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여적]저무는 헤이세이

서의동 2019. 8. 9. 23:32

2019.03.05  

1989년 1월7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사망하자 일본은 나라 전체가 거대한 상가로 변했다. TV는 광고는 물론 노래와 드라마 방송을 중단했다. 유원지, 경마장이 문을 닫았고 유흥가도 철시했다. 상가에는 흰색 제등이 걸렸고, 관공서와 회사의 건물 화단엔 국화가 심어졌다. 도쿄 긴자의 밤거리를 수놓던 네온사인과 광고탑도 모두 꺼졌다. 유명 아이돌그룹 ‘히카루 겐지’의 콘서트가 취소돼 전국에서 몰려든 소녀팬들이 울며 돌아서야 했다.

‘자숙(自肅)’바람은 일왕의 건강이 악화되던 1988년 여름부터 반년 넘게 이어졌다. 일본 언론들은 일왕의 맥박수까지 연일 전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떠들썩한 이벤트는 취소하는 게 마땅하다는 분위기 속에서 결혼식조차 미뤄졌다. 민주주의 국가이자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어울리지 않는 그로테스크한 봉건성의 발현이었다.

“그것은 괴이한 광경이었다. 전전(戰前)의 일본, 한반도를 유린했던 제국 일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재일한국인 학자 강상중은 당시의 이상 열기를 두고 “자유롭고 풍요로운 일본에 익숙해 있던 나는, 또 다른 일본의 모습에 섬뜩 놀라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경향신문 2013년 12월2일자 ‘강상중 칼럼’)

히로히토의 뒤를 이은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생전퇴위를 결정한 데는 이런 음습한 광경이 몇 달씩 펼쳐질 것에 대한 우려가 있던 것 같다. 그는 2016년 8월 이런뜻을 밝히면서 “무거운 장례행사가 매일 거의 두 달간 이어진다”고 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시대착오적인 봉건성이 일본에 되풀이되는 것을 꺼린 것이다.

아키히토의 헤이세이(平成) 30년은 쇼와(昭和)시대(1926~1989) 못지않은 격동기였다. 경제 거품이 붕괴되며 장기불황이 덮쳤고, 대지진과 원전사고 등 재난이 빈발했다. 재난 때마다 어려운 이들을 챙겼고, 일본 정치의 우경화에 맞서 ‘평화주의’를 역설해온 아키히토 일왕은 ‘천황제’로 인한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을 국민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여긴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저물어가는 헤이세이 일본의 표정은 30년 전과는 딴판이다. 헤이세이 마지막 날인 4월30일을 앞두고 ‘아키히토 퇴위 마케팅’이 성행할 정도면 그의 뜻은 성공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