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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조선은 왜 무너졌는가>-2

서의동 2017. 1. 29. 19:07

(1회에 이어 계속 주요내용 정리)


양반의 특권과 책무 

조선에서 양반이 갖는 특권이다. 

1. 경제적으로는 지주로서 양인과 천인 계층으로 구성된 농민을 지배하며, 정치적으로는 관료로 중인계급을 지휘해 양반관료 국가를 운영했다. 양반은 지주로서 양인과 천인계층 작인을 두어 경작하게 하고 생산량의 절반을 챙기는 병작반수를 행했으며 국가에 약간의 전세만 납부하면 되는 특권을 갖고 있었다. 

2. 원칙적으로는 군역을 부담하게 돼 있었으나 17세기 이후에는 면제받았다. 

3. 과거 응시와 교육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4. 관계와 관직에서도 신분간의 명확한 구별이 있어 양반과 그 이외의 신분은 신분에 따라 한품을 다르게 하고 직종도 다르게 했다. 

5. 죄를 범하더라도 가능하면 속전을 받거나 가노가 대신 처벌받게 했다. 또한 그들이 소유하는 노비에게 사형을 가하는 것이 합법화돼 있었다. 


관료의 녹봉과 선물문화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녹은 1년에 네차례 지급되었고, 봉은 월단위로 지급됐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매월 지급하는 월봉체제로 바뀌었다. 녹봉은 관료를 1품부터 18등급으로 나눠 쌀 보리 포 등 현물로 광흥창에서 지급하였다.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보면 유희춘은 1568년부터 1575년까지 7년간 총 17회의 녹과 1회의 봉을 받았다. 대략 10회분의 녹을 받지 못한 것이다. 녹봉을 수령했을 경우에도 법령에 규정된 양을 제대로 수령한 경우는 6회에 불과하다. 

이렇듯 조선정부는 국가의 재정상황에 따라 중앙정부의 관료들에게도 녹봉을 제때 지급하지 않았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조선관리들의 봉급 수준이 낮았는데 그것도 제때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력이나 재정이 빈약했다. 이로인해 지배계층의 착취와 지대추구 행위가 조장됐다. 

 유희춘의 일기에 의하면 1568년 1년간 그가 받은 녹봉은 백미 32석, 콩 14석, 보리 6석, 명주 4필, 포 12필이었다. 반면 이 기간 납공노비로부터 거둬들인 것이 대략 26석, 지방관리와 친인척들로부터 받은 선물이 쌀로 환산해 186석, 자신이 소유한 토지에서의 수확량이 83석이었다. 

정부가 법령대로 녹봉을 지급하지 않자 부정부패로 이어지면서 그 폐해가 지방 아전과 백성에게 전가됐다. 특히 지방관리로부터 선물형식의 금품을 받는 관행이 만들어졌는데 유희춘은 10년간 총 2855회(월평균 42회)에 걸쳐 선물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지방관리, 동료관리, 친인척, 제자, 지인 등이 곡물 면포 의류 생활용품 문방구 꿩 닭 어패류 견과 약재 등을 주었다. 

지방관들은 선물을 자신의 자산으로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관청의 자금으로 구입하거나 향리들에게 조달하라고 지시했다. 때문에 이러한 선물을 받더라도 유희춘은 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흔쾌히 받았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지방통치자 수령 

1779년 8월23일 황윤석이라는 양반이 충청도 목천 현감으로 임명받았다. 새로운 현감을 영접하기 위해 목천현에서 이방 이하 향리 17명이 한양으로 올라왔다. 황윤석의 일기 <이재난고>에 이름과 직책이 기록된 인원만 17명이며 그 밖에 부임행차 중간에 영접하러 나오거나 현의 경계로 나온 인원을 모두 합하면 당시 목천형 향리 총 147명의 27%가 신임 현감의 부임을 환영하기 위해 동원됐다. 이들은 한양에 보름 가까이 머무르며 신임 수령을 보좌해 부임절차를 준비하고 지원했다. 

지방수령 임명장을 받게 되면 의정부, 이조, 병조, 대간 등 중앙의 핵심관료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지방수령으로 발령받도록 도와준데 대한 감사의 인사를 했다. 빈손으로 가지 못하고 반드시 일정한 예물을 내야 했다. 해유채, 참알가, 행하 등 여러 이름이 붙어 있는 이런 저런 인사비로 황윤석은 26냥5전을 사용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렇게 거창하게 부임한 수령이 대부분 임지에서 1년도 근무하지 못하고 교체된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이 신임 수령으로 임명받으면 비용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이런 절차가 처음부터 되풀이되는 것은 물론이다.

조선시대에는 교통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정보의 비대칭이 매우 심했다. 임금이 지방 수령들의 행태를 상세히 파악하기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지방수령은 재임기간에 권한을 전횡하고 부정으로 축재할 유혹에 많이 노출돼 있었다. 조선은 지방에 암행어사를 파견해 비정기적으로 감사할 뿐 지방수령의 비리에 비교적 관대했고 근본적으로 시정할 의지도 없었다. 

