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사는 유민(流民)과 난민(難民)의 역사였다. 구한말 농민들이 농사지을 땅을 찾아 간도로 넘어갔고, 일제강점기가 되자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연해주, 상하이로 망명했다. 해방 후에는 제주 4·3사건 때 많은 이들이 배를 타고 제주도를 탈출해 일본으로 넘어갔다. 한국전쟁 때도 많은 이들이 미국, 유럽 등지로 건너가 새 삶을 찾았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명준은 인민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뒤 중립국 인도행을 택하지만 선상에서 바다에 투신한다.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넘겼지만 최근에도 한국을 탈출하려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병역을 피해 프랑스로 간 이예다씨(27)가 2013년 6월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난민지위를 인정받았고, 2016년 11월에도 동성애자이자 병역거부자인 한국 청년(31)이 프랑스에서 난민으로 인정됐다. 난민은 ‘인종, 종교, 민족,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사람’으로 규정된다.
난민배출 역사는 길지만 난민수용 역사는 짧다. 한국이 최초로 난민을 인정한 것은 유엔 난민협약에 가입(1992년)한 지 9년이 지난 2001년이다. 2013년 7월1일 난민법이 시행됐지만 난민수용률이 저조한 나라로 일본과 최상위를 다툰다. 난민신청을 받기 시작한 1994년부터 지난 10월까지 누적 신청자 수는 3만82명인 반면,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는 767명으로 3%가 채 안된다. 전 세계 난민인정률 38%에 한참 못 미친다.
2015년 7월 한국에 입국한 우간다 청년 카테레가 하산이 난민지위를 얻지 못한 채 11일 한국땅을 떠났다. 빚을 졌다는 이유로 형제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아왔다는 점만으로는 난민신청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고 당국이 판단한 듯하다. 체류 기간 그가 겪은 한국사회도 우간다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일하던 공장에서 ‘여기 왜 왔느냐’는 혐오 발언과 차별에 시달렸고, 암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 동안 방 월세를 안 냈다는 이유로 퇴원하던 날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췌장암으로 여명 2개월 진단을 받은 채 비행기 트랩에 오른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근현대사에 걸쳐 국제사회에 진 신세를 우리는 갚지 않고 있다.(2017.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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