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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동의 사람·사이-문성현] “노조, 국민과 동떨어진 존재돼…이대로 가면 ‘화석’될 수도”

서의동 2017. 12. 22. 15:18

문성현 노사정 위원장이 11월 10일 노사정위원장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서울 평화시장의 청년 재단사 전태일(1948~1970)은 돈이 없어 점심을 굶는 어린 여공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에서 창동까지 걸어 다니곤 했다. 청계천 봉제공장의 지옥같은 노동현실에 항거한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됐고 많은 대학생들이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그 이듬해 대학에 들어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 위원장 문성현(65)도 그들 중 하나였다.  

 

47년이 지난 지금 노동운동에서 차비를 아껴 풀빵을 돌리던 전태일의 연대정신을 떠올리는 이들은 많지 않다. 노동운동이 기업의 울타리 안에 고립돼 갈라파고스 섬의 생물처럼 퇴행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말로는 전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외치면서도 어느 대공장 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합원 자격을 빼앗는가 하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는 노조도 있다. 문성현 역시 노동운동이 ‘화석(化石)’이 되고 있다고 우려한다. “많은 이들이 해고·구속되고 죽기까지 하면서 지켜온 노조가 국민과 동떨어진 존재가 돼버렸다.” 

 

지난 10일 정부서울청사 노사정위원장실에서 만난 문성현은 “산적한 노동현안을 풀기 위해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새로운 사회적 대화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며 생각이 달라도 함께 논의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숙의 민주주의’가 노동에서도 실현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최저임금 문제는 사용자나 정부만 바라볼 게 아니라 노동운동이 연대정신을 발휘해 풀어야 한다”며 SK이노베이션 노조가 기본급 일부를 갹출해 협력업체 지원 등 상생기금에 출연하기로 한 사례에 주목했다. 

 

문성현은 70년대 후반부터 노동운동을 시작해 민주노총 금속연맹 위원장, 민주노동당 대표를 지낸 1세대 노동운동가다. 한때 전투적 노동운동의 상징이던 그가 2시간의 인터뷰에서 가장 강조한 건 ‘대화’였다. “노조가 사회적 광장에서 합리적 토론을 통해 국민이 바라는 것을 하나라도 풀어나갔으면 좋겠다. 내 모든 걸 던져 풀고 싶다.”

 

■“국민은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여 바란다”

 

-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지 6개월이 됐다. 노동분야에서 여러가지 정책들을 많이 내놨다. 

 

“문 대통령이 비정규직, 최저임금, 노동시간 등 노동분야 핵심의제의 방향을 명확히 짚고 있다고 본다. 상시·지속적 업무를 하청으로 돌리거나 계약직 노동자로 채우는 비정상 노동의 정상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무슨 일이든 성실히 하면 연봉 2500만원, 부부라면 5000만원에서 삶의 기초를 닦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게 ‘최저시급 1만원’의 취지다. ‘무조건 주라’는게 아니라 ‘줄 수 있도록 하자’는 거다. 지난해 촛불집회의 핵심동력은 어디가서 무슨 일을 하든 차별받지 않고, 제 대접을 받고 싶다는 청년들의 열망이었다고 본다.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는 ‘주 40시간 노동’으로도 경제가 유지·발전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대통령이 ‘지난 반년간 나는 이렇게 해왔으니, 여러분들도 해보자’며 노동계·재계에 주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 10월24일 청와대에서 열린 노동계 대표 만찬에 민주노총이 불참했다. 민주노총 집행부 선거에서는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란 구호도 나온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여론의 시선은 싸늘하다. 

 

“노사정위원회는 법적으로 사회적 대화의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대화하겠다면 법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도 나도 노사정위가 바뀌어야 한다고 보지만 바꾸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참여해야 한다. 노사정위를 우회하는 사회적 대화는 없다.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에 대해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민주노총이 집행부 선거중이니 기다리겠다. 선거과정을 통해 ‘사회적 대화’와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 ‘사회적 합의주의’를 거부한다면 대안은 뭔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민주노총은 1999년 전교조를 합법화하는 대신 정리해고와 파견법 제정이 통과되자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한 이후 현재까지 복귀하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가 노동자의 희생을 사회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기구라는 인식이 강하다. 

