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아키히토 일왕이 방한한다면

서의동 2019. 4. 30. 09:49

1995년 고베대지진 당시 피난소를 방문한 아키히토 일왕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최대 격전지였던 오키나와는 일본의 패전 이후 미군정의 지배를 받다가 1972년 5월에야 일본에 반환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5년 7월 아키히토(明仁) 왕세자 부부가 와병 중인 부친 히로히토(裕仁) 일왕을 대신해 국제해양박람회 참석하기 위해 오키나와 땅을 밟았다. 전쟁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되거나 집단자살을 강요당하면서 10만명 가까이 희생됐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 정부와 전쟁의 최종책임자인 왕실에 대한 주민들의 원한은 채 가라앉지 않았다. 오키나와해방동맹준비위원회(오해동)를 비롯한 운동단체들은 한 달 전부터 ‘방문저지’를 외치며 별렀다. 

 

왕세자 부부가 오키나와에 도착한 7월17일, 나하(那覇) 등 도심에서 수만명이 시한부 파업과 항의시위를 벌였고, 왕세자 부부가 탄 차량에 우유병과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하이라이트는 전쟁 당시 간호병으로 동원된 여고생 등 희생자 226명이 잠든 ‘히메유리 위령탑’에서 벌어졌다. 위령탑 앞 방공호에서 1주일간 잠복해 있던 오해동 멤버 3명이 왕세자 부부가 위령탑 앞에 도착하자 뛰쳐나와 화염병을 던졌다. 다행히 빗나갔지만 세자빈이 넘어지면서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다. 한바탕 큰 소동에도 아키히토 왕세자는 동요하지 않고 남은 일정을 소화했다. 그는 그날 밤 “전쟁에서 현민이 겪은 상흔을 깊이 새기고, 평화의 염원을 미래로 이어가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오키나와 화염병 피습사건은 다음달 퇴위하는 아키히토 일왕의 일생 중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이자, 선대가 쌓은 죄업의 무게를 실감하는 계기가 됐다. 그가 ‘평화주의’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은 날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재위기간 사이판, 팔라우, 필리핀, 중국 등 일본의 침략지들을 순례하며 선대의 업을 씻어 나갔다.

지진, 쓰나미 등 재난이 발생할 때에도 아키히토 일왕은 어김없이 피해지역을 찾아갔다. 작고 구부정한 체구에 소탈한 인상의 일왕이 무릎을 꿇은 채 피난소의 주민들을 위로하고, 피해지역을 향해 묵도하는 모습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과거 ‘아라히토가미(現人神·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 신)이던 ‘일본 천황’이 말 그대로 평화와 국민통합의 상징이 된 것은 이런 노력에 힘입었다. 그의 재위기간인 헤이세이(平成) 30년은 그의 바람대로 전쟁 없는 시대로 막을 내리게 됐다.

 

아키히토 일왕에게 한국은 오키나와 이상으로 각별한 곳이다. 일왕은 2001년 ‘환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며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했고, 2017년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사이타마현 고마(高麗)신사를 방문했다. 대학 시절 일왕을 만난 적이 있는 재일동포 지인은 “한국에 대한 관심의 깊이가 남달랐다”고 그를 기억했다. 

일왕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한국을 방문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방한 의지는 여전하다고 전해진다. 1990년에는 한국지배에 대해 ‘통석(痛惜)의 염(念)’이라고 반성했고, 1998년 방일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다’며 사과했다. 2005년 6월 사이판 방문 때에는 예고 없이 한국·조선인 위령비에 참배했다. 과거사에 무신경한 아베 신조(安培晋三) 총리와 달리 아키히토 일왕은 2015년부터 해마다 패전일(8월15일)에 “과거를 돌이켜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해왔다. 

 

한·일관계는 기본적인 신뢰관계까지 허물어진 최악의 상태다. 일본의 대표적인 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가 헤이세이 마지막호에서 ‘일·한단교 시뮬레이션’을 특집으로 실을 정도다. 일본은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놓고 딴지를 걸고 있고, 여차하면 한국을 대신해 북핵협상을 주도할 기세다. 야당의 반대가 없고, 자금(배상금)도 충분하고, 미국 조야의 지지도 두터우니 해볼 만하다고 여길 것이다. 한·일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갈 또 하나의 지뢰다. 

아키히토 일왕은 44년 전 “돌을 맞더라도 가겠다”며 오키나와 방문을 결행했다. 일왕은 지난해까지 11차례나 오키나와를 찾았고, 그러는 사이에 주민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정치인들은 결코 불가능한, ‘평화주의자 아키히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평생에 걸친 ‘평화순례’는 한국이 포함돼야 비로소 완결된다. 일왕이 한국을 방문한다면 불신과 대립의 양국관계가 전기를 맞을 수 있다. 불가능한 일만도 아닐 것이다. 북·미정상회담이 2차례나 열릴거라고 2년 전에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2019년 3월21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