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지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머릿속은 복잡할 것이다. 70년 적대관계이던 미국의 정상과 운명을 건 거래를 해야 하는 중압감이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임박한 협상의 성공 여부도 그렇지만, ‘트럼프 이후의 미국 정부가 합의를 지킬 것인가’에까지 고민이 뻗쳐 있을 것이다.
리비아나 우크라이나 사태까지 갈 것 없이 3년 만에 파기된 ‘이란 핵합의’를 봐도 김정은 위원장의 고민을 헤아려 볼 수 있다.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2015년 7월14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독일·유럽연합(EU)과 함께 이란이 핵 활동을 제한하면 제재를 푸는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 이란과 합의했다. 이후 이란은 원심분리기 감축, 저농축 우라늄 해외반출 등 합의를 이행했고 미국과 EU는 6개월 뒤 경제·금융 제재를 해제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자 사태가 급변했다. 집권하자마자 이란을 비롯한 이슬람 7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을 금지했고, 이란이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며 반발하자 경제 제재를 부과했다. 이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란을 자극하더니 지난 5월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아랑곳없이 이란 핵합의 탈퇴를 강행했다. 세계 주요국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합의 문서가 휴지조각이 됐고, 미·이란 관계는 핵합의 이전으로 후퇴했다. 직전 정권이 체결한 외교합의를 손바닥 뒤집듯 파기한 트럼프가 이번엔 북한에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면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고 손을 내밀고 있다. 물론 지금 분위기라면 트럼프는 임기 내내 북한에 호의를 유지할 수도 있고, 비핵화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임기 중 북·미 수교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이후에도 미국의 대북 태도가 변함없이 유지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트럼프가 ‘트럼프 이후’의 미국을 보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워싱턴의 외교 기득권층에는 핵·미사일 말고도 북한을 궁지에 몰 이슈는 얼마든지 있다. 북핵이 아니라 북한 자체를 적대시하는 네오콘들이 북·미관계를 이란 핵합의처럼 파탄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란은 그래도 중동의 패권을 유지할 힘이 있지만, 핵과 미사일을 버린 북한은 동북아시아의 소국일 뿐이다.
북핵 위기 25년은 북한으로서는 협상 상대국의 ‘정권교체 리스크’를 절감한 기간이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 수교 직전까지 갔던 북·미관계가 조지 부시 행정부로 교체되자마자 급변해 비핵화와 북·미 국교정상화를 담은 ‘제네바 기본합의’가 결국 파기됐다. ‘6자 회담’에서 2005년 9·19 합의를 도출했지만 합의 직후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의 북한계좌를 동결하면서 좌초한 걸 보면 다자협상도 미덥지 못하다. 세계 최강 미국이 변덕만 부리면 어떤 합의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북한은 똑똑히 지켜봐왔다.
한국도 다를 게 없다. 김 위원장은 4·27 정상회담에서 “아무리 좋은 합의가 나와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기대를 품었던 분들에게 낙심을 줄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합의 이행을 당부한 것이지만, ‘문재인 이후’에 대한 불안감이 깔려 있다. 문 대통령과 아무리 신뢰를 쌓아도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남북관계 악화는 물론이고 북·미관계에까지 악영향을 미쳤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6·15 선언, 10·4 선언은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자마자 폐기됐다. 오바마 행정부가 북핵 문제에 손을 놔버린 것은 이명박 정부가 북·미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맞바꾸자는 구상에 어깃장을 놨던 탓도 크다.
북한의 비핵화는 되돌아올 수 없는 ‘편도(片道)열차’다. 한번 타면 도중에 내릴 수도 없다. 종착역까지 무사히 갈 것이라는 믿음 없이는 승차하기 어렵다. 북한이 마음 놓고 열차에 오르도록 한국이 역할을 해야 한다. ‘트럼프 이후’의 미국이 한반도 평화를 지지하도록 하는 일은 동맹국이자 당사국, 북한의 이웃인 한국의 몫이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이 한국의 안전보장에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정권 성향에 무관하게 일관된 대북 태도를 갖는다면 북한도 핵을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핵과 미사일이 없더라도 든든한 이웃이 있다면 북한은 리비아, 이란과는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4·27 남북정상회담의 판문점선언을 정치권이 보증하는 것은 ‘문재인 이후’에도 남북관계가 뒷걸음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북한에 부여한다. 지난달 28일 국회의 지지 결의안 채택이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무산되긴 했지만,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는 판문점선언에 대한 비준동의가 통과돼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반평화 골방’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2018년 6월 7일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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