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부 차관을 지낸 관료출신의 저자(정병석)가 신제도학파적 관점에서 조선이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망한 책이다. 본격적인 역사학자가 아닌 만큼 학술적인 가치가 어느정도인지는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사료들을 제시하며 저자의 주장을 논증한다. 아래는 1장 '조선은 왜 가난했을까' 챕터를 요약한 것인데 이후의 논지가 개략적으로 압축돼 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작은 정부, 작은 재정 위주로 나라를 설계해 전국을 망라하는 도로, 교량, 운하, 관개시설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노력하지 않았고 그럴만한 재정의 여력도 없었다. 농민들은 생산성이 높은 이앙법을 선호했지만 정부는 저수지와 관개시설이 부족하다며 이앙법을 금지하는 정책을 폈다.
농업의 생산력이 부진했기 때문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조선 군대는 군량부족으로 고통받았고, 자주 되풀이되던 흉년마다 수많은 아사자가 생겨났다. 주력산업이라는 농업에서도 생산물이 충분하니 자본을 축적하지 못한 것이다.
조선은 건국초부터 시장개설을 금지하고 상인에게 통행증을 발행하며 상업활동을 억제했다. 도로 등 경제활동의 기반이 되는 기간시설이 열악해, 지역간의 생산물 유통이 힘들고 거래비용이 많이 들어 시장이 발달되거나 산업활동이 촉진되기가 어려웠다.
관리와 양반계층의 착취와 견제로 상인의 성장이나 자본축적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부를 축적했다고 소문이 날 경우 자칫하면 재산을 뺏길 위험이 있다는 인식이 있어 백성들은 모험을 무릅쓰고 재산을 축적할 인센티브가 없었다.
식량생산의 한계로 인구증가율도 높지 않았는데 건국초부터 인구의 30%이상이 노비로 편제되었다. 신분상승의 가능성이 막힌 폐쇄적 제도였던 엄격한 신분제가 사회의 활력과 통합, 생산력을 저해한 것이다.
유학 교육을 강조하고 과거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도 시험이 지나치게 관념적인 철학 위주였고, 중국 성리학 교육에만 집중해 인적자원이 낭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관직부문에 과도한 인력이 집중돼 부문간에 적절히 인력자원을 배분하는데 실패했고, 상공업이나 기술의 발달을 자극하지도 못했다.
상공업을 천시하는 문화는 기술자의 신분저하, 생계 불안 등으로 연결되어 기술개발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기술자들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되어 최소한의 대가만을 받으면서 천대받았고, 노동과 생산물을 착취당했다. 추가생산해 내다팔 시장과 유통망이 발달하지 않아 생산의욕을 자극하지 못했다. 상품경제가 활성화되지 못해 민간부문에서 기술개발이 일어나거나 촉진할 유인이 없었다.
지식도 양반 사대부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에 유용한 지식이나 정보가 유통될 여지가 없었다. 인쇄와 출판은 사실상 국가가 독점해 통치 유지에 필요한 유학서적, 법률서적을 위주로 출판했다. 대량인쇄가 불가능해 서적값이 너무 비쌌던 것도 책의 유통을 저해했다. 서적이 유통될 서점을 허가하지 않아 백성들은 서적을 구입하기 어려웠다.
조선은 민본정치를 표방해 정치와 사회의 안정에는 성공했으나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데는 실패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 양반 사대부들의 특권독점, 권위적 지방행정, 착취적 조세징수제도 등은 말할 것도 없었고, 복지제도(환곡 등)와 병역제도까지 착취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외무역, 특히 해상무역을 엄격히 통제하고 국내 상업활동도 억제했으므로 이를 통한 생산과 소득증대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전 백성에 보급하고 의식화해 경제활동을 저해하고 활력을 떨어뜨렸다. 또한 성리학은 삼강오륜을 내세워 경제활동과 영리행위를 천시하는 문화를 조성했다. 이렇게 보면 조선은 현대 경제성장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요소보다 저해하는 요소들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성리학 중심제도의 왜곡
조선에서는 고려와 달리 지방의 향리를 중인계급으로 분리해 중앙관직에 들어오지 못하게 제도화하고, 향리에게는 녹봉도 지급하지 않았다. 능력과 관계없이 상인과 장인, 서얼에게는 과거응시 기회 자체를 제한했다.
