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총력전체제 100년의 청산

서의동 2019. 1. 29. 12:56

지난 100여년의 한·일관계 혹은 일본과 한반도 전체를 아울러 볼 키워드로 ‘총력전체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국가의 전 분야를 동원해 총력을 기울여 하는 전쟁이 총력전이고, 이에 맞춰 국가와 사회 전 부문을 재편성한 것이 총력전체제다. 일본이 한일병합을 거쳐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위한 총력전체제에 돌입하는 과정에서 고안해낸 각종 제도는 한반도에 두고두고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1910년 퇴역군인의 전국조직인 재향군인회를 창설해 후방자원의 동원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1924년 학교에 교련제도를 도입했다. 1925년에는 반정부·반체제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을 시행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에는 내각에 기획원을 설치했다. 기획원은 전시에 모든 물적·인적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제정한 국가총동원법의 주무부처였다.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인적동원, 경제통제, 언론·출판 통제를 본격화했다. 현재 한·일 간 최대 현안인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은 이 제도의 산물이다. 1940년에는 각 정당이 해산하고 군부를 뒷받침하는 정치조직인 대정익찬회가 결성되면서 정당정치가 붕괴했다.

 

총력전체제는 식민지배를 통해 한반도 남과 북에 이식됐고, 해방 후 5년 만에 발발한 한국전쟁과 이후 계속된 긴장과 대립은 이를 남북의 특질로 고착시켰다. 특히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몸에 새긴 총력전체제를 집권 기간(1961~1979) 한국에서 철저히 복원했다. 쿠데타 두 달 만에 창설한 경제기획원은 전시 일본의 기획원과 흡사한 권능을 갖는 ‘경제참모본부’였다. 1968년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민방위 훈련을 도입했으며 1969년 교련을 고교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며 전 세대에 걸친 군사동원 체제를 완성했다. 

 

일본의 총력전체제가 다가올 세계전쟁의 승리를 목표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박정희가 쿠데타로 내세운 명분은 반공태세 강화, 즉 북한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그런 박정희에게 1970년대 초 미·중 데탕트와 남북대화로 조성된 평화무드는 그가 애써 만든 병영국가 체제에 균열을 초래할 위험요인이었다. 이 때문에 1971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듬해 유신체제를 성립시킨 것은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전쟁과 분단, 군사적 긴장이 총력전체제의 조건이 되긴 했지만, 이 시점에서는 총력전체제가 거꾸로 분단구조를 공고화하는 작용을 했던 것이다. 박정희 체제를 역사의 필연으로 보는 것은 그런 점에서도 부적절하다.

 

일본의 총력전체제는 패전과 미군 점령을 통해 평화헌법이 제정되고,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면서 허물어졌다. 하지만 일본이 전후(戰後) 고도성장과 풍요를 구가하는 동안 한국은 분단과 전쟁, 독재체제하에서 언제든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총력전체제 속의 일상을 보내야 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과정에서 일본이 미군의 병참기지가 되면서 벌어들인 특수까지 감안하면 일본의 전후 평화와 번영은 한국과 아시아 민중의 희생이 자양분이 됐던 셈이다.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결산을 편리하게 마무리한 채 출범한 일본 평화체제의 철학적 토대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는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확인된다. 이를 넘어서지 못한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겪으며 전후의 물질적 토대에서도 균열을 맞이한다. 이후의 전개는 알다시피 역사수정주의의 범람, 재군비·재무장 노선으로의 회귀다. 최근 행태를 보면 일본이 총력전체제에서 벗어났는지조차 의문스럽다.

 

한국 사회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득했지만 총력전체제의 독소는 빠지지 않았고, 잔재들도 여전하다. 시민사회가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든 이 부스러기들이 합체돼 괴물이 될 수 있음은 박근혜 정부 당시의 국정교과서 파동과 통합진보당 해산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분단체제의 장기화도 총력전체제 유령이 배회할 수 있는 터전이다. 남북 화해와 평화에 불안을 느끼는 냉전세력들이 버티고 있는 한 총력전체제의 허물을 벗어버릴 수 없다. 더구나 일제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한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건재하다.

 

1972년 3·1절에 열린 기념식에서 박정희는 “3·1정신의 생활화는 총력안보에 대한 국민의 총화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3·1운동은 총력전체제를 타파하고 평화의 가치를 드높이려던 민중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정반대의 의미를 지녔다. 그 100주년인 올해는 총력전체제를 성찰하고 극복하는 한 해가 돼야 한다. 대안은 평화체제다. 남북 화해와 협력을 구조화해 분단체제를 허물어 가는 것이 ‘총력전체제 100년’이 쳐놓은 주술과 속박을 벗어나는 큰 걸음이 될 것이다.(2019년 1월24일자 [경향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