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서의동의 사람·사이]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풀버전)

서의동 2017. 1. 6. 20:07

※1월7일자 인터뷰보다 긴 버전. 


주진형(58)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전복(顚覆)적 시장주의자’쯤 되지 않을까. 그와 4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든 생각이다. 한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시장경제가 작동된 적이 없는 만큼 시장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전복적’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는 부딪칠 필요가 있다면 누구와도 그럴 준비가 돼 있는 듯하다. 지난해 12월6일 열린 청문회에서는 재벌 총수들 바로 뒷자리에서 “재벌들은 조직폭력배들과 똑같다”고 발언해 청문회장을 뒤집어놨다. 한화투자증권 대표로 있던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지라는 그룹 지시에 반기를 들다 수난을 당했다.

 

주진형은 분류하자면 진보에 가깝지만 진보진영 내 ‘수구적인 행태’에는 날을 세운다. 20대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의 정책 공약 작성에 참여했지만, 이 당에 대해서도 까칠하다. 그래서 주진형은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의 사회에선 설 자리가 많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운신할 공간이 넓어져야 사회가 바뀔 수 있고, 지금이 그 시기일지 모른다. 

 

지난 12월27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주진형은 한국 경제와 사회를 ‘죽는 쪽으로 진화해 가는 갈라파고스 생물들’에 비유했다. 재벌체제를 개혁하는 데는 경제민주화도 중요하지만 사법개혁이 더 효과적이라고 봤다. 미국 기업 엔론의 최고경영자(CEO)가 분식회계로 징역 24년을 선고받은 것처럼 “법을 안 지키면 아주 큰 처벌을 받는 원칙만 제대로 서도 한국 사회가 엄청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지윤 기자


■‘유리병에 넣은 주먹 못 빼는’ 재벌들 


-지난해 재벌 청문회는 재벌문제의 핵심을 많은 이들이 학습한 계기가 됐다. 총수들의 답변태도를 보면 심지어 영리하지도 않은 느낌이다.   

 

“한 의원이 ‘좋은 경영자가 뭐냐 생각해보라’고 질문했는데 이재용 부회장은 답변도 안하고 가만히 있더라. 보다 못해 ‘기업가치를 높이는거 아니냐’고 의원이 이야기를 끌고 가더라. 본인의 혐의와 관련없는 질문에도 주저하던데, 평소에 그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권력자들은 조리 있게 말할 필요가 없다. 비서실이 다 알아 들으니.


-국민경제는 어떻게 되든 온전히 세습만 되면 된다는 재벌들의 태도가 참담하다. 

 

“우선 경제력 집중이 되다 보니 개혁을 재벌들이 막아버린다. 그럼 숙제가 쌓이고 경제가 왜곡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총수가 그 많은 사업들을 잘 알래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산업을 모르면 경영진도 제대로 뽑을 수 없고, 경영진을 평가하는게 불가능하다. 결국 가신에게 의존하게 되는데 청와대 비서가 장관하고 싶어하듯 가신들은 계열사 고위직으로 내려가고 싶어한다. 그래서 계열사 사장을 흠집내 ‘얘 아닌거 같아요. 제가 갈께요’ 이렇게 되는 거다. 그러다 보니 30대 재벌기업 사장 평균 재임기간이 2.5년 밖에 안 된다. 총수체제는 성과 관리도 안되고 사람을 키우는 체제도 아니다. 다 국민경제에 부담으로 돌아온다.” 


-이건희 회장 때는 달랐나. 

 

“이 회장이 삼성전자는 잘 알았다. 그래서 삼성전자의 CEO들은 비교적 오래 갔다. 반면 전자부문 외 업종은 사장들을 자꾸 갈았다. 회장 본인이 잘 모르니 측근들이 ‘쟤 아닌거 같다’ 하면 바꾸는 거다. 대표적인 예가 삼성생명 사장에 그룹 감사팀장을 내려보낸 일인데 금융업 문외한을 사장 시켰다고 금융위도 기분 나빠했다. 요컨대 총수가 잘 모르는 사업은 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전 세계 어느 누구도 (삼성처럼) 방대한 비지니스를 한 사람이 커버할 수 있겠나. 비서실은 또 무슨 하늘같은 재주가 있겠나?


