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야기(宮城)현은 나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일본 특파원 근무를 시작한지 일주일만에 동일본 대지진을 겪었고, 그 사흘 뒤 쓰나미 피해현장을 취재하러 렌터카를 몰고 센다이(仙台)까지 갔다. 센다이는 간선도로인 국도 4호선에 건물잔해와 쓰나미로 떠밀려온 차량들이 뒤엉켜 통행이 불가능했다. 원래 이와테(岩手)현에 가려고 했지만 더이상의 북상은 포기해야 했다. 택시를 잡아 미나미산리쿠초(南三陸町)의 피해 현장에 접근해 취재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후쿠시마를 포함해 도호쿠(東北)으로 불리는 미야기, 이와테현을 특파원 재임기간중 7번 찾았다. 살아남은 이들의 생활은 고달팠다. 보금자리를 잃은 주민들은 비좁은 가설주택에서 고역의 일상을 보냈다. 마을 커뮤니티를 잃은 노인들은 가설주택 삶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몇차례 취재하다보니 도호쿠 주민들의 고난이 남의 일 같지 않았고, 복구가 늦어지는 것을 보면 내가 다 화가 날 정도였다.
그 미야기현을 6일부터 9일까지 다녀왔다. 지역부흥을 위해 제주올레와 협력해 만든 올레코스가 개장된 것이다. 대지진 때 불바다가 됐던 게센누마(気仙沼)와 오쿠마쓰시마(奥松島) 코스다. 오쿠마쓰시마 코스는 쓰나미 이후 곳곳에 콘크리트 방조제가 설치됐다. 사람으로 치자면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채 재활에 들어간 모양새다.시간이 지나 새살이 돋고 옛 상처의 흔적이 희미해지듯 세월의 더께가 방조제의 살풍경을 지워줄 것이다. 치유와 힐링을 위해 개설된 올레코스의 도중에 있는 이런 풍광들이 방문객들에게 어떤 느낌을 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의 흔적들을 겸허하게 마주하는 것이 또다른 의미에서 '치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게센누마, 가라쿠와 코스 개장식(2018년 10월7일) @서의동
10월7일 열린 게센누마 가라쿠와 코스 개장식에는 수백여명의 올레꾼과 무라이 미야기현 지사 등이 참석했다. 이날 강풍 탓에 코스가 일부 변경됐다.
게센누마 코스의 해안길. 이 바다가 일본에서 하와이와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퍼렇다 못해 가끔은 시커멓게 보이는 바다에는 상어들도 많다고 한다. 게센누마는 상어와 꽁치, 황새치 등이 많이 잡히는 곳이다.
제주도의 외돌개처럼 홀로 솟아있는 바위가 오레이시(折石). 1896년 이 지역을 덮친 쓰나미 때 끝이 2미터 가량 부러져 현재의 모양이 됐다고 한다.
마침 날씨가 맑았기에 이런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었지만 거친 날이었다면 어땠을까.
가운데 보이는 바위가 쓰나미바위, 큰 것은 150t에 6m가 넘는다. 2011년 쓰나미 때 해저에서 이 해안까지 밀려 왔다고 한다. 쓰나미의 엄청난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이동중 휴게소에 마련된 쓰나미 전시관. 국도 45호선을 관리하는 게센누마국도유지출장소가 2011년 쓰나미에 휩쓸렸다. 당시 사무소에 걸려 있던 시계.
이번 개장식에 참가한 이들과 한 컷. 배우 유승룡씨(가운데)는 2016년 제주올레 걷기 축제 때부터 꾸준히 올레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규슈 올레 2개 코스 개장식 때에 이어 두번째 동행이다. 함께 도시락도 먹고, 온천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일본 미야기현의 홍보대사 격인 '무스비 마루'. 무스비는 오니기리(삼각김밥)과 동의어다. 미야기현은 쌀의 질이 좋기로 유명하고, 히토메보레(一目ぼれ)라는 브랜드의 쌀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전국시대 이곳의 맹주인 다테 마사무네의 복장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지역홍보 마스코트 캐릭터를 유루캬라(ゆるキャラ)라고 하는데 구마모토현의 구마몬이 대표적이다.