중국에서 사대부는 현직관료 본인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지위도 세습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15세기 후반부터 양반 사족의 범위가 확대되어 현직관료 본인 뿐 아니라 친족, 조상과 후손까지 포괄하도록 관행이 형성됐고 이들이 모두 양반계급으로서 세습적인 권력을 누렸다.
임진왜란 전의 국가개혁론
이이의 상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전에 조선 제도의 여러 문제를 명확하게 지적했다. 1. 개혁의 필요성 : 제도가 오래되면 여러 폐단이 생기니 제때에 개혁해 보완해야 한다. 2. 지도자의 결단부족 : 선조가 문제의 실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3. 각론 미비 : 조선의 제도는 총론 위주로 큰 강령들만 만들어졌고, 세부 규정(절목)이 아직도 갖춰지지 않았다.
조선은 무관을 경시하고 문관을 우위에 두는 제도와 정책을 시행해 일선 군사령관과 지휘관을 대부분 문관들이 담당했다. 문관들은 전투훈련을 받지 않고 병법을 몰라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적장자 중심 유교화된 조선사회
유학자들은 1471년 편찬한 <경국대전>에 오직 적장자만이 상속권을 갖도록 규정했다. 이어 1543년 <대전후속록>에 적장자의 법적 상속권에 제사지낼 권리를 결합해 장자의 권한을 확대하고 서자의 상속권을 부인했다. 이로써 주자가 이상적이라고 제안했던 적장자 중심의 친족제도가 중국이 아닌 조선에서 17세기 무렵부터 실현되었다. 17세기 이후 여성은 출가외인으로 규정되고 제사, 상속 등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더불어 첩과 서자의 지위도 더욱 차등화됐다. <주자가례>의 예법은 공식적인 법제가 아니지만 법령과 다름없이 사대부들, 나아가 일반 백성들을 규율하는 사회규범으로 작용했다.성리학이 득세한 17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충보다 효가 우선시됐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1592년 6월15일 임금이 왜군에 쫓겨 평양에서 의주로 피난하던중에 도승지 김응남이 부모상을 이유로 사직했다. 1908년 조선 패망직전 전국의 의병총대장 이인영이 의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다 부친상을 전해듣자 "하늘이 무너졌다"며 군대를 버리고 고향으로 가버린 사례도 있었다.
지식의 국가독점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최초로 발명했다. 그보다 먼저 고려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른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국가가 인쇄를 독점하며 인쇄기술을 개발했고 직접 기여한 개인은 무시되었다. 조선에서 인쇄 출판은 통치수단의 하나였다. 그래서 인쇄와 출판을 국립인쇄소와 지방관청 등 국가에서 사실상 독점했다.
금속활자는 국가에서 독점해 소유하고 민간인에 의한 활자의 주조나 소유를 금지했다. 또 책을 유통하는 서점이 없어책을 공개 판매하거나 구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한자라는 문자의 제약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백성의 접근성에 한계가 있었다. 이 세가지 외에도 비싼 책값으로 백성들은 책을 구입할 수조차 없었다. 대량인쇄를 할 수 없으니 당연히 단가가 비싼데다 목판 각인 비용, 활자 제조비, 인쇄비, 종이값 등 제조원가가 많이 들어 책값이 비쌀 수 밖에 없었다. 유통망 조차 없으니 수요를 유발하거나 책값을 낮출 요인이 없었다. 정부가 간행한 서적은 대부분 100부 이내로 제작됐는데 왕실, 각 관청 등에서 사용하고 지방에는 필요에 따라 보급했다.
서적 이외에 지식을 전파할 다른 매체가 없는 상황에서 서적의 독점, 그 결과로 얻는 지식의 독점은 지배층에게 매우 중요한 자산이자 특권이었다. 이 특권을 다른 계층에 나눠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기존 질서의 변화를 초래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글 창제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의 공용문자는 여전히 한자였다. 훈민정음이 정부의 공용문자로 채택된 것은 1894년 11월21일의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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