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 재미있는 남북관계

서의동 2018. 4. 13. 15:44

올 들어 재개된 남북교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측 예술단의 평양 공연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이 마주친 장면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공연을 참관한 뒤 레드벨벳 멤버들과 차례로 악수하더니 아이린과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한 장면이 워낙 초현실적이다 보니 소셜미디어 공간에선 각종 ‘드립’들이 만발했다. 팬심 가득한 김정은이 아이린과 인증샷까지 찍었으니 ‘성덕(성공한 덕후)’이 됐고, 아이린은 ‘대북 억지력의 정점’에 올랐다는 따위들이다. “내가 레드벨벳을 보러 올지 관심들이 많았는데(후략)” “같은 동포인데 레드벨벳을 왜 모르겠느냐”는 말에 ‘덕후’임을 확신한 이들이 ‘김정은이 레드벨벳을 한 번 더 보려고 멤버 조이를 일부러 불참시켰다’는 음모론을 만들어 퍼뜨리기도 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와 선제타격론으로 북한과 미국이 서로 으르렁대면서 한반도가 전쟁 분위기에 휩싸이던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이런 농담을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출처 = 한국일보

 

1월 초순부터 남북관계에 시동이 걸리더니 평창 동계올림픽 시즌이 되자 여자 아이스하키팀, 응원단과 예술단이 줄줄이 내려왔다. 흐릿한 영상으로만 보던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내려와 주근깨가 보일 정도로 TV화면 가득히 얼굴을 채우더니, ‘천안함 주범’이라고 보수세력들이 지목하는 김영철 통일전선부장마저 등장하자 사람들은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을 읽을 때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남측 특사단을 노동당 청사에서 만난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밝히고, 부인 리설주가 만찬장에서 특사단과 건배하는 장면쯤에 이르자 감이 느린 사람들도 ‘북한이 움직이고 있다’고 그제서야 깨닫기 시작한 듯하다. 이 무렵 등장한 김정은과 레드벨벳의 인증샷은 북한을 ‘엄근진(엄격·근엄·진지)’으로만 대해오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빵 터지는’ 역사적 경험을 안겼다. 스트레스의 근원이던 북한이 ‘재미’와 ‘웃김’을 유발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앞으로의 남북관계에 요긴한 자산이 될 것 같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 방한한 북한 가수 김옥주는 빼어난 가창력으로 왁스의 노래 ‘여정’을 불렀다. 유튜브 사이트 공연영상에는 ‘대단하다’는 댓글들이 달렸다. 그 김옥주가 두 달 뒤 남측 예술단의 평양공연에도 얼굴을 내밀며 한국 대중에 한발짝 더 다가왔다. ‘J에게’를 불렀던 가수 송영도 두 달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과 얼굴을 아는 북한 가수가 우리에게 등장한 건 남북교류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가수 정인은 북한 사람들에 대해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유머러스하고 재밌었다”며 “안내해주는 분과 작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동네 언니 같았다. 다시 볼 때는 ‘언니 동생’ 하자고 했다”고 했다. 낯섦이 적의와 충돌을 낳는 석기시대 같은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남북의 사람들이 만나 얼굴을 익힐 기회가 더 늘어나야 한다.

 

남북관계도 이제 어깨의 힘을 조금 빼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돼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저녁 모임에서 일본에 다녀온 이의 여행담이 이어지다가 남북관계로 화제가 옮아가더니 ‘개마고원에서 캠핑하고 싶다’는 말들이 오갔다. 일본 가서 열 지갑을 북한에서 열겠다는 이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제부터가 중요한 국면이긴 하다. 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과 5월 말 6월 초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핵을 내주고 체제안전을 받는 큰 틀의 교환에 합의해야 한다. 판이 헝클어지는 돌발사태 없이 무사히 합의가 이뤄질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북한의 요즘 태도를 보면 기대해 봄직하다. 


북·미 합의가 이뤄지고 대북제재가 해제되면서 북한이 정상국가를 향해 잰걸음을 걷게 되면 여름휴가 때 백팩 차림으로 평양행 열차에 오를 날이 의외로 일찍 올 수 있다. 기차나 자동차로 오갈 수 있는 데다 심지어 말이 통하는 이웃의 등장이다! 남북 간에 쌓인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진행하면 될 일이다. 100년 넘게 이웃다운 이웃이 없었던 우리에게 북한을 사귀는 일은 간단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차이를 존중하고, 느긋하고 꾸준하게 교류하면 크게 그르치진 않을 것 같다.

 

끝으로 한마디. 레드벨벳 예리가 김 위원장과 악수한 걸 “너무너무 영광이었다”고 했다가 입길에 올랐지만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해 그랬을까. 남들 가기 어려운 곳에 갔다가 ‘레어템’과 마주친 경험을 요즘 청년들의 ‘과공(過恭)어법’으로 표현하다 보니 얼떨결에 나온 말 아닐까(레드벨벳은 방북 전부터 ‘영광’이란 단어를 많이 쓰기도 했다). 방북 며칠 만에 빨간물이 들었다며 ‘죽자고 덤빌’ 일은 아무래도 아니다. (2018년 4월12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