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지메와 와(和)

서의동 2012. 8. 9. 15:16

그의 팔뚝에는 담배로 지져진 20여개의 벌건 흉터가 남아있었다. 줄을 맞춘 듯 가지런한 흉터자국이 보는 이들을 더 섬뜩하게 한다. 

일본 센다이(仙台)에 사는 이 고교생이 동급생들로부터 이지메를 당한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학교를 찾아갔으나 학교 측은 되레 학생의 퇴학을 권했다. “흉터를 다른 학생들에게 보여줘 심적 동요를 유발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왜 피해자가 학교를 그만둬야 하느냐”며 학부모가 고성을 지르는 장면이 얼마 전 일본 방송의 뉴스화면에 비쳤다. 


도쿄의 중학교 2년생은 지난해 5월부터 동급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해오다 늑골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결국 지난 3월 학교를 옮겨야 했다.

 

이지메(집단 따돌림) 문제는 한국도 일본 못지 않게 심각하지만 일본의 대처방식은 꽤 독특하다. 이지메 가해자는 버젓이 학교에 남고, 피해자가 학교를 옮기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지메 가해자가 유력집안의 자식인 경우도 있지만, 이지메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이지메 사실이 공개된 것이 더 문제라는 사고방식이고, 한 명만 내보내면 학교가 조용해진다는 식의 편리한 발상이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2008년 “이지메를 당한 아이가 전학을 희망하면 유연하게 대응하라”며 이지메 피해자의 전학을 사실상 권장하는 지침을 각급 학교에 내려보낸 것에서 이런 인식이 드러난다. 이 어처구니 없는 태도에 분개한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 “이지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전학시키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시 교육위원회에 지시했지만 하시모토 시장처럼 ‘튀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런 일처리 방식은 학교뿐 아니라 일본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 일로 조직 전체가 시끄러워지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문제제기를 하거나 반기를 들다간 ‘한방에 훅 갈’ 수 있다. 일본의 ‘원전마피아’들이 핵 재처리 정책을 유지하려고 전력회사 관계자들과 비밀회의를 열었다는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구성된 일본 정부의 검증팀도 조사과정에서 관련부처의 따돌림으로 진상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마이니치신문의 보도를 보면 검증팀이 회의내용을 기록한 메모를 찾기 위해 경제산업성 등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메모같은 건 없다”는 회신을 받는 게 고작이었다. 내각부라는 힘없는 부처 관계자로 구성된 검증팀의 요청에 경제산업성 같은 파워부처가 응할 리 만무했던 것은 애초부터 예상된 일이다.

 

얼마 전 만난 일본의 여성 사회운동가는 동일본대지진의 피해민들이 집단으로 임시거주하는 피난소를 방문해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피난소에 가보니 여성들만 허드렛일을 하고 남성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특히 나이든 남자어른들의 권위의식만 더 높아졌다. 부당하다고 생각해 문제를 제기하려 하자 ‘쓸데없이 분란만 일어난다’며 오히려 핀잔만 받았다.”


 대지진 이후 친구와 이웃 간의 ‘기즈나(絆·유대감 또는 단결)’가 강조되고 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약자들만 피해를 입고 있는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고 그는 씁쓸해했다. 

 

일본인들은 ‘와(和)’를 중시한다고 한다. ‘와’는 융화 또는 조화로 번역될 수 있지만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시끄러운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근대화의 성공체험과 그동안 구축해놓은 사회 시스템에 대한 애착이 전통적인 ‘와’의 개념과 결합하면서 일본은 완고한 권위체제가 작동돼 왔다. ‘와’라는 수레바퀴에 깔린 이들을 보고도 못본 체 해야 하는 암묵의 룰이 있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수레바퀴 밑에 깔리는 이들이 갈수록 많아지면 수레가 멈출 수도 있다. 일본은 지금 수레가 멈추기 직전의 상태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