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 한반도 대전환에 어지럼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서의동 2018. 11. 12. 17:30

올 들어 남북관계가 복원된 이후 정상회담만 세 차례 열렸고, 문화·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가 전개돼 왔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무기가 사라졌고, 65년 만에 비무장지대에서 전쟁 유해의 발굴이 시작됐다. 이달 말이면 전방 감시초소들도 시범철수된다. 다기한 분야에서 남북관계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다 보니 ‘우리가 어디쯤 와 있고, 왜 여기에 있는지’ 현기증이 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 기사에 냉소 섞인 댓글들이 달리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어 보인다.

 

어떤 변화든 거저 일어나지는 않는다. 운동을 하려고 안 쓰던 근육을 오랜만에 쓰려면 통증이 생기는 것과 같다. 하물며 70년 냉전체제의 껍질을 깨기가 쉬운 일인가. 우리 시야도 정세변화에 맞춰 바꾸지 않으면 초점이 안 맞아 어지럼증이 심해진다. ‘북한은 절대불변의 불가지(不可知)한 집단’이란 인식으로는 지금의 남북관계가 가짜뉴스쯤으로 보이거나, 짜증이 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폄훼하거나 북한의 변화를 왜곡·부인하는 뉴스와 분석들은 이런 심리를 파고든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대변인이다’ ‘북한이 폐기하겠다고 한 영변 핵시설은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 같은 것들이다.

 

영변 핵시설이 ‘고철덩어리’라고 단정하기에 앞서 4차례 영변 핵시설을 방문한 미국 최고의 북핵 전문가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의 견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노후화했어도 가동 가능하고 북한 핵시설에서 핵심적 시설”이라며 “영변의 거대한 핵시설을 폐기하는 절차를 실제로 밟기 시작한다면 가장 중요한 비핵화 과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영변 핵시설은 5㎾ 원자로와 재처리시설, 핵연료봉 제조공장, 우라늄 농축공장 등 390개 이상의 시설이 집적된 핵개발 종합단지다. 이곳만 폐기해도 현재핵과 미래핵의 상당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라는게 헤커의 평가다. 그렇다면 ‘영변 핵시설=고철덩어리’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평가절하하고 ‘선 핵리스트 제출’을 요구하기 위해 고안된 혐의가 짙다.

 

70년에 걸친 북·미 적대관계를 돌이켜 볼 때 ‘비핵화의 시작은 핵리스트 제출부터’라는 주장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이다. 북한이 핵리스트를 제출한다 쳐도 미국이 그대로 믿을까. 미국은 의심 가는 곳은 깡그리 뒤지려 들 텐데 그렇게 되면 이미 외교가 아니다. 이 실랑이로 북·미 협상이 파국으로 가면 한반도는 다시 전쟁위기에 휩싸일 수 있다. 북·미가 협력해 영변 핵폐기를 진행하면서 신뢰를 쌓은 뒤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현실적이다. 문 대통령의 ‘단계적 제재완화론’은 이런 구상을 염두에 둔 것이다. 유럽 순방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자 보수세력들은 ‘북한을 대변하려다 외교참사를 빚었다’고 했지만 ‘일을 되게’ 하자는 차원에서 보자면 검토할 가치가 충분하다. 비핵화의 ‘입구(入口)’가 아니라 국제사회가 납득할 수준의 비핵화 진척 시점에서 ‘당근’을 주자는 구상이 그리 불합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9·19 군사합의서를 두고 보수논객들은 우리 군의 북핵 억지력을 약화시키는 ‘신체포기각서’라고 했다. 하지만 합의서 서명 직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육성으로 ‘비핵화’를 선언했고, 문 대통령은 그날 밤 15만 평양 주민 앞에서 두 정상의 비핵화 합의 사실을 공표했다. 우리도 그렇지만 북한도 한국의 재래식 군비에 위협을 느낀다. 이 불안을 덜어 비핵화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 군사합의서 체결의 목적이다. 비행금지구역 설정으로 ‘우리 전력에 눈가리개가 씌워졌다’고도 하는데 우리 군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군사분계선(MDL) 50㎞ 남쪽에서 비행하더라도 MDL 북쪽 30㎞까지 감시 가능한 정찰기를 보유하고 있다(서주석 국방부 차관 월간중앙 인터뷰). 게다가 군사비 지출은 한국이 북한의 9배(2014년 기준)다. 주한미군 전력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 정도면 그렇게 마음 졸일 일은 아니지 않은가. ‘김정은에게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쳤다’고 댓글 달기 전에 이런 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대전환 여정에는 숱한 난관들이 있고 그때마다 불편해하는 이들도 생겨날 것이다. 그간의 정책 추진이 미숙하고 설명이 부족해 오해를 키운 일도 있었다. 미국과의 견해차나 북한 인사의 돌출언행도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평화 과정의 큰 물줄기는 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달은 안 보고 손가락이 못생겼다고 타박만 해서는 어지럼증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방향에는 동의하되 과속이라고 느낀다면 야당에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동의에 나서도록 요구할 것을 권한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 기조가 유지된다는 확신이 선다면 남북 당국의 조바심도 줄어들지 않겠는가. (2018년 11월1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