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철망은 촘촘하기로 유명하다. 광역자치단체를 잇는 간선철도부터 짧은 구간을 오가는 ‘마을 전철’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플랫폼 스크린도어 설치는 2010년대 들어서야 본격화됐고, 그 전까지는 사람이 선로에 뛰어들거나 떨어지는 사고가 잦았다. 일본 철도는 정시운행이 잘 지켜지지만, 인명사고가 많은 노선에선 열차가 서서 낭패 보는 일이 드물지 않다. 하지만 사고의 절반 이상이 ‘자살’이라는 사정을 고려하면 가볍게 불평할 수만은 없다. 2005년부터 10년간 철도 자살 사건은 6000건에 달했다.
2001년 1월26일 저녁에도 한 취객이 선로에 뛰어들었다. 도쿄 도심을 순환하는 JR야마노테선의 신오쿠보역이다. 플랫폼에 있던 일본인 사진작가 세키네 시로(당시 47세)와 유학생 이수현씨(26세)가 취객을 구하러 뛰어들었으나 열차를 피하지 못해 3명 모두 숨졌다. 이씨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역 구내에는 그를 기리는 추모패가 설치돼 있다.
생면부지의 일본인을 구하려다 짧은 생을 마감한 이씨의 살신성인은 열도를 감동시켰다. 지난 20년간 일본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를 이어오고 있다. 2008년에는 이씨를 기리는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가 제작됐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록밴드 ‘안젠치타이’는 10주기인 2011년 ‘STEP!~이수현 26년의 생애에 바친다’는 노래를 만들었다. 2017년 2월 일본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는 2편까지 개봉했고 3편이 제작 중이다. 한 일본인은 이씨를 기리는 시 15편을 엮은 시집 <한국의 별, 이수현군에게 바친다>를 펴냈다. 어머니 신윤찬씨는 20일 기자회견에서 “그간 아들을 추모하는 일본인이 보낸 편지만 2300통”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의 곡진함이 놀라울 정도다.
추모열기와 달리 양국관계는 부침의 연속이었다. 한류붐 등으로 민간교류는 활발해졌으나 정부 간 관계는 2012년을 기점으로 냉각됐다. 과거사 갈등, 수출규제·불매운동을 거쳐 코로나19 확산 후엔 민간교류마저 단절 상태다. 모리 총리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씨를 ‘한·일 우정의 가교(가케하시)’라고 했다. 한·일관계는 이 가교라도 남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경이 됐다. 하늘에 있는 이씨도 유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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