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1931~2019). 벨기에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958년 가톨릭 사제가 된 뒤 이듬해 부산항에 발을 디뎠다. 1964년 임실에 부임해 가난에 찌든 산골마을 농민들을 위해 산양을 기르고 산양유를 생산했다. 하지만 잘 팔리지 않자 치즈 생산에 도전했고, 곡절 끝에 성공해 1969년부터 치즈를 본격 생산했다. 제대로 된 치즈공장 하나 없던 당시 임실 치즈는 서울의 특급호텔에 납품될 정도로 인기였다. 지정환 신부는 치즈공장의 운영권, 소유권을 주민협동조합에 넘긴 뒤 장애인을 돕는 일에 남은 생을 보내다 지난 4월13일 선종했다. 그는 가수 노사연의 ‘만남’을 좋아해 장례식에서도 불러 달라고 했다. “우리들의 만남은 하나라도 우연이 없다. 그렇게 귀하게 만났으니 서로 사랑해야 한다.”
‘빈민 사목의 대부’ 정일우 신부(1935~2014).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그는 1960년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서강대에서 신학교리를 가르치다 그만두고 청계천, 양평동, 성남의 판자촌의 빈민들 속에 파묻혔다. 이때 만난 빈민운동가 제정구(1944~1999)와 경기 시흥에 복음자리 마을을 만들었다. 그는 앞에 나서거나 주장하는 대신 함께 일하고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삶을 나눴다. 그를 만난 이들은 고통을 덜었고, 삶이 달라졌다.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삶이다.
미국인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1935~2019)은 1956년 한국에 들어와 부모 해리 홀트와 버사 홀트가 세운 홀트아동복지회에 합류한 이래 60여년간 장애인과 고아, 미혼 부모들을 돌봤다. 팔순 고령에도 고양시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300여명의 중증 장애인들과 함께 활동했다. 만년까지 자기 방도 없이 장애인 4명과 함께 기거해온 그를 장애인들은 ‘말리 언니’라고 불렀다.
이들은 한국이 최악의 빈곤상태이던 무렵부터 반백년을 ‘낮은 곳’에서 머물렀다. 낯선 땅에 임한 푸른 눈의 성자(聖者)들 덕에 사람들은 울음을 그쳤고, 주름을 펴고 웃었다. 그랬던 성자들이 한 명씩 하늘로 돌아가고 있다. 말리 홀트가 지난 17일 별세했다. 그들이 품었던 공간을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품어야 한다. 별이 된 그들이 매일밤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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