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 가오리의 신간 <벌거숭이들>. 집에 있길래 별 생각없이 들춰보다가 끝까지 읽어버렸다. 사실 이 작가의 책은 처음인데 생각외로 재미있었다. 가족과 결혼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관계맺기가 품은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을 느꼈다고 해야할까.
작품에는 다양한 연애관계가 등장한다. 우선 채팅으로 만나 동거까지 이르게 된 50대 후반의 커플이다. 여성은 57세의 '카즈에'로 남편을 사별했고, 딸이 결혼해 아이 넷을 둔 주부이다. 딸은 물론 손녀에게도 '할머니'가 아니라 이름을 부르라고 하는 특이한 캐릭터이고, 집 2층은 여대생 2명에게 세를 주고 있다. 이 여성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두세살 연상의 남자(야마구치)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이 남성은 아내와 20대의 딸이 있는 집을 나와 이 집에 와서 동거하게 된다. 7개월쯤 동거하던 중 여성이 갑자기 숨지는 변을 당한 뒤에도 이 집에 당분간 눌러살게 된다. 구조조정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된 뒤 별 직업이 없는데다 아내에게 집과 재산을 다 넘겨주고 떠나왔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36세의 치과의사(모모)와 그의 절친인 가정주부(히비키)를 동시에 사귀는 9살 연하의 구두회사 직원(사바사키)이다. 모모는 6년간 교제하던 남자(이시와)와 뚜렷한 이유없이 헤어진 뒤 사바사키와 본격적으로 사귄다. 사바사키는 모모의 절친인 히비키에게 색다른 감정을 느껴 접근한다. 아이넷과 남편을 건사하느라 '이중턱'이 돼버린 평범한 주부 히비키에 사바사키는 묘한 매력을 느끼고 열중한다. 모모는 그런 사바사키에 대해 불안을 느끼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관계를 유지한다. 한편으로 헤어진 이시와와 다시 만난다.
마지막은 모모의 언니인 40대 초반의 요우로 프리라이터로 일한다. '연애는 절대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채 셰어하우스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남녀 술친구가 많다. 하지만 술친구로 시작한 사바사키의 직장상사이자 유부남인 나라하시와 어느새 연인이 된다.
등장인물은 대체로 감정에 충실하지만, 작품에서는 감정의 생성, 변화, 소멸이 극도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작가의 글쓰기가 원래 그런건지, '남녀관계는 다 쿨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심지어 가정주부 히비키가 사바사키와 관계를 맺은 사실을 단 한줄로 가볍게 처리해 버리기까지 한다. 다른 소설 같으면 법썩을 떨 장면이었을텐데도.
모모 자매의 모친인 유키는 일본의 전통적인 가정주부로 보수적인 연애관과 결혼관을 유지하고 있다. 딸이 제돈으로 반지를 사서 끼는 것 조차 질색하는 타입이지만 남편(에이스케)의 생일잔치에 유부남 남친을 데려온 큰 딸을 받아들인다. 오랜 기간 딸을 이해하지 못해온 유키는 만찬을 통해 '화해'를 시도한다.
작가는 연애관계에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카즈에가 죽은 뒤 어쩔 수 없이 그 집을 지키고 있던 야마구치가 세들어 사는 여대생(아스미)의 고향집에 가서 농사를 도와주고, 그것을 계기로 새 인생을 찾아내는 과정을 보여주는가 하면, 반항기에 접어든 초등소녀 미쿠(히비키)가 아스미의 방으로 놀러가는 장면을 마지막에 등장시킨다. 모모가 헤어진 남친의 여동생과 여전히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다양한 유형의 연애를 보여주는 '연애박람회장'같은 전개속에서 작가가 강조하려는 것은 가족과 결혼이란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관계맺기의 긍정성인 듯 하다. 좀 구태의연한 평이지만 인구감소에 비혼이 만연한 가족해체 시대를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쿨하게 헤쳐나갈 필요가 있다는 게 작가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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