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거 본거

[해외책] 전후사의 정체 1945~2012

서의동 2012. 10. 13. 17:07

2000년대 초 일본은 이란의 모하마드 하타미 당시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추진한다. 자원이 빈약한 일본은 산유국인 이란과 긴밀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 긴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하타미 대통령의 방일에 맞춰 추정매장량 세계 최대 규모의 아자데간 유전 개발사업에 일본이 참가하는 방안도 강구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지휘하던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외상은 다음 개각에서 돌연 경질된다. 이란과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이 하타미 대통령의 방일 추진에 발끈한 것이다. 미국은 고무라 외상이 물러난 뒤에도 압박을 풀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끝내 하타미 대통령의 방일 계획은 물론 아자데간 유전 개발 참여도 취소하고 만다. 아자데간 유전의 개발권은 이후 중국으로 넘어갔다. 


 최근 일본 서점가에서 화제가 집중되고 있는 <전후사의 정체(戰後史の正體) 1945-2012>(소겐샤)의 한 대목이다. 일본 외무성의 고위관료 출신인 마고사키 우케루(孫崎享)가 쓴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정치·외교사를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본 책이다. 저자는 ‘대미추종’과 ‘자주’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전후 일본과 미국 간의 관계를 집중 조명한다.




이 책의 서술에 따르면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에 이르기까지 어떤 형태로든 자주노선을 선택한 총리들은 여지없이 중도 하차했다. 미국은 일본의 정당정치, 외교 및 방위정책, 산업정책 등 전방위에 걸쳐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집요하고도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이란 아자데간 유전 개발과 관련해서는 조지 W 부시 정권에서 부통령을 지낸 딕 체니가 직접 개입해 실무관료들까지 직접 솎아냈다.


책에는 상식을 뒤집는 내용들이 적지 않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가 대미추종파라는 일반의 인식과 달리 미군기지의 대폭적인 축소 등 종속적인 미·일 동맹관계를 개선하려 분투한 ‘자주파’였다는 서술도 있다. ‘안보투쟁’은 안보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로 번졌으나 학생운동 세력에 재계로부터 자금이 전달됐다는 증언도 나온다. 미국이 반정부 시위를 이용해 기시를 몰아내기 위해 친미 경제단체인 경제동우회를 움직여 전화요금조차 못 낼 정도로 투쟁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젠카쿠렌(全學連·전국학생자치회연합)’ 지도부에 대규모 자금이 건네진 사실을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입증한다. 


2008년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 재임 때에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자위대의 수송헬기부대 파병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는 위키리크스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그해 금융위기로 미국의 국책 금융회사인 페니메이가 경영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일본에 막대한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후쿠다 총리는 두 가지 압력에 직면하던 무렵 돌연 총리직을 사퇴했다. 그가 2008년 9월 “국민생활을 위해 새로운 포진으로 정책실현을 기대한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떠나자 ‘총리 자리를 함부로 내던진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지만,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기 위한 속사정이 있었다고 저자는 추론한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요구와 압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정권교체에 성공한 민주당 정부가 ‘아시아 중시’ 정책을 내걸었다가 3년 만에 정권붕괴 위기를 맞고 있고, 2030년대까지 ‘원전제로’를 실현하겠다는 방안을 만들었다가 미국의 반발로 유야무야된 것 등 열거하자면 부지기수다. 일본에서 전개돼온 굴곡의 현대사를 다룬 이 책은 읽기에 불편하다. 한·미동맹의 음영도 미·일동맹에 못지않게 짙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