-총수 지배체제는 효율적인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군대라면 모르지만 기업은 바뀌는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사업부문마다 독특한 성격도 있다. 도저히 맞지 않는 중앙집권 방식을 총수 권력 유지를 위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총수는 지분도, 능력이 아니라 ‘내 말 안 들으면 참수한다’는 권한 하나로 컨트럴하는 것이다. 개방화·세계화된 기업 운영방식으론 비효율적이고 시대착오적이다.” 


-그래서 정부가 지주회사 체제로 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지주회사와는 상관없다. 지나치게 방만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고, 그걸 합리화하려는 것이 근본 문제다. 자기가 쥐고 있는 초법적인 컨트럴을 놔야 하는데 못 놓고 있는 거다. ‘유리병 속의 사탕을 쥐려다 주먹이 끼어 있는 꼴’이다.” 


-일본은 미군정때 재벌해체라도 했다. 

 

“재벌개혁 반대론자들은 ‘주인 없는 회사’가 되면 문제가 생긴다고 하지만 서양이나 일본은 대부분 주인 없는 회사다. 그럼에도 꾸준히 개선하고 성과 내는 조직을 어떻게 디자인하느냐를 고민하고 실천해왔다. 한국은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보틀넥(장애)’을 겪고 있다. 메리토크라시(실력주의)의 위기다. 각 분야에서 좋은 사람을 키워내고, 좋은 사람이 리더가 되는 현상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은 대통령, 재벌을 비롯해 각 조직들이 다 실패하고 있다.”


-IMF이후 사외이사도 도입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흉내만 내고 변죽만 울린거다. 제대로 바꾸려면 총수 이익이 걸리니 저항했고, 결국 제도가 형해화됐다. 재벌총수가 가진 초법적 경영권을 비용 안들이고 유지·세습하려니 메리토크라시가 안되고 사업 포트폴리오의 효율화도 망가지고 있는 거다.“


-일본의 경우 자기 회사 종업원이 아들보다 능력있으면 그쪽에 경영권을 물려준다. 기업의 영속을 핏줄보다 중시하니 ‘오너리스크’도 없다.  

 

“문화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LG의 구본무 회장은 그래도 내가 듣기론 의식이 있다. 재벌 회장이지만 ‘내가 잘나서 이 자리에 있는게 아니다’라며 겸손해 한다고 한다. 그래서 권한위임이 잘 되고 있는 것 같다.”


-CJ 이미경 부회장 경질 사건은 어떻게 보나. 

 

“쌍방과실이다. 세금을 안내고 세습해야 하니 구린 짓을 할 수 밖에 없다. 권력을 쥔 이들이 권력 남용을 쉽게 생각하는 것도 크다. 이는 사법적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 진영에서는 사법개혁을 주장한다.  

 

“우리나라 ‘보틀넥’ 해결의 핵심은 사법개혁으로 생각이 모아지는 것 같다. 바꾸려면 한도 끝도 없으니 문제를 어디서부터 손대고 뭐를 바꿔 해결의 맥을 따느냐인데 이게 사법개혁인 거 같다는 거다. 재벌개혁을 고민하던 학자들이 최근 7~8년 사이에 핵심은 사법개혁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수렴되더라. 있는 법이라도 지키도록 하고 안지키면 아주 큰 처벌을 받는다는 거 하나만 제대로 서도 엄청나게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진형은 배임횡령에 대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을 예로 들었다. 기업인들이 유죄판결을 받아도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지 않도록 양형기준의 바닥을 높여놔야 한다는 것이다. ‘걸리면 작살난다’는 교훈을 주는 게 중요하고, 그러려면 검찰개혁·사법개혁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 정당 정책, 진지하지도 치열하지도 않다

 

주진형은 세계은행에서 컨설턴트로 6년을 근무한 뒤 삼성전자로 옮겼다. 이어 삼성증권과 우리금융지주 등을 거쳐 3년 임기의 한화투자증권 대표를 마친 뒤 지난해 2월 더불어민주당 총선정책공약단 부단장을 맡았다. 이례적인 궤적이다. 이유를 물으니 “원래 (앞뒤) 안 보고 뛰어내리는 게 특기”라고 한다.


-현재 집권세력은 경제 비전이 없어 보인다. 