두번째 날(10월8일) 오쿠마쓰시마 코스는 쓰나미의 상흔들이 좀더 뚜렷했다. 마쓰시마(松島)는 암초들이 바위에 산재한 다도해로 일본 3대 명승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하지만 쓰나미 이후 이렇게 군데군데 방파제와 방파용 구조물들이 설치돼 있었다.
히가시마쓰시마시의 노비루(野蒜) 기차역.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쓰나미가 정차해 있던 열차까지 덮쳤던 곳이다. 역은 폐쇄됐지만 역터는 이렇게 보전돼 있다.
쓰나미로 못쓰게 된 승차권 판매기. 노비루 역 앞 편의점 건물 2층에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한 전시관이 있다.
역 뒤편에 추모탑이 서 있다. 히가시마쓰시마에서 쓰나미로 죽거나 실종된 115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쓰나미를 경계하기 위해 설치된 비석. '平成の大津波'라고 쓰인 글씨 바로 아래 파란색 물결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까지 물이 찼다는 걸 표시하고 있다.
[여적] 쓰나미 피해지의 올레길(2018년 10월18일자 경향신문)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지 나흘 뒤인 2011년 3월15일 쓰나미가 공격한 미야기(宮城)현 미나미산리쿠를 찾았다.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 변한 거리 곳곳에서 집, 전신주, 차량들이 뒤엉켜 있었다. 어느 집 벽에 걸려 있었을 그림 액자, 이불, 전기밥솥, 전화기가 목조 가옥의 잔해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가랑비가 흩뿌리는 영하의 날씨 속에 탐지견을 앞세운 구조대원들이 이날 하루 6구를 잔해 속에서 수습했다. 미나미산리쿠 외에도 이시노마키, 나토리 등 해안 지역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게센누마는 지진으로 유류탱크가 넘어지면서 시가지 전역이 불바다가 됐다.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전체 사망·실종자 1만8434명 중 1만763명이 미야기현에서 나왔다. 미나미산리쿠 취재 도중 잔해물 더미에서 발견한 앨범 속 소녀는 무사할지, 저 집계에 포함됐을지, 줄곧 궁금했다.
그 미야기현에 트레킹 코스 올레가 만들어져 지난 7~8일 현지에서 개장식이 열렸다. 미야기현청이 지역부흥을 위해 사단법인 ‘제주 올레’와 협력해 게센누마와 히가시마쓰시마 2곳에 길을 냈다. 6년 전 남부 규슈에 생긴 이래 일본에선 두번째 올레 코스다. 정갈한 마을 길을 지나 야산 숲길을 통과하면 태평양 너른 바다와 제주 외돌개를 닮은 바위 형상들이 어우러진 해안길이 나타나는, 올레 이름에 값하는 풍광 좋은 길이다.
다만 걷는 도중에 7년 전 재해가 남긴 상흔들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 여느 길과 다르다. 절경의 다도해가 펼쳐진 히가시마쓰시마의 해안에는 콘크리트 방조제들이 군데군데 설치돼 있다. 시간이 흐르며 새살이 돋아 상처가 희미해지듯 세월의 더께가 방조제의 이물감을 지워가겠지만, 지금 당장은 붕대를 감고 재활에 애쓰는 환자를 떠올리게 한다.
배경지식 없이 자연 속에서 한때를 보내려던 이들에게는 조금 당혹스러운 광경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속성이란 원래 그런 것임을 마주하는 기회일 수 있다. 늘 자연 위에 군림하려 하지만 인간 존재란 실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되돌아보고 재난 지역주민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치유’가 아닐까. 무시로 태풍에 시달리는 제주와 미야기의 올레길은 꽤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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