 강조한 것처럼 학생들은 부카츠를 통해 리더십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배우고, 동료·선후배와 우정과 협동심을 쌓는다. 또 스포츠나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내수산업의 유지에 도움이 될뿐 아니라 전통의 계승발전에도 역할을 한다. 학교에서 서예나 궁도, 바둑·장기, 하이쿠(俳句) 활동을 한 이들이 회사에 들어가거나 지역커뮤니티에서 취미활동을 지속하면서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다.

한국의 학창시절은 '만인대 만인의 투쟁' 

한국은 어떨까? 지난해 초 시내버스 광고에 등장했다가 논란을 불러일으킨 학원재벌 메가스터디의 광고문구는 기막힌 한국고교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가 계획한 공부는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수능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

‘좋은 대학이 인생을 결정하는’ 교육현실 속에 한국의 중·고교시절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모라토리엄’의 시공간, 좋은 내신을 받기 위한 ‘만인대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전락했다. 가장 빛나야할 청춘시대가 중세시대를 연상케하는 암흑시대가 되는 것이다. 

사실 일본의 부카츠가 세계적으로 보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독일 등 유럽 선진국에서도 부카츠가 활성화돼 있다. 한국이 비정상적인 상황인 셈이다. 물론 일본에서는 게이오를 비롯한 명문유치원에 들어가기 경쟁이 치열하다. 유치원을 잘 가면 명문 게이오대학까지 대체로 수월하게 진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쟁은 극히 일부에서 벌어질 뿐이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현실이 바뀌어야

한국 학생들이 학업일변도에서 벗어나 부카츠를 즐기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반드시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기업생태계가 조성돼야 한다. 중소기업에서도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대기업-중소기업간 ‘갑을관계’가 개선되고, 사회안전망도 갖춰질 필요가 있다. 

입시제도를 아무리 뜯어고치고, 교육개혁에 힘을 들여도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운 한국 현실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다. 한국의 아이들이 우정과 꿈이 넘치는 학창시절을 보낼 날을 과연 기대할 수 있을까.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일본공간>에 쓴 글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