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8일 각료회의 결정으로 아키히토(明仁) 일왕(83)이 2019년 4월 말 퇴위한다. ‘국가원수’로 침략전쟁에 책임이 있던 부친 히로히토(裕仁) 일왕과 달리 아키히토는 온전히 ‘국가의 상징’으로 활동한 첫 일왕이었다.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전쟁에 대한 반성과 평화를 역설했으며, 재해지역을 방문해 국민들과 직접 아픔을 나눴다. 2011년 3월11일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때 도호쿠(東北)지역에 마련된 피난소를 미치코(美智子) 왕후와 함께 찾은 일왕이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낮춰 주민들과 대화하는 장면은 대재앙의 충격에 빠진 국민들에게 깊은 위로가 됐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도쿄지역에 계획 정전이 실시되자 정전시간에 맞춰 거처인 황거(皇居)의 전원을 일부러 끄기도 했다.
그는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평화주의 실현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왔다. 오키나와, 사이판 등 태평양전쟁 격전지를 방문해 희생자들을 위령했고 1992년에는 일왕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야스쿠니(靖國)신사에는 즉위 이후 한 차례도 참배하지 않았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와 그의 집권 이후 오른쪽으로 쏠리고 있는 일본 사회에도 꾸준히 경고음을 내왔다.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도 유명하다. 2005년 사이판 방문 때는 ‘한국·조선인 위령비’를 예정에 없이 찾았으며, 2001년에는 “간무천황 생모가 백제 무녕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발언했다. 지난 9월에는 사이타마(埼玉)현에 있는 고마(高麗)신사를 참배했다. 고마신사는 고구려에서 넘어온 도래인 약광(若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사다. 한국 방문을 실현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달래기 위한 참배였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는 젊은이들에게도 친근감을 주는 존재였다. 1999년 즉위 10주년 기념식 행사장을 찾은 소녀들이 일왕을 향해 ‘가와이(귀여워)’라며 함성을 지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천황제는 아시아인에게 지대한 고통과 좌절을 안겨주었고, 지금도 일본 민주주의 발전을 제약한다는 비판이 여전하다. 그러나 우향우 행보가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 일본에서는 역설적이게도 ‘평화주의의 보루’로 역할을 해온 셈이다.(201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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