 

“착취적인 경제운영이 얼마든 가능한 구조를 그대로 놔둔 채 거시정책 산업정책 말하면 뭐하나. 한국의 집권세력은 한국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아이디어가 고갈돼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명박의 7-4-7인데 거짓말인게 다 드러나면서 내놓을게 없으니 박근혜 때 야당의 경제민주화를 가져왔다. 이건 자기들도 비전이 없다는 걸 인정한 거다. 4·13 총선 때 야당 공약과정에 참여하면서 보니 새누리당은 내용이 아무것도 없다. ”


-여당이 자기정책에 대한 프라이드가 없는거 겠지만 바꿔 말하면 한국경제에서‘아 요거만 하면 좋아지겠다’는 희망이 안보이는 측면도 있다. 

 

“아까 이야기한 사법개혁인데 박근혜를 보면 정치검찰을 이용한 게 아니라 검찰정치를 한 사람이다. 검찰로 정치한 사람이 어떻게 개혁을 할 수 있겠나. 4대 개혁에 금융이 끼어 있는데 왜 끼었는지 아무도 모르더라. 노동개혁도 공기업·대기업 노조가 과도한 혜택을 누리고 경직적이라는 공감대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과연봉제로 가자는 거는 하책이다. 그 구조적인 경직성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거다.


“우리가 계속 이야기한 것은 고용보험의 확충이다. 부실한 고용보험의 확충을 먼저 시작하고 그것과 바터(교환)를 해야 국민들도 지지를 하고 노조에 이야기할 명분도 서는 것 아니냐. 공공부문 부채를 줄인다고 하는 것도. 이건 단순히 부채가 크냐 작으냐의 이슈가 아니다. 국가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공공부문에 갖다 놓은 케이스가 너무 많다. 대표적인 게 토지주택공사다. 교육개혁은 ‘국정교과서’ 말고 뭘했는지 잘 모르겠다. 교육을 중앙차원에서 개혁하겠다고 어프로치하는게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탈중앙화로 가야 하는데 교육부가 교부금으로 목줄을 쥐려 한다. 오히려 이 체제를 바꾸는게 진정한 교육개혁이다. 중앙집권적으로 모은 세금을 뿌려주는데 권세를 부려보겠다는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으면 개혁이 안 된다.


“한국의 집권세력은 21세기의 한국을 어떤 방법으로 끌고 갈 거냐에 대한 사고능력이 없다. 김기춘 같은 70대의 복귀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의 정책공약에 참여했었는데 정책실력이 어떻던가. 

 

“실력은 내가 보기엔 시민단체와 교수들에게 ‘외주’ 주는 식, 딱 그 느낌이다. 무슨 정책을 의원들이 내놨는지 코디네이팅도 제대로 안된다. 정책위원회도 각 상임위가 의원들이 무슨 발의하는지를 캐치업하는 수준이다. 인력도 실력도 없더라.”


-수권 정당이라면 그 정도론 안되는거 아닌가. 

 

“당내에서 정책에 관심도 없고 논의할 상대도 없다. 영국은 총리를 지낸 캐머런, 토니 블레어가 당 정책국 출신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 당 정책기획부에 들어간다. 그 중에서 똑똑한 친구를 공천 줘서 내보낸다. 당내에서 정책 트레이닝을 한 사람들이 커서 국회의원이 되고 각료가 된다. 우리는 당내 정책개발 부서가 없다. 여당은 공무원 거 갖다 쓰고 야당은 시민단체 거 갖다 쓴다. 근데 탓하기도 어려운 게 국민이 정책보고 투표를 안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야당에서 선거캠페인을 총괄했던 인사가 ‘정치인들은 정책을 맨 나중에 골라서 걸치는 옷쯤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


“당 지도부가 안정성이 없는 것도 문제다. 원내대표가 1년마다 바뀌고, 정책위 의장은 더 자주 바뀐다. 그런 당이 어떻게 정책을 개발하고 유지할 수 있나.”


-총선때 내놓은 경제민주화 의제도 상당수 빠졌던데. 

 

“뺐다고 뭐라 하니 당론이긴 하대. 정책위 구성을 보면 원외 정책위 부의장을 8명이나 임명했다. 경력 관리하라고 감투 하나씩 주는 거다. 정말 정책에 대해 진지하다면 이렇게 운영하지 않는다. 치열하지도 진지하지도 않다. 국민들도 정당의 공약이나 정책을 진지하게 안 받아들인다. 만들어서 발표하는 사람이 진지하지 않으니. 정당의 정책공약은 그냥 훅하고 뿌려보는 거다.”


-다음 정권이 경제분야에서 꼭 해야 할 과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재벌개혁이 가장 큰건가.