 

- 민주노총으로서는 노동친화적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금이 정책파트너로 자리잡을 기회일 수도 있지 않나. 

 

“촛불혁명의 교훈은 방법이 좋아야 한다는 것 아닐까. 87년 군부독재 타도투쟁할 때는 쇠파이프, 화염병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일 다하고 저녁에 나와 촛불을 들었다. 지난 30년간 이만큼 성숙해진 거다. 해결이 쉽지 않던 (신고리) 원전 문제도 (공론으로) 해결했다. 격변기에 극한적인 노사대립 현장에 있던 나로선 국민에게 매일 108배를 하고 싶을 정도다. 민주노총도 생각이 다르더라도 함께 대화하며 대안을 내놔야 한다고 본다. 국민들은 그런 모습을 바란다.”

 

- 정부가 검토중인 ‘한국형 사회적 대타협 기구’에는 양대노총 뿐 아니라 비정규직·하청·청년·여성 대표도 참여하도록 돼 있는데 어떤 방식이 검토되고 있나.

 

“지난달 서울대 비정규직 노동자 대상 강연에서 ‘여러분들이 (참여)방안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당사자가 잠자코 있는데 밖에서 ‘넣자 말자’ 할 수는 없다. 양대노총이 ‘(비정규직 대표를) 넣을 것 없이 우리가 대변하겠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뒤틀린 노동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선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어떤 사안이건 당사자가 가장 잘 알게 마련이고, 최선이 아닐 경우 차선을 택하는 지혜도 발휘한다. 당사자가 있어야 의견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 오랫동안 비정규직을 대변해온 분들중에서 대표가 선출돼 노사정위에서 양대노총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 

 

문성현 노사정위원장 @이상훈 선임기자

- 서울대 강연에서 ‘문재인 정부는 노동자 여러분의 투쟁을 응원한다’고 했다가 보수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은 노조를 결성할 권리, 단체교섭을 할 권리, 파업을 할 권리다. 파업은 악이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을 깨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의 정상화를 위해 불가피하고 정당한 투쟁이 있다는 걸 우리 사회가 인정해줘야 한다. 노사정위원장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을 방문하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대기업 노조를 만날 때는 투쟁이 능사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임금인상률에 연연하지 말고, 산업의 미래를 노동이 주도적으로 고민하고, 사회적 책임도 다해야 한다. 우리 노사관계의 복합적인 측면들을 이해해야 한다.”

 

■“최저임금 노동이 연대정신 발휘해 풀어야”

 

- 최저시급 1만원 달성을 위해 대기업 노사도 역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1만원을 달성하려면 15조원 안팎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임금 지급여력이 부족한 중소·영세사업자들을 위해 정부가 조달할 수 있는 재원은 5조원 안팎이다. 재정만으로 감당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원·하청간 공정거래 확립, 세제지원이나 카드수수료 인하 같은 수단을 동원해도 부족하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대기업 노사가 사회연대적 차원에서 부족분을 채우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저임금은 격차를 좁히는 출발점인데 이 문제만큼은 사용자나 정부만 바라보지 말고 노동이 주도했으면 좋겠다. 전태일 열사가 돈이 없어 점심을 굶는 어린 노동자들에게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던 연대정신이 필요하다.”

 

- 최근 SK이노베이션 노조가 사원의 기본급 1%를 내고, 사측도 동일 금액을 내 협력사 직원 등을 위한 기금을 만들기로 한 합의는 주목할만 하다.

 

“노사정위원장 되고 나서 두번 잠을 설쳤는데 하나는 SK이노베이션 합의, 또하나는 기간제 교사 문제였다. 대기업에서 이런 선도적인 움직임들이 나오면서 사회적 공감을 얻어가면 노사정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해볼 수 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대기업 노동자들의) 연봉은 충분히 올라갔지만 회사 울타리 바깥은 어떤가. 격차는 내 자녀의 문제다. 죽기살기로 스펙 쌓아봐야 내 자식은 내 자리에 올 수 없다. 세대간 연대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SK이노베이션의 노사합의는 내가 생각해오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는 합의였다.”