지방수령들은 법률지식이나 실무경험이 없었고, 일선에서 구체적인 소송을 맡았을 때 전문성을 발휘하기도 어려웠다. 실제 재판에는 수령이 형방아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수령에 대한 1차 감독은 상급부서인 도의 감사가 맡고 다음으로는 암행어사가 2차 감독을 하는 구조로 돼 있다. 감사는 관할하 수령들의 업무실적을 평가하고 시정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감사가 현지 실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감영에 있는 향리(또는 영리)의 보좌를 받아 일을 처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비리가 많았다. 영리들은 자연스럽게 지방의 사족들과 깊이 연관돼 있었다. 사족들은 향리 영리와 수령들에 대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지방에 대한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향촌의 지배자 재지사족 

향촌에 거주하는 양반 즉 사족들은 유향소를 활용해 토지와 노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고 이들이 농촌의 실제 중심세력이 됐다. 조선은 지방자치 수단으로 군현에 유향소를 두고 좌수 별감 등의 향임 직위를 두다. 여기에 지방의 유력인사들이 자율적으로 규약(향약)을 만들고 여론 수렴 기능을 담당했다. 유향소는 원래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기구였다.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속을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했다. 별감은 환곡과 대동미 수납, 창고 출납, 군역 등에 대해 향리들의 부정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유향소 조직은 매우 폐쇄적이어서 재지사족들의 특권유지 수단으로 전락했다. 향안 또는 향적은 그 고을에 사는 유력한 양반의 명단인데 권위의 상징이자 향촌 지배체제의 중추역할을 했다. 이 향안은 매우 폐쇄적으로 운영돼 기존 회원의 추천을 받아야만 후보자가 되고 회원 투표에서 일정 비율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향안에 오를 수 있었다. 

향약은 향안에 참여한 사람들이 만들어 운영한 자치규약이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양반들이 주도해 백성들도 향약에 참여시켜 그 규범을 준수하도록 했다. 사족들은 양반을 위한 약조와 하인을 위한 약조를 따로 만들었다. 이 약조에는 양반을 욕보이는 자, 양반과 나란히 말을 타는 자, 생산에 힘쓰지 않고 농사일을 게을리하며 노는자 등을 단속하는 규범을 만들어 운영했고 백성들도 따라야 했다. 

이를 지키지 않은 향벌은 출향(집을 부수거나 마을에서 쫓아내는 것)이나 수화불통(마을에서 고립시키고 배제하는 것)이었다. 상민에 대한 처벌은 일관되게 신체적인 것이다. 가벼운 처벌은 회초리로 20~30대, 좀더 무거운 처벌은 70~80대를 때렸다. 

18세기 이후에는 향악이 쇠퇴하고 동계와 동약이 발달했다. 동계는 통상 상계와 하계로 구성되는 데 상계는 양반신분의 규약, 하계는 상민신분의 규약이다. 동계는 동리를 지배하기 위한 양반신분의 결사체 역할을 했다. 모내기나 제초작업을 위해 상계의 양반들이 하계의 상민 노동력을 강제동원해 활용하는 체제로 운영됐다. 

재지사족들은 현직관리도 아니면서 수령과 향리를 압도하는 집단 권력을 행사한 사례가 많았다. 재지 사족들의 횡포로 지방관청은 법에 보장된 주민들의 재산과 권리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 


실무집행자 향리 

지방관청의 향리나 이속을 아전이라 불렀는데 지방 말단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면서 여러 부정을 저질렀다. 아전들이 부정을 저지른 것은 국가에서 이들에게 봉급을 지급해주지 않은데도 원인이 있었다. 고려에서는 향리들이 읍리전을 받아 생활했지만, 조선에서는 기존의 읍리전도 폐지했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공문서를 한자로 작성했는데 향리집단은 오랜 경험으로 공문서의 작성에 한자 뿐 아니라 이두문자를 빈번하게 사용하면서 지방행정을 주무르게 됐다. 

1년 남짓한 기간만 머물다 떠나가는 지방수령은 손님에 불과했으며 실권은 향리 집단이 행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많은 지방수령들이 임기를 채우지 못했던 것도, 향리와 영리들이 담합해 자신들과 맞지 않는 수령의 인사고과를 좋지 않게 매기도록 감사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조선은 작은 정부를 지향해 조직과 관리의 수를 적게 편성했으며 관료들에 대한 인건비 행정예산을 적게 책정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국민 부담을 줄이려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에 불과했을 뿐 실제 운영과정에서는 오히려 관리, 향리들이 백성에게 착취적으로 지대를 추구할 기회와 명분을 제공했다. 


노비제도의 실상 

15세기 이후 조선후기에는 전체 인구의 3할 이상이 노비였다. 조선후기로 들어오면서 양천제가 무너지고 반상제가 정착돼 폐쇄적 성격이 더 강해졌다. 조선의 노비제도는 다른 어느나라와도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노예는 대부분의 경우 중범죄자나 전쟁포로를 노예로 했는데 그것도 대개 본인에 한정됐으며 자손에게 세습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전쟁포로나 외국인이 아니고 범죄자도 아닌 백성이 세습에 의해 노비로 규정됐다. 