 

“장단기 이슈가 있는데 재벌개혁은 체질에 관한 거라 당장 효과가 안난다. 경기가 나쁜데 불안감 조성한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체질 개선은 그 성과가 한참 뒤에 나온다. (메르켈 총리처럼) 집권을 10년씩 하지 않으면 어려울 수 있다. 단기적인 이슈는 거시정책인데 당장 발등의 불은 부동산과 가계부채 문제다. 관료한테 맡기면 대증요법으로 폭탄돌리기만 할 거다. 대출을 점진적으로 강화하고 부동산 가격하락을 감내하면서 은행에 자본확충을 하는 방법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 우리 경제를 보면 기업부채가 과도하게 확장되면서 IMF를 맞았고, 이후 경기는 가계빚 팽창으로 버텨온 거다. 그 빚이 한번 터지게 돼 있다. 신용을 긴축으로 유지하면서 총수요 부족을 재정으로 보완해야 한다. 재정을 공공건설에 쓰는 식이 아니라 가계에 직접 돈을 꽂아 소비효과를 늘려야 한다. 등록금을 깎아주고 실업보험을 확충하는 식이다. 공무원이 중간에서 배분하는게 아니라 자격을 갖춘 가계에 직접 직불금을 주는 식으로 해야 효과가 난다.”


-재원이 필요한데, 그럼 증세해야 하는가. 

 

“그게 사실 딜레마다. 경기가 나빠 세수가 안 걷히니 증세를 해서 예산 균형을 맞추자는 논리는 넌센스다. 경기가 나쁜데 진보쪽은 증세를 이야기하고, 보수인 여당이 경기가 나쁜데도 재정정책 확대를 반대한다. 증세는 분명히 경기에 부정적인 효과가 있다. 그럼 어찌 해야 하느냐. 조세체제의 합리화와 조세정책에 대한 논의의 층위가 다른데 이걸 섞어 이야기한다. 증세를 하면 복지에 쓸 예산이 생길 수 있다지만 경기가 더 나빠져 세수가 더 안 걷히면 어떻게 할 건가. 확장적인 재정정책, 세제 합리화와 경제정의를 위한 세제개편 문제는 분류를 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확장적인 재정정책을 쓰기 위한 증세는 아니다. 쓸 필요가 있으면 그냥 쓰면 된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때 재정을 많이 풀었더니 경기가 좋아 세수가 많이 걷혔다. 그래서 빚을 줄인 선순환이 이뤄졌다. 우리는 지금 확장적 재정정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적자가 될 수 있으니 세금을 올리자고 하면 이야기가 섞여 버린다.

 

“경기가 나쁜데 정부는 긴축예산을 쓰고 있다. 여당은 균형예산을 물신처럼 신봉하는 이들로 꽉 차있다. 한국은 거시정책에 대한 논의자체가 실종된 나라다. 유일하게 이주열 한은 총재가 이야기할 뿐이다.“


-좀 다른 얘긴데 한국의 연구·개발투자가 막대한 데도 성과가 안나오는 거는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나. 

 

“그것도 거버넌스(관리방식)와 연결된다. 잘 하는 사람은 믿고 건드리지 말고, 지원해주는 메리토크라시가 없다. 누구 줄을 잡아야 하고 서로 안 믿고. 좋은 사람을 적재적소에 놓고 안정적으로 길게 하도록 만들어주는 게 선진적인 방식이다. 중앙집권화된 권력의 행사가 관료주의를 부르고, (책임 안 지려고) 자꾸 룰과 정량적 지표를 만들어야 한다. (연구) 내용은 내 알 바 아니다. 어차피 순환보직으로 돌아가니까. 우리가 가장 취약한게 누가 잘하고 못했는지를 따지는 성과관리다. 그걸 한국이 대규모로 실패하고 있다.” 


