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6월3일 한국외국어대 캠퍼스에 총학생회의 교내방송이 울렸다. “학우 여러분, 전교조 선생님들을 학살한 정원식이 지금 학교에 있습니다.” 국무총리 서리에 지명된 정원식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은 이날 외대 대학원에서 예정된 마지막 강의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강의를 서둘러 마치고 학교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흥분한 학생들이 에워싼 채 계란과 밀가루를 퍼부으며 폭행했다. 얼굴과 전신이 밀가루 범벅이 된 정 총리의 흉한 몰골이 다음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그해 4월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고,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시위현장에서 압사당했다. 공안정국에 저항하던 대학생들이 잇따라 희생되면서 정권 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잇따랐다. 그런 와중에 장관 시절 전교조를 불법화한 정원식을 총리로 지명한 것은 학생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하지만 ‘밀가루 사건’으로 정국은 급반전됐다. 정부는 “체제수호 차원에서 대처하겠다”며 대반격에 나섰고, 대학생들은 ‘스승을 모욕한 패륜아’로 몰렸다. 대학가 시위는 한순간에 사그라졌고 집권 민자당은 2주 뒤 지자체 선거에서 압승했다.
당시 기억을 연상시키는 시위가 브렉시트로 혼돈상태인 영국에서 등장했다. 이번엔 밀가루 대신 밀크셰이크다. 지난달 반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극우 정치인 토미 로빈슨이 영국 워링턴에서 유럽의회 선거유세 도중 20대 청년에게 밀크셰이크에 맞은 것을 시작으로 지난 19일과 20일 영국 독립당 칼 벤저민, 브렉시트당 나이절 패라지 등이 잇따라 밀크셰이크를 뒤집어썼다.
밀크셰이크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공격대상을 추한 몰골로 만드는 시각적 효과도 뛰어나 영국에서는 날계란을 대체하는 시위도구로 주목받고 있다. 밀크셰이크 투척시위를 가리키는 신조어 ‘밀크셰이킹(Milkshaking)’이 위키피디아에도 올라 있을 정도다. 어린이 음료를 뒤집어쓴 극우 정치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장면에 통쾌해하는 영국인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정치인들의 ‘브렉시트 놀음’에 몇년씩 휘둘리다 보니 환멸도 쌓였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자. 밀크셰이킹 역시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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