드라마 <추노>


노비 소유주는 노비에게 마음대로 형벌을 내릴 수 있으며 죽일 때는 관청에 신고해 허가를 받도록 규정돼 있었다. 조선의 노비제도의 독특한 점은 노비가 법적으로 토지를 소유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 다른 노비를 소유할 수도 있었다. 

<경국대전>의 <형전>에 노비는 어미의 역을 세습한다고 규정했다. 노비와 양민이 결혼하면 자녀는 모두 노비가 되므로 노비 인구가 증가하고 국역의무자는 감소했다. 국가 재정에는 매우 부담이 되었지만 양반 노비 소유자에게는 유리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와 양반계층의 이익이 상충됐다. 

노비증가와 양인감소로 군역 부담자가 줄어들자 1414년 종부법을 실시했다. 양인 아비와 노비 어미사이의 자식은 일정기간 보충군에서 근무하는 조건으로 양인이 되는 길이 열렸다. 관료들은 이 법이 노비인구를 감소시키고 인륜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등의 문제제기를 했고 이로써 세종연간에 대논쟁을 하게 됐다. 

결국 1432년 종부법의 적용대상을 관료와 노비(여종)사이에 태어난 자식으로 한정해 유명무실화 시켰다. 

 또 양천교혼을 묵인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관료가 아닌 일반 양인과 노비사이의 자식은 천자수모법에 따라 어미의 신분을 따르게 됐다. 이는 노비인구가 크게 늘어나게 되는 제도적 후퇴였다. 

17세기까지 노비가 계속 증가하다 18세기에 노비가 감소하게 된 결정적 제도 변경이 종모종량법 시행이다. 어미가 양인이면 자녀에게 양인신분을 인정하는 것으로 1669년부터 시행과 중단을 반복하다 드디어 1731년 영조의 결단으로 확정됐다. 영조 자신이 천한 무수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노비의 혼인 

한 연구에 따르면 1609년 울산에서 입역노의 37.4%가 혼인했고 여종의 65.3%가 혼인했다. 노비 소유주가 여종의 혼인에는 적극적이었지만 남종의 혼인에는 소극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반들은 노비끼리의 혼인을 제한했고 양반과의 혼인하도록 조장했다. 자신의 남종이 다른 집의 여종과 혼인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어미인 여종의 주인 재산이 되므로 매우 불리했다. 이 경우에 손해를 끼친 남종 노가 주인에게 용서를 빌며 자신의 재산일부를 주인에게 헌납했다는 기록도 있다. 

양반이 여종을 첩으로 데리고 사는 경우는 비일비재했고 여기서 난 자식은 법적으로는 노비가 됐다. 양반의 생전에 그 자식을 노비로 취급하지는 않겠지만 그 양반의 사후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일어난다. 여종에서 태어난 자식은 법적으로 노비이므로 양반의 자식에 상속됐다. 그 결과 여종의 자식은 그 양반의 다른 자식, 즉 배다른 형제의 노비가 되는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다. 


상공업을 천대하는 문화 

조선에서 신량역천이란 법적인 신분은 양인이지만 실제 직업은 천역을 지는 계층을 이르는 말이다. 뱃사공 어부 목축인 봉수꾼 제염업자 묘지기 도살꾼 광대였다. 상공업자도 천대받았지만 어부 선원 목축인 제염업자등은 아예 천인취급을 받았다. 


조선의 화폐에 대한 인식 

조선은 동전을 원활하게 공급하고 유통하게 함으로써 산업발달을 촉진하면서 경제성장을 주도할 의지와 역량이 북족했다. 동전이 유통되지 못한 이유는 두가지, 동전 주조에 필요한 구리공급이 매우 부족했다. 둘째는 국내에서 유통시킬 재화의 부족이 문제였다. 생산이 취약하고 백성이 가난해 겨우 자급자족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이니 동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수레활용에 대한 저항 


'초헌'을 탄 양반


조선에서는 수레활용에 거부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고 관련제도를 구축하거나 도로를 개설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1435년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수레를 제작 보급하는 방안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이 때 황희 등이 "수레가 비록 운반에는 편리하나. 평탄한 길에만 마땅하고 험조하고 질척한 곳에는 마땅치 아니한데, 평안도 일부 지역은 길이 평탄해 다닐만 하지만 강계와 자성같은 고을은 길이 울퉁불퉁하고 험해 쓸수 없고, 강원도는 모레가 많아 수레가 빠지기 쉬워 쓰기 어렵다"고 반대했다. 세종도 관료들의 집요한 반대에 부딪혀 수레 사용계획을 포기했다. 

조선에서는 산악지형이 많다거나 유통할 산물이 적다는 명분으로 수레보급을 반대했다. 성리학에 매몰된 관료들의 경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힘든 일은 노비나 평민들에게 시키면 되고 직접 쌀 한되도 들 필요가 없는 관료들에게 수레는 절실한 필수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