“우리는 안정적으로 연구자를 믿고 기다려줄 수 없다. 왜냐면 윗사람이 이 관리자의 실력을 제대로 모르니까. 자기가 못 알아보면 알아보는 사람에게 위임해야 하는데 그걸 안 한다. 이건 우리 사회 전반의 엄청난 문제다. 메리토크라시가 운영되기 위해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문제의식이 없다. 자기 능력을 벗어나는 권력을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이 주니까 문제가 생긴다. 권력을 쥔 사람이 꾸준히 권력을 내려놓고, 아랫사람들도 내려놓도록 감시하지 않으면 자율화와 분권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기술도 쌓여야 하지만 자율적이고 분권화된 조직운영의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과장이나 대리가 (인사) 평가에 참여해 본 경험이 거의 없지만 서양은 20대 때부터 평가도 해보고, 해고도 해본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조직 내 역할에 대해 작은 단계부터 연습을 하는 거다. 리더가 해야할 게 전략, 인사, 의사결정 3가지인데 어릴 적부터 훈련해보는 거다. 한국에선 심지어 사장들조차 인사를 안해본 이들이 수두룩한데 굉장히 위험한 거다. 일본 군대식의 극도로 집중화된 조직운영 방식을 사회 각 분야에서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사회가 안정돼 있지 않다 보니 윗사람이 계속 바뀐다. 이러니 메리토크라시가 성립될 수 없다. 외국대학들 보면 150년 됐는데 총장이 10여명에 불과하다. 이걸 장기집권이라 볼 수도 있지만 이 사람들은 독재하는게 아니라 이사회, 학생회, 교수들과 협의해가면서 민주적으로 끌고간다. 권력을 나누면 장기집권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는다. 한국은 ‘집권’이라고 하면 왕의 전제정치적인 집권만 안다. 이걸 깨야 한다.”


■ “한국의 진보 연대의식 결여”

 

주진형은 자신의 생각과 가장 비슷한 인물로 2014년 타계한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를 꼽는다. “재벌개혁을 고민하다 결국은 사법개혁이 가장 중요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흘러갔는데 그와 생각의 흐름이 비슷했다.” 진보진영도 개혁과 수구를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도 같다.


-조금 이야기를 바꿔서 진보쪽의 경제관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진보쪽 사람들은 시장경제에 대한 불신이 아주 강하다. 자본주의의 장점이 뭔지 안 보려하고 국가 규제를 더 선호한다. 지적 형성기에 강단막시즘이나 민족해방(NL), 민중민주(PD) 이념의 영향이 강한 거 같다. 이념적 사고의 틀이 현실문제를 보는데 엄청난 방해를 하고 있지만 그걸 인정 안 하더라. 대기업 노조가 수구적인 행태를 보이고 사회개혁을 방해하고 있는 상식적으로 보이는 현상을 인정 안 한다. 예전에 기아차에 대해 국민기업이라는 이상한 호칭을 붙이면서 부실이 나도 살려야 한다는 논의로 흘렀다. ‘외국자본에 먹히면 안된다’는 논리도 등장했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 중 하나가 경쟁이고, 경쟁은 지면 퇴출돼야 한다는 건데 한국은 여기에 엄청난 반감을 갖고 있다. 경쟁에서 진 조직의 조직원들이 자기 직장 지키기를 사회정의처럼 이야기하는걸 진보층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대기업 노조의 이익을 국민경제의 이익과 등치시키는 논리에 빠져있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복지는 가계에 직접주는 게 중요하다. 육아·아동수당, 교육비 경감. 질좋은 공교육 공급 등이 우선이다. 또 소득이 끊긴 사람을 보완해주는 게 복지이고 그런 면에서 1순위는 노인복지다. 근데 진보층은 노인복지에 소극적이다. 진보층이 갖는 계층적 취약성, 연대의식 결핍 탓이다. 대기업 노조의 선호에 맞춰져 있다. 노인연금, 고용보험 확충이 우선과제인데 노인연금은 선심성으로 취급받고 고용보험은 아예 이슈도 안된다. 우리 경제가 독과점 경제체제이고, 그 원청구조에 들어가 있는 노동자들만 조직화가 돼 있고 그 사람들이 ‘조직화된 진보’로 자칭한다. 그에 속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자기 걸 내놓거나 연대의식을 발휘하거나 해본 경험이 없다.”


-연대가 부족한 건 사실인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연대’에 대한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서구사회에서는 노조가 이 역할을 해온 반면 우리나라는 (노사가) 결탁되면서 경제적 취약층을 대변하는 노조가 없다. 문제의식도 별로 없고, 조직화하려는 노력도 한다. 중소기업 노조조직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걸 안 한다. 시장경제에 대한 불신이 크다 보니 경제를 관료가 컨트럴 한다. 대표성없는 관료에 재량권이 너무 많아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관료와 재벌이 쥐고 흔드는 거다. 한국에서는 탈규제나 규제합리화가 개혁적인 의미가 많지만 탈규제를 말하는 순간 진보쪽에서 ‘너 왜 그래’냐고 항의한다. 대기업 노조의 기득권을 건드리는 순간 반발한다.”


