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특파원 칼럼] 노다의 역주행

서의동 2011. 9. 29. 18:08
2001년 취임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두고 미 언론들은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뭐든 전임 빌 클린턴 대통령과 반대로 하는 부시 정부의 행태를 비꼰 조어다. 그렇게 바뀐 강경 외교정책은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낳으며 미국을 수렁에 빠뜨렸다.

경향신문 DB



취임한지 한달이 채 안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를 평가하기엔 성급한 감이 있지만, 적어도 그의 국정운영은 클린턴의 뒤를 이은 부시를 연상케 한다. 말기에 지지율이 10%대로 곤두박질치며 만신창이가 돼 물러난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강박증이 엿보인다. ‘ABK(Anything but Kan) 정책’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간 전 총리의 정책이나 국정운영 방식은 철저히 부정되고 있다.
 
2009년 집권한 민주당은 내각주도의 정책결정을 표방하며 당 정책조사회를 약화시킨 바 있다. ‘족(族)의원’들이 특정 분야 민간업자들과 유착해 정책과 법안, 예산을 유리하게 해주고 정치자금을 받아온 자민당 구태정치를 근절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노다 총리는 의원들이 정책결정에서 소외되는 것을 막겠다며 정책을 결정할 때 당 정책조사회의 사전 심의를 받도록 했다. 최근 만난 일본 신문의 한 기자는 “정경유착의 상징인 족의원들이 재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관료의 최고봉인 사무차관 회의도 매주 정례화됐다. 민주당은 2년전 국정에 대한 관료의 입김을 줄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는 사무차관 회의를 폐지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사무차관 회의를 직접 주재한 노다는 “정치인만으로는 세상을 잘 되게 할 수 없다”며 관료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아마추어 장관들 모임인 각료회의는 이제 허울만 남게 됐다. 
 
국정 시스템만 바뀐 게 아니다. ‘일본판 4대강 사업’인 군마(郡馬)현 얀바댐 공사를 재개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민주당이 집권 뒤 얀바댐 건설을 중단한 것은 득표를 위해 불필요한 건설공사로 예산을 낭비해온 자민당의 ‘콘크리트 정책’과 결별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노다는 가벼운 말실수를 빌미로 ‘탈원전’ 성향의 하치로 요시오(鉢呂吉雄) 경제산업상을 일주일만에 자른 뒤 유엔총회에 참석해 원전수출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3분의 2 가까이가 ‘탈원전’을 희망하는 여론에 아랑곳없이 연내라도 원전 재가동에 나설 기세다. 동일본대지진 복구와 부흥을 위해 담배값은 올리면서 부자들 상속세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국민들의 고통을 수반하는 증세를 언급하면서 국회의원 정원감축 등의 고통분담 방안은 논의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재무성은 빈방이 넘쳐나는 사택들을 놔두고 도쿄 인근 금싸라기 땅에 호화 공무원주택 신축공사를 벌이고 있다. 
 
민주당 대표경선에서 진창 속의 미꾸라지처럼 궂은 일에 몸을 사리지 않겠다는 노다의 연설은 대재난의 고통으로 신음하던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노다는 취임 직후 지지율이 60%로 치솟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형편이 풀린 것은 관료와 정치인들 뿐이다. 주간지에는 ‘노다는 재무성의 꼭두각시’, ‘밤의 총리는 재무관료’ 등의 기사들이 등장했고, 지식인들 사이에선 ‘관료·토건 정권’ 재등장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관료를 장악할 능력이 없는 노다 정권이 결국 휘둘리고 말게 뻔할 것이라는 예상도 적지 않다.

전후(戰後) 최대의 위기를 맞은 일본이 해법을 위기의 원인제공자인 관료주도 시스템의 부활에서 찾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의 정체성을 통째로 내던진 채 역주행하는 민주당 정권을 일본 유권자들이 얼마나 참고 봐줄까. 일본에서 단명총리의 악순환은 아무래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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