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북·일 정상 못 만날 까닭 없다

서의동 2019. 8. 9. 23:43

2019.05.15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던 2002년 9월17일 동북아는 난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그해 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이자 “선제공격으로 정권을 교체시켜야 할 대상”으로 지목했다.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도 탄력을 잃었다. 그해 4월 평양에 특사로 간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특보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면서 소강상태이던 남북관계가 풀렸지만,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을 궁지에 몰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 미국의 맹방인 일본 총리의 방북은 ‘일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사정 탓인지 고이즈미 총리는 최대한 건조하게 회담에 임했다. 당일치기로 방문한 평양에서 그는 시종 표정을 풀지 않았고, 방북단은 오찬 대신 일본에서 챙겨온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사상 첫 북·일 정상회담은 납치문제라는 ‘블랙홀’이 모든 성과를 삼켜버리며 끝났다.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13명 중 8명이 이미 사망했다고 하자 일본 여론은 일거에 들끓었다. 식민지배 등 과거청산과 국교정상화 등 근본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미국의 사전 동의 없이 일을 벌인 후유증도 컸다. 북·일 정상회담, 남북 철도·도로연결 착공 합의 등 한반도 훈풍에 놀란 네오콘들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보름 뒤인 10월3일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해 고농축 우라늄(HEU) 의혹을 제기하면서 2차 북핵위기를 촉발했다. 악재가 겹치며 고이즈미의 시도는 불발했지만, 대북정책을 놓고 맞섰던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일본이 잠깐이나마 한국 외교의 자장(磁場) 안에 들어왔던 것은 동북아 외교 사상 진귀한 장면이었다.

 

당시 고이즈미 총리를 수행했던 아베 신조 총리가 최근 들어 북·일 정상회담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아베 총리는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이 결렬된 지난 2월2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한 뒤 “다음엔 내가 김정은 위원장과 마주하겠다”고 했다. 지난 6일 트럼프와의 전화통화 뒤 기자들에게 “김정은 위원장과 조건 없이 만나겠다”고 했다. 납치문제에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려놓은 것은 중대한 태도 변화다. 아베 총리의 핵심측근이자 납치문제담당상을 겸임하고 있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지난 9일 방미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과 회동한 것도 눈길을 끈다.

 

2002년 9월17일 북한을 처음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왼쪽)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에 앞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아베 총리의 대북 접근에 대해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물론 있다. 7월 총선을 앞둔 정치적 퍼포먼스라거나 한반도 주변국 중 일본만이 북한과 정상회담을 하지 못한 데 따른 ‘재팬패싱’ 비판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들이다. 일본에서는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는 ‘알리바이 만들기’라는 혹평이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한반도 정세에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두 번의 정상회담에도 북·미 협상이 교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한국 정부의 중재역량도 약화된 상황에서 일본은 북한에 매력적인 우회로가 될 수 있다. 아베는 트럼프와 ‘절친’이다. 고이즈미 방북은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아베는 트럼프와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아베 총리는 임기 중 실현하고 싶은 외교과제로 납치문제 해결과 북·일 수교를 꼽는다. “납치문제를 해결할 확신이 선다면 미국이 쳐놓은 가이드라인을 뛰어넘는 일도 불사할 것”이란 관측(일본의 한반도 전문가)이 나올 정도다. 1964년 이후 두번째로 치르는 내년 도쿄 하계올림픽의 성공을 위해서도 주변국과의 관계개선 욕구가 크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는 1970~1980년대에 집중됐다. 1984년생인 김정은 위원장은 직접 책임이 없는 만큼 선대의 과오를 매듭짓는 것이 큰 부담은 아닐 것이다. 북한은 ‘아베라는 우회로’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 복귀하려면 미국은 물론 일본과도 관계개선이 필요하다. 납치문제 해결은 그 필요조건이다.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는 “북·일 정상회담은 북한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했다.

 

17년 전 고이즈미 총리가 방북을 결심한 데는 김대중 대통령의 설득(2002년 3월 한·일 정상회담)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반면 지금의 한·일관계는 의사소통조차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가 주변국의 적극적인 참여로만 완성될 수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일관계가 나쁘다고 해서 일본의 대북접근을 부정적으로 볼 일은 결코 아니다. 북·일 두 지도자의 대담한 결단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