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경제 거품이 빠지면서 장기불황의 초입에 들어선 일본에서는 기업들의 가격파괴 경쟁이 치열해졌다. ‘게키야스(激安·매우 쌈)’ ‘고쿠야스(極安·극도로 쌈)’ 표시 상품들이 진열대를 메우기 시작했다. 일본 맥도널드는 1998년 130엔이던 햄버거 가격을 반값인 65엔으로 내렸다. 과도한 할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판매량이 1년 전의 10배에 달할 정도로 대박을 쳤다. 100엔숍, 저가 의류업체 유니클로, 규동(소고기덮밥) 체인 요시노야(吉野屋)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기업들이다. 요시노야가 후발업체 스키야, 마쓰야와 벌인 할인경쟁은 ‘규동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덮밥 가격이 180엔(약 1870원)까지 하락했다.
저가경쟁은 불황경제의 특징이다. 줄어든 수입에 맞춰 지출을 줄이면서 제값 상품이 팔리지 않는 데 따른 고육책이다. 당시 일본의 엔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원자재 등의 수입가격이 하락한 것도 저가경쟁을 뒷받침했다. 가격파괴는 소비자들이 불황을 견디게 한 측면도 있다. 수입이 줄자 저가상품 구매로 지출액을 더 줄여서 ‘불황형 흑자’ 살림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격파괴가 임금파괴로 지탱되다 보니 불황이 구조화됐다. 비정규직 확대, 노동 착취를 일삼는 ‘블랙기업’의 등장 등 저가경쟁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도 총수요를 줄였다. 일본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정부가 돈을 풀고 기업들의 임금상승을 유도하는 정책으로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이 컸던 지난해 한국의 가계흑자 규모가 사상 최대수준을 기록했다고 한다. 위기 상황에서 가계가 지출을 급속히 줄이면서 나타난 불황형 흑자다. 코로나19 초기인 지난해 1분기 흑자율이 가장 두드러진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안 쓰고 보자’는 심리를 키운 결과이다. 한국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잠재성장률과 총수요가 위축되면서 1990년대 일본형 불황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가계의 불황형 흑자도, 그 부작용도 일본과 닮은꼴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일본 정부에 비해 재정 여력이 크다는 점이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려 총수요를 떠받치는 것이 불황을 제대로 빠져나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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