 

-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한 전교조의 입장도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이런 문제야말로 사회적 대화나 ‘숙의 민주주의’를 거쳐야 했을 것 같다. 

 

“기간제 교사 뿐 아니라 곳곳에 비슷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정규직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하는 일이 같으니 동일한 대우를 해야 한다면 정규직이 반발할 것은 당연하고 그게 현실이다. 그래도 2년 계약을 계속 갱신해 10년째 일하는 비정규직이 있다면 능력이 검증된 게 아닐까. 여하튼 풀기 쉽지 않다.”


- 노사정위원회는 내년 2월쯤이면 정상화될 것으로 봐도 될까.


“양대노총이 노사정위를 탈퇴해 바퀴가 두개나 빠진 상태다. 한국노총은 참가의사를 비치고 있는데, 민주노총도 노사정위를 통한 새로운 사회적 대화에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 문 대통령도 민주노총이 오는 첫 회의에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했다. 민주노총 새 집행부가 12월말 선출되면 내년 1월쯤 대표자회의를 갖자고 제안할 생각이다. 노사정위의 정상화방안을 논의하자는 거다. 이 과정을 거쳐 노사정위원회가 2월이든 3월이든 열리면 우선 체제개편을 논의할 생각이다.”

 

- 문재인 정부 1년이 되는 내년 5월이면 노동분야에서 사회적 대화가 무르익는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노동시간·최저임금 하나하나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1년씩 걸릴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현장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도 논의될 수 있다. 서둘러서 될 게 아니고 충분히 숙의해야 할 과제다. 과거 노사정위를 돌이켜보면 노동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고, (합의에) 동원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주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사용자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는 정부가 아닌 노사가 주도해야 한다.”  


■“희생으로 지켜온 노조, 국민과 동떨어진 존재가 됐다”

 

- 87년 노동자대투쟁 30주년을 맞아 최근 열린 토론회를 보면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인식이 큰 것 같다. 이런 비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변화하지 않으면 민주노총도 ‘갈라파고스화’가 될 수 있다. 

 

“민주노총이 ‘노정교섭’을 하자고 하지만 분명히 말하면 사용자로서의 정부와 교섭하는 ‘노사교섭’이 맞다. ‘노정’이란 용어에 굳이 집착할 이유가 없다. 법개정 문제라면 국회에 요구하면 된다. ‘총파업’이라곤 하지만 실제로 전 조합원이 참가하는 파업은 없었다. 자기 현안 때문에 파업하는 사업장과 간부들이 모여 집회하는 정도다. 금속연맹 위원장 시절 ‘총파업’이란 말을 쓰지 말고, 실제 파업 사업장이 몇곳, 간부 집회만 하는 곳이 몇곳인지 정확히 집계해 발표하라고 했다. 총파업이라는 공세적 용어를 쓰는 취지를 이해는 하지만 좀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 노동운동의 선배로서 지금의 노동현실을 어떻게 보나. 

 

“금속연맹 위원장이던 시절 ‘주 5일제 도입’이 현안이었다. 그런데 주 5일제에 단체협약상 휴무까지 포함하면 휴일이 너무 많아져 연차휴가나 월차휴가를 양보해야 할 상황이었다. 양보하는 대신 전 국민, 특히 중소기업이 마음놓고 주 5일제를 실시할 여건을 노사정위에서 마련하자고 제안했지만 집행부는 노사정의 ‘ㄴ’자도 꺼내지 말라면서 거부했다. 민주노총이 국민을 대표할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결국 월차만 없어진 셈이 됐다. 양대노총이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하면 ‘화석(化石)화’된다. 많은 이들이 해고·구속되고 죽기까지 하면서 노조를 지켜왔는데 국민들과 동떨어진 존재가 돼버린 거다. 이러자고 내 삶을 바쳤나 싶은 생각도 든다. 노동을 존중하는 대통령이 나왔으니 내 모든 걸 던져 풀어보고 싶다. 노조가 광장으로 나와 합리적 토론을 거쳐 국민들이 바라는 것을 하나라도 풀어나가 봤으면 한다. 대학생인 딸이 ‘다른 거 하지 말고 최저시급 1만원이라도 확실히 해달라. 친구들도 최저임금 문제 꼭 해결해 달라고 한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