“노조는 인사이더(내부자)의 이익을 대변한다. 고용보험은 상관없는 사람에게 주는 거다. 이런건 연대의식이 발휘돼야 이슈가 되는 건데 나만 안 잘리고 우리 조직만 해고가 없으면 되니 이슈로 삼지 않는다.”


-우리 자본주의 태동이 총독부 시대에 본격화됐는데 그때부터 정경유착 구조가 형성됐고 지금까지 계속되는 느낌이다. 서구적 의미의 자본주의 경험이 없고 학습이 안 돼 있다.  

 

“민중의 정치적 의사를 대표하는 정치 프로세스를 만들지 않은 채 시장경제가 굴러갔으니. 지금 한국경제가 고령화·인구감소, 낭비적 교육으로 인력의 질 저하, 노년이 불안하니 사람들이 안정지향으로 가고, 소비도 활성화 안 되는 문제가 있다. 장기적 차원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결여하고 있지만 이런 문제의식 자체가 부족하다. 우리 경제 수준되는 어느 나라도 우리만큼 노년연금이 부족한 나라가 없다. 아이들 쓸모없는 교육시키며 그 부담을 학부형에게 지우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 감옥을 갔다온 전과자들이 아버지 덕에 재벌총수로 경제를 꽉 쥐고 있다. 한국이 이상한 면에서 갈라파고스화되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이 나라가 대체 어떻게 굴러가지’라며 이상하게 본다. 아주 신기한 조합인데 한국인만 모른다.”


-일본만 해도 고3때까지 방과후 활동을 한다.

 

“한국은 동양 삼국 중 가장 심각한 신분사회의 문화적 코드에 일본 군국주의의 국가운영 방식, 여기다 전후 미국식의 어설픈 껍질이 뒤섞여 있다. 이 3가지가 서로 잘 안맞고 부딪히기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다. 그 뼈대를 제공한 일본은 그런데 지난 15년간 조금씩 정상 사회가 돼가고 있다. 한국은 베껴왔기 때문에 옳은 쪽으로 수정이 안 되고 갈라파고스가 돼간다. 베껴온 것이 우리 틀 안에서 괴물처럼 진화를 해버린 거다. 한국이 지금의 일본 정도만이라도 따라가주면 좋겠다. 한국은 검증과 평가를 안하는 사회다. 나는 9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모델을 따랐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7~8년 전부터 일본만 따라가도 좋겠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은 법을 만들어 놓고 지키지 않는다. 최저임금을 정했지만 단속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사회에 대한 불신이 쌓이고 있다. 

 

“‘개선되고 있다거나 뭔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안정감과 모티베이션을 준다. 열심히 해도 안 바뀐다면 하고 싶지 않은거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는 대단히 되는 건 없어도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갈 거 같다, 불합리한 적폐들이 한두 개씩은 그래도 바뀐다는 느낌이 있어 기다릴만 했다. 근데 지금은 하나도 안 바뀌고 더 나빠진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변화하거나 참여하거나 서로 참아주려는 게 없어지고 짜증만 난다. 얼마나 짜증나면 (촛불시위에) 저 많은 사람들이 나오겠느냐(웃음).


-일반적으로 경제전문가들은 성장동력 이야기를 하는데 주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버넌스가 바뀌는게 중요하다는 거냐. 

 

“합리적인 시장경제에 필요한 제도를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도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할 여력이 있다. 여기에 사람을 키우고 쓰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리더를 선택하고 그에 권한을 주는 방식, 권한을 나누고 운영하는 방식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먹거리 산업을 진보쪽 지식인들도 이야기하곤 하는데 이런 거 좀 하지 말라고 했다.”


“재벌개혁은 지배구조 개혁보다 사유재산제도의 확립이 핵심이다. 자기 재산이 아닌 걸 훔쳐가고 있지 않나. 자본주의의 근본을 망치고 있는 거다. 열심히 일해도 재벌 아니면 돈을 못 벌지 않나. 우리는 갈라파고스 생물처럼 이상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죽는 쪽으로 진화한다. 이걸 정상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도 한국은 성장동력이 회복될 수 있다. 조직운영 방식도 문제다. 직장 민주화도 필요하다. 그것만 해도 성장동력이 나온다. 특정 산업에 얼마를 투자하니 뭐니 이런 게 성장동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